주 안에 우린 하나
(마태복음 10장 2절-4절)
2017년도 상반기를 수 놓은 여러 영화들 중에 우리의 주목을 끈 영화가 한편이 있습니다. 그것은 “히든 피겨스”라는 제목의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 역사 속에서 벌어진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 미국과 구 소련은 치열한 우주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 천부적인 두뇌와 재능을 가진 세 여인이 NASA 최초의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에 선발됩니다. 천부적인 수학 능력을 가진 흑인 여성 캐서린 존슨, NASA 흑인 여성들의 리더이자 프로그래머였던 도로시 본, 그리고 흑인 여성 최초의 NASA 엔지니어를 꿈 꾼 메리 잭슨이 바로 그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여성이었을 뿐만 아니라, 흑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수많은 차별과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800m 떨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고, 또 여자라는 이유로 중요한 회의에 참석조차 할 수 없었으며, 공동으로 사용하는 커피포트 조차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일들을 견뎌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주궤도 비행 프로젝트는 새로운 수학 공식을 찾아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됩니다. 캐서린 존슨을 비롯한 우리의 주인공들은 이 위기의 상황에서 현격한 공을 세웠고, 이들의 멋진 활약으로 영화는 결국 할리우드 특유의 해피 엔딩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사실 차별은 이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차별은 언제나 존재해 왔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이들이 상처와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도 이런 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입니까? 심지어 교회 안에도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존재하는 차별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도 앞서 소개해 드린 영화와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일자리를 찾아 길을 떠난 한 흑인이 있었습니다. 낯선 마을에서 주일을 맞이한 이 흑인 청년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그 마을에 있는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는 백인들만 출석하는 교회였습니다. 결국 그 흑인 청년은 교회 입구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정중히 거절 당했고, 아래 마을에 흑인들이 주로 출석하는 교회로 갈 것은 권유 받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그 청년은 마음이 무거워 가는 도중 길가에 주저 앉고 말았습니다. 그때 어떤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 와서 왜 이렇게 주저 앉아 있느냐고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 청년이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자, 그 이야기를 듣던 그 사람 또한 자기도 교회 들어가는 거절 당했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흑인 청년은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그를 보았는데, 그 분이 누구셨습니까?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교회 안에 차별은 결코 존재해서는 안됩니다. 누구나 들어 올 수 있고, 누구나 예배할 수 있고, 누구나 찬양할 수 있고, 누구나 주님의 은혜 아래서 놀라운 평안과 위로를 경험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막힌 담을 허무시는 만유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교회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부르신 12 제자들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먼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품으신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다양했다는 것입니다.
직업으로 보면 어부도 있었고, 세리도 있었습니다. 출신도 보면 크게는 대부분이 갈릴리 지역 출신이었지만, 세부적으로 보면 벳새다, 가나, 가버나움 등 여러 다양한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또 성격도 다양했습니다. 베드로는 다혈질이었고,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보아너게,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가졌을 정도로 아주 강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반면에 도마는 의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고, 세리였던 마태와 유다는 꼼꼼하고 세밀한 성격의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아무리 손으로 뭉치려 해도 뭉쳐지지 않는 모래알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 모습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출신도 다양합니다. 직업도 다양합니다. 성격도 제 각각 입니다. 관심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재능도 얼마나 가지각색인지 모릅니다. 문제는 이런 다양한 차이들이 여러 오해를 낳고, 이것이 편견과 차별의 원인이 되어, 결국에는 심각한 분쟁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고난주간 세족식 때, ‘오른쪽 발을 먼저 씻어야 하느냐? 왼발을 먼저 씻어야 하느냐?’는 문제로 의견충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사소한 갈등의 불씨는 결국 교회적 갈등을 낳았고, 급기야는 교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오른쪽 발을 먼저 씻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이 나가서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들은 교회의 이름을 ‘오른발 교회’(Right foot church)지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갈등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주 안에서 하나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가능합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12명의 제자들 중에 특별히 두 명의 이름이 눈에 띕니다. 한 명은 마태이고, 또 한 명은 시몬입니다. 우리가 두 사람의 이름에 주목하는 이유는, 다른 제자들의 이름과 달리, 이 두 사람의 이름 앞에, 간단하게 나마, 이 사람들이 어떠한 자들이었는지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어떤 자였습니까? 세리였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어떤 자였습니까? 가나나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분명한 의도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와 가나나인은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그런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 당시의 상황을 먼저 머리 속에 그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로마 제국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리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세리는 말 그래도 세금을 걷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세금을 거두어서 누구에게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까? 자기의 동족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일 빼앗아서 로마 제국에 그것을 헌납하는 일을 했던 자들이 바로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아주 헌신적으로 일한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가나나인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여기서 “가나나인”라는 단어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카난”이라는 아람어에서 온 말인데 해석하면 열심당원으로 로마 제국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립을 강력하게 원했던, 독립 운동을 펼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 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세리와 로마 제국에 저항하며 이스라엘의 독립을 꿈꾸었던 가나나인이 함께 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이 둘이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세리는 가나나인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 못하고, 헛된 꿈을 꾸는 고집쟁이 망상주의자’로 비난할 것이고, 반대로 가나나인은 세리를,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동족을 고혈을 빨아먹는 민족의 반역자’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이 두 부류가 지금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에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에게 차별과 갈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삶의 기준을 주님 외에,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리 마태와 가나나인 시몬이 서로 갈등하고 반목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 제국이라는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명은 로마 제국에 찬성하는 사람이고, 한명은 로마 제국에 반대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기준이라면 그 둘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가치와 뿌리를 세상에 두면 우리를 결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 생각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주님께 우리 삶의 기준을 두면, 우리는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삶을 뿌리를 둔다는 것은, 먼저는 주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깨닫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유명한 예술가가 어떤 작품을 심혈을 기울여 제작했다면 그 작품은 명품이 됩니다. 그 어떤 것으로 값을 따질 수 없는 대작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주님 안에서 살아 간다는 것은 내가 그냥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그 놀라운 능력의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요, 그 어떠한 것으로 값을 따질 수 없는 하나님의 명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만 명품입니까? 내가 명품이면, 또한 내 옆에 있는 믿음의 지체도 명품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이면, 내 옆에 있는 사람도 주님 안에서 존귀한 자입니다. 세상을 기준으로 하면 나이도 다르고, 출신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고, 인종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지만 나와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서 존귀하게 지음을 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내가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럼 내 아버지도 하나님입니다. 내 옆에 있는 지체의 아버지도 하나님입니다. 둘이 아버지가 같으면, 우리는 한 가족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차별하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 서로가 서로를 품어주고 앉아주는 주는 유일한 곳이 어디입니까? 가족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우리 하나님을 한 아버지라고 고백할 때, 서로 품어주고 앉아줄 수 있는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아내에 대한 남편의 따뜻한 사랑이 담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날 남편은 분주한 회사일로 인해 늦은 시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저녁 조차 먹지 못한 상태였기에, 아내에게 간단하게 나마 먹을 것을 부탁했습니다. 아내는 너무 구워서 새까맣게 변해 버린 빵을 남편에게 건냈고, 그 모습을 지켜본 아이들은 이제 곧 무슨 일이 일어나겠구나 예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검게 변해버린 빵에 잼을 발라 맛있게 먹었습니다. 심지어는 “와! 이 빵 정말 맛있는 걸” 감탄사를 연발하며 빵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날 아이들은 아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빠 정말 검게 변해 버린 빵이 괜찮았어?” 그러자 아빠가 대답하기를 “정말 맛있었단다. 그리고 만약에 빵에 검게 그을렸다고 내가 엄마에게 화를 냈다면 엄마의 마음은 그 빵보다 더 검게 그을렸을거야! 검게 그을린 빵을 먹는다고 당장 병원에 가는 것도 아니지 않니? 오히려 엄마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것보다, 그 빵을 그냥 맛있게 먹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정말 그 빵은 멋이 있었고!” 사랑하면 서로를 이해 할 수 있고, 가족이면 서로를 용납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세상을 기준으로 서로가 서로를 판단한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 우리의 지식, 우리의 배경, 인간적인 생각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하면 결국 갈등하고 다투고 분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결국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요, 십자가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주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면, 주 안에서 우리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