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06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 / 시 1 / 김소명 목사

20170806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 / 시 1 / 김소명 목사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

시편 1편

 

[기본의 축적]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한국식 이름을 쓴다는 이유로 여러가지 차별 속에서 자라게 되는데, 학교에서는 성적에 대한 불이익을 당하고, 친구들 사이에서는 이지매, 왕따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대부분의 재일한국인들은 일본인으로 귀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한국인으로 남아 큰 성공을 거둔 재일한국인 3세, 김무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3천 명의 일본인 경쟁자를 제치고, “일본 경제경영서 대상’을 수상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세계적인 벤처 투자가가 목표였던 그는, 일본에서 재일한국인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직장인들에게 가장 영향력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됩니다.

그가 일본에서 쓴 책이 한국어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 책의 제목이 “최고들의 일머리 법칙,” 그리고 부제가 “글로벌 엘리트들에게 혼나면서 배운 성공 일습관”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느낀 것은, 세계 어디를 가도, 가장 인기 있는 책이나 존경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해라!” “잘 하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너의 꿈을 펼쳐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솔깃해서, 쉽게 이 주장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트위터나 카톡 혹은 페이스북 같은 Social Network 제목을 이와 비슷하게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 혹은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뭐야?”로 바꾼다 든지, 아니면 프로필 사진을 이와 상응하는 이미지로서 “어떤 사람이 아주 자유롭게 춤을 추는 장면” 이라든가 “파란 하늘을 새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사진”으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정말 뭔가 변화가 시작된 것 같고, 정말로 자기가 꿈에 한발짝 다가선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꿈이라는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꿈은 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던 가요? 정말로 중요한 것은 꿈을 꾸는 것보다 꿈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Sleep Now, you will be dreaming, But Study now, you will be achieving your dream.” “지금 자면 너는 단지 꿈을 꾸게 되지만, 지금 공부하고 노력하면 너는 그 꿈을 이루게 될 것이다.”

김무귀씨는 그의 책에서, 꿈을 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바로 꿈을 붙잡는 일이고, 그것을 위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한 일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기본의 축적”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미 알고는 있지만, 아직 몸에 배어 있지 않는 정말 중요한 기본에 집중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면 하루에 30분이라도 다른 사람의 작품을 연구하고, 업계 최고의 기획자가 되고 싶다면 문제를 제대로 보는 연습부터 해야 하며, 운동선수가 꿈이라면 더 잘하는 법 이전에 다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꿈을 잡으려면 실력이 필요하고, 그 실력의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바로 기본에 충실한 노력과 태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높은 빌딩을 예로 듭니다. 높은 빌딩을 쌓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장 꼭대기의 화려한 조각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눈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가장 아래에 튼튼한 기둥임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내용을 접하면서 믿음의 금자탑을 쌓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성공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된 복을 받는 일일 것입니다. 세상은 줄 수도 알 수도 없는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생의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것, 이것이 믿음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입니다. 그렇다면 이 복을 누리고,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오직 믿음의 기본인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복의 종합선물세트]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복에 대한 종합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예전에는 명절이 되면 아이들에게 과자종합선물세트를 사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으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온갖 종류의 과자들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복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담고 있습니다. 복을 얻는 방법, 복이 주는 유익, 그리고 복의 결과가 오늘 우리가 말씀에 풍성히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복에 근간이요, 믿음의 기초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를 복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라]

그렇다면 첫째로 복을 얻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따라해 봅시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참된 복을 받는 비결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주 오래 전에 개봉한 영화 제목 중에 “사랑을 비를 타고”라는 제목이 있습니다. 이 제목의 빗대어 표현해 보면, 복은 무엇을 타고 온다는 것입니까? “복은 말씀을 타고” 라는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십시오. 복이 있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절 말씀은 복이 있는 자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하기에 앞서 그 반대의 경우인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설명할 때 사용하기 좋은 방법 중에 하나는 그 반대의 경우를 먼저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듣는 관심을 끌면서 설명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명확하고 분명하게 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복의 반대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어떤 단어나 눈에 들어오십니까? 악, 죄, 그리고 오만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는 복이 없는 자, 그러니까 죄인이 어떻게 죄악 된 삶을 살게 되는지 그 원인, 그 가정, 그리고 그 결과를 보여주는 표현들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오만”은 악한 자가 보이는 대표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시편5편 5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우리 주님은 결단코 오만한 자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나 살펴 보았더니, 죄인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면 잘못된 목적지에 다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왜 잘못된 길에 들어섰는가 보았더니, 그 원인이 무엇이었다는 것입니까? 악인의 꾀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마음과 생각이 그 속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악한 마음과 생각이 그 안에 자리 잡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그 안에 무엇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까?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가 북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선포할 때 그 심판을 당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아모스서 8장 1절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말씀이 없어 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어떻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까? 결국 말씀을 멀리한 자가, 복이 없는 자요, 그래서 악한 마음을 품게 되고, 종국에는 복과 상관없는 안타까운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

성경에 보면, 안타까운 죄의 길을 걸어간 모든 사람들이 이 과정을 겪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누구 입니까? 아담입니다.

창세기3장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은 거니실 때, 아담과 하와가 여호와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왜 숨었을까요? 이제 하나님이 없이도 살 수 있다는 오만함이 그들 마음 속에 자리 잡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오만함이 그들 마음 속에 자리를 잡게 되었나 봤더니,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이 결코 범하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행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죄인의 길이 들어섰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죄인의 길에 들어섰는가 보았더니, 누구의 꾀를 따랐기 때문입니까? 뱀의 꾀를 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붙잡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그들을 지으셨고 말씀을 복을 받게 하셨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채우지 않으니까 그 안으로 무엇이 들어온 것입니까? 악한 생각과 마음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에덴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에덴에 뜻이 무엇입니까? 에덴은 “행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덴이 복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말씀을 떠났을 때 복을 빼앗긴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자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호와의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묵상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가뭄에 콩 나듯, 그렇게 말씀을 묵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후탁성도]

여러분! 혹시 “후탁성도”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배도 끝나기 전에 후딱 집에 가버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 일주일 동안 어딘가에 성경을 가만히 모셔 두면 그 위에 무엇이 쌓입니까? 먼지가 쌓입니다. 그러다가 주일이 되면 교회에 성경을 들고 가야 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성경 위에 있는 먼지를 후후 불고, 손을 탁탁 털어냅니다. 그리고 다시 집에 돌아오면 어떻게 합니까? 다시 있던 자리에 고이 잘 모셔 둡니다. 왜? 성경은 귀하고 소중한 것이니까 그래서 자꾸 손 때를 묻히면 안되니까요. 그러다가 또 주일에 되면 어떻게 합니까? 후후 불고 탁탁 털어서 교회에 들고 옵니다. 그러니까 일주에 성경은 한번 만질까 말까 한 성도를 뭐라고 부른다? “후탁성도”라고 부릅니다.

미국에는 이런 경우 거북이 성도Turtle Christian라고 부릅니다. 새는 9일 동안 먹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은 12정도 먹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무려 500일을 먹지 않아도 살고, 뱀은 800일을 그리고 심지어 곤충들은 1200일을 음식 없어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매일 묵상하지 않는 성도를 곤충이나 뱀이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 거북이 성도(Turtle Christian)이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묵상해서는 복이 있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주야로 묵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억지로 하면 안됩니다. 억지로 하면 그것이 무거운 짐이 되고 결국 지쳐서 포기하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주야로 묵상할 수 있습니까? 즐기면 할 수 있습니다.

옛 말에 知之者는 不如好之者요, 好之者는 不如樂之者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니까? 알기만 하는 자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말씀을 통해 얻는 유익을 맛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두번째로 넘어와서 말씀을 통해서 얻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3절을 보십시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어린 왕자라는 소설에 보면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 나옵니다. 사막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어딘가에 우물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광야가 얼마나 척박한 지, 사막이 얼마나 메마른 땅인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민족이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 전에 그 곳을 40년 동안 배회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메마르고 척박한 곳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은 물이 있는 오아시스를 만나는 것이고 거기에서 목을 축이고, 열매로 배를 채우며, 평안한 휴식을 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광야와 같을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디로 가야할 지,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악인의 꾀를 쫓다가 죄인의 길에 들어서고 오만한 자의 자라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 안타까운 인생에서 벗어나서 참된 축복과 평안을 맛보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막과도 같은 인생에서 삶의 오아시스로 나를 인도해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시편 119편 105편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막막 대해에서 뱃사람들이 안전한 포구로 나아가기 위해서 저 하늘에 북극성을 보고 갈 방향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짙은 안개 속에서 어디로 가야할 지 알지 못하는 내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길을 지시하는 등불이 되어 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어로 Tora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헬라어로 번역되는 과정 속에서 노모스로 번역되었고 노모스 법을 뜻하는 영어 Law의 어원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라하면 법, 규정, 율법이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토라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길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앞서 죄인의 길을 걸어간 사람의 예로 아담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1편 3절이 그리고 있는 곳이 바로 에덴 동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이 흐르고, 나무가 푸르르고, 그래서 나무가 열매를 맺고, 모든 일이 풍족하고 풍성하고 넉넉하고 아름다운 그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에덴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여 그 에덴에서 쫓겨나고 그 에덴으로 돌아가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우리들은 그 아담의 저주를 받으며 고통속에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담이 받은 저주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런데 누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일을 하고 종일 수고하고 땀을 흘리며 노력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걱정과 근심, 염려와 슬픔이 우리의 마음을 꽉 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근본적은 이유는 우리가 에덴에서 빼앗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로 인해 에덴에서 쫓겨나서, 에덴으로 돌아가는 기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시편 1편 1절은 아담이 죄를 짓는 과정이요, 에덴에서 쫓겨나는 것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에덴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내 영혼을 축일 물이 있고, 내 생명을 살릴 양식이 있으며,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형통함이 있는 에덴으로 어떻게 돌아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토라, 길,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그분께서 어떻게 이야기 하고 계십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에덴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빼앗긴 축복을 나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빛을 비춰 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 계신 그 곳, 평안한 그 곳, 영원한 그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의지하고 붙잡고 살아가는 자의 결론은 어떻다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 6절에,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는 자는 망하지만,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여호와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나 우리를 살리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입니다.

가정에 세상의 꾀를 따르면 망합니다. 그곳은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면 그곳이 에덴이 되고 천국이 됩니다.

부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꾸 죄에 귀를 기울이고, 내 안에 해결되지 않은 상처에 끌려다니면 부부관계는 지옥이 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창세기 2장 1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아내는 남편의 남편은 아내의 돕는 배필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아내가 하는 이야기는 잔소리가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해 하는 사랑이다. 잔소리도 사랑으로 들으면 연애편지가 됩니다. 가끔 남편이 나를 “으이구, 이 화상아!”라고 부르면, 그 화자가 무슨 뜻입니까? 꽃 花 자에, 모습 象 자를 써서 나를 꽃처럼 아름답다고 부르는 구나 받아들이시면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십자가 모양만 세워놓았다고 해서 교회가 아닙니다. 말씀의 십자가가 중심에 세워져 있고, 그 성도들 심령 심령에 세워져 있을 때 그것이 교회요, 그곳이 에덴이요, 그곳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축복의 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의 103편 말씀,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이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살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