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81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삼상16:6~12 / 강용승 목사

2017081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 삼상16:6~12 / 강용승 목사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삼상 16:6-12)

 

오늘 8월 둘째 주일은 교회창립 45주년, 광복절 72주년 기념 주일.

어떻게 이렇게 큰 기념 주일이 두개나 겹쳤나? 그런데 어떤 긴밀한 연결고리를 발견. 교회창립45주년인데 광복은 1945년에, 광복 72주년인데 우리 교회는 1972년에 창립

광복(빛을 회복, 되찾다 의 뜻) 하나님께서 광복절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빛을 비추셨던 것처럼.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뉴저지장로교회를 통해서 이곳 뉴저지에 빛을 비추기 시작하심을 믿습니다.

둘 다 처음에는 너무 미약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광복을 맞이했다고 할 때 세계에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습니다. 너무 가난했고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 했기 때문. 그렇게 미약하던 우리 민족을 하나님께서 은혜가운데 택하시고 축복하셔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 세상에 얼마나 교회들이 많은데 누가 이제 막 시작한 미약한 개척교회를 주목해서 보겠습니까? 키네른에서 창립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예배 처소를 얻기 위해서 세코쿠스(Secaucus)에서 저지시티(Jersey City)로 또 이곳 팰팍으로 옮겨다녀 야 했고, 개척 당시에 목사님도 자주 바뀌어서, 어떤 권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러다 우리 교회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그렇게 눈물로 많이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교회 촛대를 옮기지 마시고, 우리 교회를 지켜 주시고, 우리 교회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 중심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 기도의 중심, 그 믿음의 중심을 보시고, 우리 뉴저지장로교회를 그 미약함 중에 택하셔서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택하심과 작정 안에서 우리가 많은 은혜를 받아 오늘 여기까지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 뉴저지장로교회와 특별히 우리 성도 개개인이 어떤 모습

◆난민촌이나 낙후된 선교지에 가보면, 가난한 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공도 낡고 심지어 신발도 없는 아이들. 지켜보던 한 사람이 한 아이를 가르켜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겠어” 라고 할 때, 누가 그 말을 진지하게 듣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람이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구 감독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산더 퍼거슨 이라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아무도 그 아이에 대한 평가를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난을 보고, 낡은 공을 보고 맨발을 보지만, 그 사람은 최고의 통찰을 가지고 그 아이의 재능을 꿰뚫어보는 것이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아무도 알아 주지 않는 베들레헴 촌동네에 찾아가셔서 한 아이를 보고 말씀하시길 “이 아이가 내가 찾던 바로 그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의 안목은 촌동네, 그것도 아들 많은 집안 막둥이, 배운 것도 없이 목동이나 하던 촌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그 안목을 가지고 그 아이를 가르키면서, “바로 이 아이다. 내가 계획한 모든 일을 이 소년이 통해 이루겠다” 라고 하십니다.

초대왕 사울은 거듭된 불순종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다. 많은 그의 인간적 장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테스트에 불합격했습니다. 평온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 그는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어요 그러나 어려움이 닥쳐오고, 유혹이 왔을 때 그는 하나님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사람을 택하고 하나님을 저버렸을 때, 자신의 욕망과 체면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을 때, 그는 역사의 주인공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교회도 또 우리 개인도 기억해야할 것이 이것입니다. 들어 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면 거기에서 내려오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상2:6-7>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뜻에 끊임없이 순종하는 모습이 있으면 계속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 하다고 이만하면 됐다고, 어느 순간부터 안주하고 하나님의 뜻보다 사람들의 평가를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이 맡기신 사역보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한다면… 하나님은… 이제 거기서 내려 와라고 하실 것입니다.

이제 사울에게 내려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심 – <1절> ●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그런데 2절에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절대 알게 하면 안된다. 사무엘은 자기가 죽을 거라고 했지만… 그러면 베들레헴 사내 아이들 다 죽습니다. 그게 정치다. 이런 상황이 예수님 당시 동방박사들이 했던 실수였다.

하나님은 그런 정황을 감안해서, 암송아지를 끌고 제사를 드리러 가라, 그리고 그곳에서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여기서부터 사울은 하나님 일의 걸림돌로 작용 – 두려운 것은, 쓰임 받는 것과 걸림돌이 되는 것 사이의 간격이 너무 가깝다는 것.  말씀으로 자신을 쳐 복종케 하는데서 벗어나면, 하나님보다 자기 자존심을 생각하면… 바로 걸림돌…….

사무엘은 가서 말씀하신 대로 제사를 드리자고 하고는 이새의 아들들을 보게 된다. 그런데 사무엘이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장자권과 출생 서열이 중요했던 문화에서 당연히 장자가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그 때 하나님은 7절에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다 보고 나서 사무엘의 당황…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급하게 불렀는데, 형제 중에 제일 어린 막내가 붉고 여드름이 난 얼굴로 등장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너무 기뻐하시고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이 후로 다윗의 일평생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은 다윗의 별명처럼 되었다.

하나님은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불려온 다윗의 중심에서 무엇을 보셨을까요? 그동안의 삶에서 그리고 이후로 펼쳐지는 다윗의 삶의 모습 속에서 어떤 모습을 하나님은 그렇게 기뻐하셨을까요?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봄

먼저 다윗에게 있었던 모습은 지금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다윗에게 있는 그 자리는, 목동의 들판이었다.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목동의 들판은 시편 23편 다윗의 시편이다.

푸른 초원에 한쪽에서 양이 울고 목동은 바위 위에 앉아서 하프를 켜면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얼마나 좋을까? 그 호젓하고, 좋은 환경이면, 정시 출퇴근도 없고, 나를 찾는 전화도 없는 곳에서 편하게 1주일만 보내면…

그러나 다윗의 실재 들판은 그런 곳이 아니었다. 초록색 보다는 황갈색, 풀보다 바위와 돌이 훨씬 더 많은…  춥고, 덥고, 들짐승들의 위험에도 다 노출되어진 곳……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자는 것도 하나도 갖춰진 것이 없는 곳….

그런데 다윗은 바로 그런 목동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일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목동이었지만, 사무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는 목동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면서.. 자신이 목동이었을 때. 함께 했던 그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다윗의 목동생활이 얼마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간이었고 그분을 바라보고 은혜 받는 기간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시편 107:23-24> ●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들과 그의 기이한 일들을 깊은 바다에서 보나니”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가 일하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행하심을 볼 수 있어야 하고,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하루의 시간을 보내십니까? 가게, 오피스, 가정….

그곳이 바로 여러분에게 다윗의 들판이고,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곳…..

거칠고, 힘들고, 아직 안정되지 않았고, 모든 게 아직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어도…..

다윗은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또한 어디 있던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들판에서는 목동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광야에서 도망자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왕궁에서 왕으로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바라봄…. (그도 약할 때가 없지 않았다. 나발을 죽이러 가거나 밧세바를 범했을 때 그는 다른 것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러나 곧 그는 하나님 앞으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께서 어디에 두시고 어떤 모양으로 쓰셔도 항상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중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1. 은혜의 경험들을 기억함

또한 가지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이 주신 크고 작은 은혜를 거억하고 누적하는 모습.

비바람을 피하고 –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가 되시는 구나

양을 구하고 나는 너의 목자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구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사자와 곰과 싸우고 나서도…

나중에 이것이 언제 드러나는가? 골리앗과 싸울 때..

<17:34-37>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다윗은 갑자기 골리앗 앞에 나갈 수 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그는 그동안의 들판에서의 기억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자나 곰이 와서… 사자와 곰도 쳤은즉…

뭔가 지난 기억들과 현재의 사건이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

은혜를 기억하고 누적하면. 그것이 크냐 작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도우셨다, 축복하셨다” 라는 중요한 원리가 남게 된다. 이것이 그 사람을 담대하게.

우리가 그렇게 은혜를 받아도 담대하게 더 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물에 원수는 돌에 세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자주 큰 은혜를 받아도 그것을 기억하고 누적하지 않으면 믿음이 자라지 않고 항상 같은 수준에서 원망하고 불평. 광야에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은혜의 경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것을 누적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게된다. 그 누적이 하나님의 사람을 강력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 – 그의 음식(1), 풀무불 (3), 사자굴(6)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셨을 때 그 중심에서 발견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동안 베풀어 주셨던 크고 작은 모든 은혜의 경험들이 다 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도 잊지 않고 늘 얼마나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는지 함께하셨는지…. 은혜를 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그것을 기억하고 그것을 힘입어 더 큰 일들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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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중심, 모든 주신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쌓는 그런 중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다윗의 택하여 일하셨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님의 마음도 다윗과 같아서, 어디에 있든지 지금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모든 주신 은혜를 늘 기억함으로 날마다 은혜 안에서 강하여지는 신앙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