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10 추락하는 인생의 날개 / 창 37:29~36

20170910 추락하는 인생의 날개 / 창 37:29~36

창 37:29-36/추락하는 인생의 날개

170903 주일설교 요셉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이문열 씨의 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를 대학시절에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임형빈이란 시골 젊은이는 명석한 두뇌와 노력으로 서울의 명문대 법대에 진학합니다. 법관으로서의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고시를 준비하던 그는 우연히 서윤주라는 아름다운 여대생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그녀는 형빈이 감당하기에 너무나 자유분방하였고 그녀를 얻기 위해 자신의 미래와 가정과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과 오스트리아까지 쫓아갔지만 결국은 질투와 분노를 이기지 못 하여 그녀를 총으로 살해하고 살인자가 되고야 맙니다.

전도유망한 젊은이가 나락으로 추락하는 소설을 보며 든 첫째 생각이 인생은 참 뜻대로 안 되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임형빈은 여러 번 자신의 삶이 살인자로 끝나지 않도록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무분별한 열정에 눈이 멀어 그 기회를 다 놓치고야 만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밀납으로 만든 날개로 크레타섬을 탈출하려던 이카루스가 태양 가까이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였다가 추락하여 죽고야 말았다는 그리스의 신화에서 따 온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제목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가 아니라 ‘날개가 있다’인 이유가, 그는 추락하는 자신의 인생을 건질 수 있는 날개를 가지고 있음에도 그 날개를 사용하지 못 했다는 것을 꼬집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문열 씨를 잘 알지만 물어보지 못 했는데요, 그 분이 저를 잘 몰라서…)

우리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감하지 못 하는 분은 별로 없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예상치 못 한 상실과 실패, 좌절과 치욕이 찾아오지요. 그렇다고 해도 우리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고 다시 날아오를 수 있는 기회와 지혜는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항상 우리 곁에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기회와 지혜를 무시한다는 것입니다. 이카루스가 태양 가까이 가지 말라는 아버지의 충고를 무시하여 추락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하면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공동체의 추락을 막는 날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개인의 추락을 막는 날개

먼저 개인의 추락을 막아주는 것은 겸손의 날개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의 형들이 그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버린 직후 벌어지는 상황을 소개합니다. 장자였던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고 그를 죽이려던 동생들을 설득하여 그를 광야의 마른 우물 구덩이에 던져놓게 하였지만,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동생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29-30절을 보십시오.

(창 37:29) 르우벤이 돌아와 구덩이에 이르러 본즉 거기 요셉이 없는지라. 옷을 찢고 (창 37:30) 아우들에게로 되돌아와서 이르되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

르우벤은 동생을 살리려 나름 이런저런 상황을 다 고려하고 계산하여서 우물에 넣어두는 것이 요셉의 안전을 지키고 그를 적당한 기회에 구해낼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우물 속에 갇혀있는 동생에게 더 이상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입니까? 문제는 그의 계획에 없던 미디안 상인들이 그 곳을 지나갔던 것입니다. 도단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집트로 가기 위해 상인들이 지나던 왕의 대로상에 있습니다. 그리로 상인들이 지나 다니긴 했지만 정말 띄엄띄엄 있는 일이고 그 상인들을 보고 동생들이 요셉을 팔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꿈에도 예상치 못 한 일은 늘 발생하는 법입니다.

아무도 미래를 예상하지도, 장담하지도 못 합니다. 이 사실은 교만한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진실입니다.

(잠 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이든 미래든 확실하다고 장담하는 사람치고 삶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 없습니다.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그들이 쏟아놓은 공약이 얼마나 많이 파기되고야 마는지! 물론 당선을 위해 지킬 마음도 없이 쏟아놓는 경우가 많아 그렇겠지만, 나름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는 정직한 정치인조차도 막상 당선되고 보면 상황이 예전 같지 않고 여건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고 사람들이 다 나같지 않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멀리 볼 것도 없이 곁에 앉은 남편을 보십시오. 결혼 전에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 것 같이 온갖 감언이설로 유혹하더니 막상 하고 보니 자기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인간이 아닙니까! 약 4장을 보십시오.

(약 4: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보리라 하는 자들아 (약 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하나님을 알고 인생을 아는 사람들은 그러므로 미래를 자신하지 않습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뿐이며, 섣불리 예단하거나 장담하거나 사람을 판단하거나 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신중함과 겸손함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수 있기를 축복드립니다.

 

가정의 추락을 막는 날개

다음으로 가정의 추락을 막아주는 것은 절제의 날개입니다.

르우벤은 장자입니다. 그에게는 동생들의 잘못된 시도를 막을 책임과 권위가 모두 있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장자는 오늘날의 장남과 그 권위가 차원이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없는 자리에서 장남은 아버지 대신이었습니다. 요즘에도 그런 문화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아버지가 없는 상황이 되면 장남에게 어머니와 동생들을 맡기는 장면을 영화나 소설에서 어렵잖게 봅니다.

만약 그가 동생들이 요셉을 해치려고 할 때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슨 짓이야?’하고 꾸짖기만 하였어도 감히 동생들 중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 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왜 동생들을 막아서지 못 하고 기껏 시도한다는 것이 요셉을 우물에 가두어두자는 아이디어 정도였을까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한가지는 그가 장자로서의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무엇때문일까요? 우리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이 있지 않습니까?

(창 36: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비록 친어머니는 아니지만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요셉을 살리려던 노력을 보면 그는 심성도 착했고, 아버지 야곱의 평가에 의하면 재능도 있었습니다. 창 49:3입니다.

(창 49:3)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그러나 이 일로 그는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을 잃어버립니다. 4절입니다.

(창 49:4)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 하는 장자를 동생들은 인정하였을까요? 게다가 그 동생들 중에는 그의 부정의 상대인 빌하의 아들들인 단과 납달리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그 두 동생이 르우벤을 형 취급이나 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탁월한 재능의 정치, 사회 그리고 종교의 지도자들까지도 부끄러운 성추문, 재정비리로 추락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리더들은 갖추어야할 첫째 덕목은 그러므로 재능이 아니라 절제입니다. 자동차는 엑셀레이터보다 브레이크가 더 중요합니다. 엑셀이 좀 시원찮아도 브레이크가 좋으면 안전운행이 됩니다. 그러나 브레이크가 시원찮은 차는 엑셀이 좋으면 좋을수록 더 큰 위험을 안고 달리는 시한폭탄입니다. 재능보다 절제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지나침은 부족함만 못 합니다. 절제하고 후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절제하지 않고 후회하는 않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 절제가 가장 필요한 지도자가 누구일까요? 바로 가정이라는 소우주의 태양인 가장입니다. 이 우주 안에 있는 가족이라는 행성들은 아버지라는 태양으로부터 빛을 받아 사랑과 행복과 꿈과 미래라는 생명을 탄생시킵니다. 그 태양의 빛을 꺼뜨리는 것이 바로 무절제함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정이라는 소우주를 살리기 위해 아버지라는 태양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아버지의 빛을 꺼뜨려 그 우주 안에 있는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기만을 강렬히 바랍니다.

아버지는 그릇된 정욕의 블랙홀을 피해야 합니다. 분노와 폭언과 폭력의 블랙홀을 피해야 합니다. 도박과 쾌락과 사치와 게으름의 블랙홀을 피해야 합니다. 아버지가 블랙홀에 빠지면 권위를 잃어버립니다. 책임을 다하지 못 합니다. 가족들은 고통을 겪습니다. 가정의 추락은 사회의 추락, 국가의 추락 그리고 문명의 추락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아버지들은 우는 사자와 같이 숨어서 기회를 노리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도록 깨어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아버지가 날아오르면 가정이 천국이 됩니다. 절제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는 아버지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공동체의 추락을 막는 날개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추락을 막아주는 날개는 용기의 날개입니다.

르우벤이 동생들을 막아서지 못 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비겁함 때문입니다. 요셉을 죽이자고 나선 동생들 중 주동자는 아마도 시므온과 레위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과거 동생 디나의 복수를 위해 한 부족을 계략으로 몰살시킬 만큼 잔혹했습니다. 야만의 시대였음을 고려해도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꾸짖는 아버지에게도 지지않고 대들고 싸울 정도로 과격했습니다. 그런 사람과 맞서는 것은 누구에게나 긴장되는 일입니다. 부담스럽습니다. 더구나 다른 동생들이 모두 동조하고 있으니 더더욱 부담스럽습니다. 모두가 Yes 할 때 혼자 No 라고 하는 일은 얼마나 힘든지요! 우리 대부분은 갈등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르우벤과 같이 장자의 책임과 권위를 가진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마땅히 동생들에게 ‘안 돼. 동생을 죽이다니 옳지 않은 일이야’라고 그가 가진 권위를 사용하여 책임을 다했어야 합니다. 동생들에게 당장 비난을 듣더라도 옳은 일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겁하게도 침묵하고야 말았습니다.

악의 부흥은 항상 의인들이 침묵한 결과입니다. 의는 강합니다. 의는 그 존재 자체로 강합니다. 불의는 의의 공백입니다. 그러므로 강해보이지만 의보다 결코 강하지 못 합니다. 그러므로 의인들이 침묵하지만 않는다면 불의는 활개치지 못 합니다.

얼마 전에 세월호 사건에서 딸을 잃은 어머니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23명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씨랜드 화재 참사를 비롯해 불법과 부정이 낳은 각종 사건, 사고들을 접할 때마다 분노하기는 했지만 그 때마다 살기에 바빠서,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 할테니까, 괜히 나섰다가 불이익이라도 받을까봐서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불법과 부정이 자신의 딸을 빼앗아갔다고, 자신의 침묵이 딸을 죽였다고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노라고 하였습니다.

최근 차범근 전 국가대표가 ‘나도 많이 비겁했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그는 평창동 집에서 시내로 나갈 때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집회를 하는 광화문 앞을 지나다녔습니다. 그들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하며 늘 부끄러웠다는 것입니다. 총선이 시작되면서 세월호 변호사인 박주민 변호사가 출마한 것을 보고 그를 후원하고 싶은데 자신의 이름으로 했다가는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서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그 친구조차도 직장이 너무 번듯한 자리라 자기 이름으로 못 하고 전업주부인 그의 아내 이름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차범근 씨는 ‘침묵은 금이 아니고 나약함 뿐임을 배웠다’고 쓰고 있습니다.

불의 앞에서의 침묵은 불의에 동조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힘이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의이고 공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것이 의이고 불의를 향해 의가 아니라고 외치는 것이 의입니다. 르우벤이 안 된다고 외쳤다면 요셉을 잃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가 침묵하지 않았다면 세월호가 그녀의 딸을 빼앗아가지 못 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용기의 날개로 날아오르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