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3 성령의 변화안에 있는 교회 / 행 2:1~4 / 김소명 목사

20170813 성령의 변화안에 있는 교회 / 행 2:1~4 / 김소명 목사

[소니의 몰락]
여러분! Walkman을 아십니까? Walkman은 일본 전자제품 회사인 Sony에서 만든 휴대용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입니다. 1979년에 개발되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제품입니다. 그 전까지 음악을 듣기위해서는, 집에서 전축으로 듣거나, 아니면 팔뚝에 이두박근 정도는 있어야 들고 다닐 수 있는, 대형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소니가 작고 휴대하기 간편한 Walkman, 그러니까 걸어 다니면서도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제품을 출시한 것입니다. 시장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시에 유행을 아는 사람이라는 귀에 이어폰 정도는 끼고 다녀야 할 정도였고, Teenager들에는 필수 아이템이요, 학부모들에게는 그것을 사주느라 등골을 휘게 만드는 등골 Breaker의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제품만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이 Walkman의 인기와 함께 Sony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됩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다른 전 세계 대부분의 전자제품 회사들이 이 Walkman의 인기를 주목하며, Sony의 뒤를 따라가는 형국이었을 정도입니다.

문제는 MP3 파일의 등장이었습니다. 기존에는 카세트 테이프 혹은 CD라 불리는 Compact Disc의 기본적인 크기 때문에 플레이어를 그 저장장치 이상으로 줄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MP3파일이 등장한 것입니다. 또한 파일 형태였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든 네트워크를 통해서 손쉽게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회사들인 MP3파일에 맞추어 더욱 사용하기 편리하고 휴대하기 간편한 플레이어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Sony는 여전히 자기들만의 스타일로 플레이어 시장을 선도할 수 있다고 착각하였고, 그렇게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Sony는 결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한때는 혁신의 아이콘으로 주목을 받던 회사가, 제대로 혁신을 이루지 못하게 되자,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진 존재로 남게 된 것입니다.

 

[혁신의 중요성]
사실 변화와 혁신은 소니와 같은 기업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문제에서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중국의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세숫대야에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이라는 아홉 글자를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닦을 때마다 “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라는 뜻을 되새기며 스스로 반성하고 새롭게 변화하려는 다짐으로 늘 하루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와 혁신은 또한 신앙의 문제에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갖고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 방식, 생활 습관,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오직 주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1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악 된 인생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삶이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둠에 속한 자였고, 죄에 종 노릇하던 자였고, 세상에 헛된 소망을 품은 자였지만, 십자가의 보혈로 깨끗이 씻음 바 되여, 날마다 주의 은혜로 새로워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신앙 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요, 주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행전]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는 그 변화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의 자녀들이 놀라운 변화되어,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룬 이야기가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도행전”입니다. 물론 헬라어 원어도 “프락세이스 아포스톨론,” “사도들의 행전”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영어는 이를 그냥 Acts라고만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의 행적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들을 이끄시고 그들 안에 충만한 능력을 부어주신 분이 성령이시기에 어떤 측면에서 우리는 이를 “성령행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행하신 구체적인 사건이 무엇입니까? 사도들이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라이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면서 행한 구체적인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의 교회를 세운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행전은 또한 어떤 행전? “교회행전”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다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이룬 주님의 공동체입니다. 로마서 12장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바로 그 변화된 성도들이 함께 모여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장에는, 어떠한 구체적인 변화와 새로워짐으로 인하여 이 땅에 교회가 세워졌는지, 그 세 가지의 큰 변화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첫번째, 어떤 놀라운 변화를 통하여 교회가 탄생하였다는 것입니까?

따라해 봅시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의 속에서 제자들이 먼저 품고 있었던 마음은 두려움이었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자신들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직업도 버리고, 삶의 터전과 가족도 뒤로하고 온전히 예수님을 따르면서 3년을 동거동락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께서 로마 병정들에게 끌려가셔서 고초를 당하시더니,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누구도 예수님처럼 비참한 죽음을 당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까? 제자들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두려움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집니다. 고향으로 돌아가고, 다시 원래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가 버립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다시 모이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 안에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마가의 다락방에서 숨어서, 주님께서 보내 주시겠다 말씀하신 성령을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그런 그들에게 약속된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변화가 일어났는데,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사도행전 2장 14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두려워 숨어 있던 자들이, 사람들 앞에 당당히 서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대해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실로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 베드로가 누구에게 외치고 있습니까? 지금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성난 군중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이를 비유로 설명하자면, 지금 베드로는 예수라는 휘발유를 몸에 뒤집어 쓰고, 활활 타오르는 군중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예수님을 세번이나 부인했던 겁쟁이 베드로나 제자들 같았으면 꿈도 꾸지 못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그들 가운데 임하니까,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은 사라지고, 세상이 감당 못할 충만한 용기가 그들 안에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두려움]
여러분! 두려움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자가 품는 대표적인 마음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서 보인 태도가 무엇입니까? 창세기 3장 10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성경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이때 처음 나옵니다. 왜 두려움이 그들 안에 나타났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더니, 가장 먼저 그들 안에 나타난 것이 두려움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결과적으로, 두려움은 지금 나의 신앙상태가 어떠한 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기도 합니다. 만약 내 안에 어떤 두려움이 있고, 그 두려움 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나의 신앙에는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반드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우리에게 어떻게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까? 이사야 12장 2절을 보십시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니 그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다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온전히 자복하고 회개하며, 시편 18편 2절에 기록된 다윗의 고백처럼, 다윗이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외치고 선포할 때, 주님께서 나에게 모든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600만명, 유럽 전체 유대인들 중에서 80%가 학살을 당한 아우슈비츠에 나중에 이런 낙서가 발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God is Here, 주님은 이곳에 계십니다. 우리를 살게 하고 담대하게 하고 용기 있게 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요, 성령님께서 임하실 때 이것을 깨닫게 하시고 믿고 의지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서 38절까지는 믿음 안에 거했던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어떠한 용기를 가지고 담대하게 주님을 증거하고 선포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품은 믿음이 어떤 것이었는지 보십시오. “33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어떤 자가 이런 용기와 담대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믿음을 품은 자들이 이런 굳건하고 확실한 마음을 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용기와 담대함이 교회를 교회되게 하였고, 지금까지 교회를 든든하는 힘과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담대함이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 모든 성도님들 가운데 충만하기를 축복 드립니다.

 

[분열에서 하나됨으로]
두번째, 성령의 임재 가운데 어떠한 변화가 그들 가운데 일어났습니까?
4절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리고 그 일로 말미암아 어떠한 일이 벌어졌습니까? 1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서로 소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죄의 일은 어떻습니까? 히브리서 10장 25절 말씀에,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폐하게 하고, 흩어지게 하고 분열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그와는 정반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모이게 하고, 하나되게 하고, 연합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심리적으로 잘 분석해 준 책 중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요지는 간단합니다. 남자와 여자는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서 태어나고 자란 존재들처럼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르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요, 행복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여 결혼하고 몇 십년을 함께 산 부부라 하더라도 얻는 결론은 무엇입니까? “이 사람 속을 도저히 모르겠다”는 것 아닙니까? 굳이 부부 관계까지 거론하지 않더라도 옛 속담에 어떤 표현이 있습니까?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지요. 이를 영어로는 Man and Melons are hard to know로 표현합니다. 멜론이라는 것이 겉이 딱딱하기에 속이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 잘 알 수 없는 것처럼, 사람 속에 마치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참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입니다. 성별도 다르고, 고향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그래서 생각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생활 패턴도 다릅니다. 때로는 그런 차이들이 오해를 낳고 그런 오해들이 다툼과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서울에 살고 있던 참새가 하루는 경상도에 살고 있는 친구 참새 집에 놀러갔습니다. 한참 전기 줄에 앉아서 놀고 있는데, 포수가 총을 쏘려 하자 경상도 참새가 외쳤습니다. “모두 수구리!” 그러자 경상도 참새는 알아들고 모두 엎드렸지만, 서울 참새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그만 포수가 쏜 총에 맞고 말았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간신히 살아난 서울 참새는 다음에는 절대 총을 맞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고 “수구리”라는 경상도 말을 달달 외웠습니다. 얼마 후 경상도에 살고 있는 참새 집을 다시 방문하여, 한참 전기줄에 앉아 놀고 있는데, 포수가 또 총을 쏘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서울 참새만 총애 맞았습니다. 그때 경상도 참새가 외친 말이 무엇이었다는 것입니까? “아까 메치로!”

그런데 어떻게 모두가 다 똑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몇 십년간 한 이불 덮고 살아온 부부도,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모를 때가 많은데, 어떻게 교회 안에서 모든 성도가 다 똑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가지 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에베소서 2장 18절 말씀,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안에서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오에서 용서와 사랑으로]
마지막으로 성령 안에서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까? 미움에서 사랑으로 변화되는 경험을 누리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와 사도들이 복음을 선포한 대상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라고 외친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 군중들은 사도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임과 동시에 또 어떤 대상이었습니까?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두려움을 이기는 용기만이 아니라 미움을 이기는 용서와 사랑이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또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가 바로 미움이, 다툼이, 분열과 증오가, 사랑과 이해와 용서와 긍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어떤 한 성도님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요즘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운동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런데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가지 특별한 일을 하는데, 마음에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면 일부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계단을 오른다는 것입니다. 아무개 사랑한다, 아무래 사랑한다, 아무개 사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면 이상하게도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의 마음은 사라지고, 진짜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물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그분의 마음이 바뀌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변화는 계단을 오르기 전, ‘나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을 미워하지 말고 사랑해야지’라고 마음을 품은 그 순간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누가 그 마음을 그분께 허락하셨을까 생각해 보니까, 그분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분을 그렇게 인도해 주셨구나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요즘 얼마나 말씀을 사모하고, 은혜를 사모하고, 또 귀하게 헌신 하시는지 모릅니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며, 성령이 그 안에 충만이 임하면, 결국 어떤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까? 미움이 사랑으로 증오가 용서로 변화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으로 돌아와서, 결국 성령에 의한 놀라운 변화로 인하여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사도행전 2장 41절에,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이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최초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것이 사람의 역사입니까? 아닙니다. 이는 온전히 하늘의 역사였고,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그들 가운데 성령이 임하였을 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그 놀라운 변화 속에서 구원의 방주, 은혜의 터전, 하늘의 공동체인 교회가 이 땅 가운데 온전히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오직 성령의 역사로 세워집니다. 성령의 역사 안에서 성도가 변화될 때 담대함을 품고, 하나되어, 서로 사랑할 때 아름다운 주님의 공동체인 교회를 세워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뉴저지 장로 교회가 45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늘 주님 안에 변화되어 더욱 쓰임 받는 믿음의 공동체로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갈 수 있기를 축복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