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5:34-45/작은 자 편에 서는 교회
총균쇠
1972년 미국의 생태학자였던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열대의 섬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뉴기니의 정치가 얄리를 우연히 만납니다. 얄리는 제레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네 백인들은 그렇게 많은 화물을 만들어 뉴기니까지 가지고 왔는데 왜 우리 흑인들은 그런 화물을 만들지 못 하는 겁니까?’ 이 질문은 오늘날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백인들이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 오래 된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전통적 대답은 백인이 타인종보다 지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얄리의 질문을 화두로 연구를 시작하여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되는 책 ‘총, 균, 쇠’를 출판합니다. 이 책의 결론을 요약하자면, 서구의 백인이 현대세계의 패권을 쥐게 된 것은 ‘인종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행운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문명의 발상지인 지중해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은 야생동물의 가축화와 야생식물의 작물화에 최적화된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이 지역은 대규모 농경과 유목이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발전한 지역이 되었고 이 곳과 가까우면서도 위도가 비슷한 유라시아 지방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지식과 기술을 가장 빨리 받아들여 농업생산량이 늘고 그에 따라 인구가 늘고 기술을 발전시켜 타지역보다 앞선 문명을 발전시켰습니다. 결국 서구 백인들이 현대 세계의 패권을 쥐게 된 이유는 그들의 인종적 우수성 때문이 아니라 환경적 유리함이라는 말입니다.
역사의 무게
이런 주장에 대해 현실적인 경험을 통해 반문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목사님은 안 겪어봐서 잘 모르십니다. 실제로 겪어보면 흑인은 부정직하고 라티노는 게으릅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가요?’ 이와 같은 주장을 과거 여러 학자들은 미국의 흑인들의, 아프리칸 어메리칸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습니다, 지능검사결과가 백인보다 평균 15점 정도가 낮다는 사실을 근거로 들며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연구결과는 이 역시 환경적 요인이 주된 이유임을 밝혀 줍니다. 흑인들은 약 3백 년 동안 노예로 압제를 당하며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기질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백인주인들이 보기에 비굴하게 행동해야 했고 학문이나 전문기술이나 지도자의 자리를 탐내는 것은 그들의 명을 단축시키는 지름길이었습니다. 노예해방이 된 후에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벽과 보이는 폭력 앞에서 그들을 가두고 있는 사회적 감옥을 뚫고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하는 소년, 소녀들은 이미 3백년의 압제의 결과로 아프리칸들의 공동체에 만연한 파괴된 가정, 어머니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상황 그래서 부모로부터 충분한 관심과 지원을 받지 못 하는 상황, 범죄가 아니고는 생존하지 못 하는 젊은이들이 가득 한 마을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 등에서 좌절합니다. 3백년 압제의 역사의 무게를 단 몇 십년에 극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능검사에서 백인과 흑인 청소년들의 차이는 마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유소년팀에서 세계 최고의 전문코치들로부터 훈련받은 아이와 동네에서 고무공을 차고 논 아이를 나란히 놓고 축구를 시켜보니 전자가 더 잘 하더라는 결론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히스패닉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스페인과 포르투칼의 정복자들에 의해 대량학살과 문명파괴 그리고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길고 참혹한 차별과 압제를 겪으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왔습니다. 그런 비극의 역사를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처지와 삶의 방식을 함부로 재단하는 것은 결코 신중한 자세가 아닙니다.
인종주의
오늘 왜 이렇게 길게 인종문제를 거론합니까? 최근 미국사회는 휴스턴 홍수와 북핵위기로 큰 걱정거리를 껴안고 있습니다만 이보다 더 큰 충격을 안겨준 사건은 버지니아 샬롯빌에서 발생한 백인우월주의의 폭동과 테러입니다. 지난 5월부터 시작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시위는 KKK단과 네오나치, 민병대의 폭동으로 발전했고 이에 반대하는 이들의 시위와 충돌하다가 마침내 지난 12일에는 극우단체 소속의 한 청년의 차량돌진테러로 인종주의 반대시위자 중 한 명이 사망하고 다수가 부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번 폭동의 특징은 백인우월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얀 두건을 쓰고 다녔던 KKK단은 이제 얼굴을 내놓고 권총과 장총으로 무장하고 방송카메라 앞에서 꺼리낌없이 유색인종을 위협하며 독일 나치가 쓰던 구호를 외칩니다. 그들의 이런 두려움 없음과 당당함은 분명 트럼프 대통령의 비호 아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트럼프는 잠시 여론을 의식한 듯 하였지만 결국 인종주의자들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여서 그 본심을 드러내었습니다. 미전역이 휴스턴 홍수로 인해 근심에 쌓여있던 지난 25일 트럼프는 아랑곳하지 않고 인종차별로 악명높은 한 보안관의 사면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보안관은 히스패닉계를 집중적으로 불법 단속하여 아리조나의 땡볕 아래 텐트감옥 속에 가두고 살인적인 더위와 추위, 굶주림으로 고문한 인권침해로 유죄평결을 받아 선고를 앞둔 상태였는데 트럼프는 이례적으로 선고도 안 끝난 상황에서 사면을 발표한 것입니다. 사실상 인종차별을 묵인하고 방조하겠다는 메시지에 다름 아닙니다. 공화당 내에서조차도 동의할 수 없는 결정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이 사회에 인종주의가 얼마나 만연한지를 어저께 나온 뉴스도 보여줍니다. 작년 7월 조지아주에서 한 경찰관이 백인 여성이 탄 차를 검문하면서 여성 운전자가 긴장하는 모습을 보이자 ‘긴장하지 마세요. 우리는 흑인만 죽입니다. 알겠죠? 우리는 흑인만 죽입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합니까? 미국사회에서 유색인종들은 Minority 소수자들, 작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십니까? 오늘 본문 40절과 45절을 보십시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자, 약자, 소외된 자,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비난받고 위협당하고 무시당하는 소수인종들, 유색인종들을 대하는 것을 곧 당신 자신에게 대하는 것으로 여기겠다는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아프리칸 어메리칸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히스패닉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와 피부색과 출신과 언어와 문화와 기질과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 어떤 이들이라도 차별한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차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가 예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심지어 차별한다면 그의 믿음을 진짜라고 볼 수 있겠습니까? 그가 무엇이라 주장하든 그의 믿음은 거짓이라고 결론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반면 우리가 소수인종, 유색인종들을 존중하고 섬긴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토요일 아침마다 아가페 사역으로 팔팍의 히스패닉 형제들을 섬기러 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섬기러 나가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히스패닉부를 통해 히스패닉 예배 공동체를 섬기는 것 그리고 여러 선교팀이 라틴아메리카에 계절을 가리지 않고 선교와 봉사를 나가는 것 모두 예수님을 섬기러 나가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더 가지고 더 배운 우리가 그렇지못한 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나누어주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고 섬기러 나가는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섬기던 교회에 중년의 남자가 술이 취해 찾아왔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는 무슨 괴로운 일이 있었던지 교회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예수님을 좀 만나게 해달라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술은 드시지 않았지만 여기 이 자리에 오신 분들 중에도 적지않은 분들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 줄 압니다. 그렇다면 제가 그 방법을 오늘 알려드리겠습니다. 가장 작고 소외받고 차별받는 이들을 섬기는 자리로 나와보십시오. 만약 거기서 주님을 만나지 못 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면 주님도 우리를 만나려고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한인들
우리 한인들은 이 미국사회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오늘 우리도 엄밀히 말하면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는 유색인종입니다. 그런 차별을 받으면 분노하는 우리가 동시에 또다른 유색인종인 아프리칸 어메리칸이나 히스패닉인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이중적인 모습입니까! 사실상 오늘 우리가 유색인종임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서 비지니스하며 누리는 혜택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 얻어낸 것이 아니라 아프리칸 어메리칸들이 오랜 세월 차별과 맞써 싸워 얻어낸 것을 무임승차한 것입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순교로 대표되는 미국 민권운동의 숱한 희생의 역사에서 아시안들 특별히 한인들은 기여한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고마움을 느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존중하는 법을 모르고, 그들을 멸시하는 일에 침묵하고 동조하고 심지어 그들을 포함하여 우리까지 멸시하는 이들에게 열광하며 지지를 보내는 분별없는 짓을 계속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런 불의를 회개하고 더 이상 이런 불의에 동참하거나 침묵하지 않기로 결단하고 거룩한 분노를 품고 사랑과 섬김으로 저항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작은 자를 섬김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윤리적 실천을 넘어 우리 믿음의 참 증거로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가르는 갈림길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마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작은 자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섬기시고 영생의 길을 가시는 여러분이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