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924 은혜의 이유 / 벧전 2:22~25

20170924 은혜의 이유 / 벧전 2:22~25

벧전 2:22-25/은혜의 이유

  

삼진아웃과 범죄율

출판한 책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를 만들며 세계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극찬을 받는 작가 말콜 글래드웰은 최신작 ‘다윗과 골리앗’을 쓰며 자신이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노라고 밝혔습니다. 독실한 메노나이트 교파의 가정에서 자랐던 그는 한 때 신앙을 멀리했다가 이 책을 쓰며 신앙을 재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펜실베니아의 아미시파도 메노나이트의 한 분파입니다. 오늘은 이 책의 한 장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1994년 가석방된 범죄자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된 킴버 레이놀스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캘리포니아주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범죄자의 형벌이 지나치게 가벼워 범죄예방에 거의 효과가 없다는 여론이 일어납니다. 최근 한국에서 여중생들의 폭력사건으로 소년법을 폐지하고 성인과 같이 엄격한 처벌을 받게 하자는 여론이 형성되는 것과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은 공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캘리포니아주는 이 여론을 등에 업고 소위 삼진아웃제로 불리는 강력한 법률을 74%의 지지로 통과시킵니다. 범죄자가 두 번째 범죄를 저지르면 기존 법률이 정한 형량의 두 배를 받고, 세 번째 범죄는 최소 25년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삼진아웃제는 초기에는 범죄감소효과가 크다고 홍보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역사상 가장 커다란 형사실험으로 불린 캘리포니아의 이 시도는 최근 다양한 연구결과 거의 실패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캘리포니아주는 20년 동안 수십억 달러를 쓴 후 2012년 삼진아웃제의 형량을 크게 낮추어 예전과 유사한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의 상식과 달리 엄격한 형벌이 범죄예방과 감소에 별 효과가 없는 것은 왜일까요?

 

왜 가혹한 처벌은 효과가 없는가

첫째, 처벌의 크기와 상관없이 아무런 부담을 못 느끼는 범죄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벌의 강도와 범죄감소율의 상관관계를 조사한 그래프는 뒤집힌 U자 형태를 보입니다. 처벌이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확실히 범죄를 줄여줍니다. 그러나 처벌의 강도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더 이상 범죄는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강력범죄는 오히려 늘어나기까지 합니다. 많은 잠재적 범죄자들이 처벌의 존재나 강화로 인해 범죄를 멈추게 되지만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가족, 친구, 재산, 지위 등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상태이거나 범죄 말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거나 약물, 알콜 등의 중독으로 판단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등의 이유로 처벌이 강화되어도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긴 수감생활은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 삼진아웃제로 긴 수감생활을 하게 되는 이들의 평균 나이는 43세였습니다. 나이와 범죄발생의 관계를 다룬 통계를 보면 가장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 연령은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입니다. 30대가 되면서 범죄율은 큰 폭으로 줄어들고 40대가 넘어서면서 급격히 줄어듭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20대 후반을 접어들면서 많은 범죄자들이 가정을 가지게 되고 철없던 시절의 잘못과 처벌로부터 교훈을 얻습니다. 40대가 되면 자녀들이 양육해야 하는 이들은 위험부담이 큰 범죄보다 사회에서 용인되는 일반 직업을 통해 수입을 얻고자 합니다. 즉 40대는 통계적으로 가장 재범가능성이 낮은 그룹인데 이들을 가장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범죄예방에 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예상치 못 한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아버지가 수감되어 수입이 끊어지고 주변의 비난에 직면한 가정의 청소년이 비행을 저지를 확률은 300~400%가 늘어나고 심각한 정신장애를 일으킬 확률은 250%가 늘어납니다. 긴 수감기간 동안 범죄자의 가정은 부서지고 그 가정에서 새로운 젊은 범죄자들이 나타납니다. 수감자의 범죄와 관련 없는 친구들과의 관계는 끊어지고 그 자리를 감옥 안의 다른 범죄자들이 채웁니다. 출소 후 일반직장을 가질 가능성은 더욱 줄어들고 결국 범죄 외에 선택지가 남지 않게 됩니다. 강력한 처벌이 오히려 강력범죄를 더욱 일으키는 역설입니다.

셋째, 강력한 처벌은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키며 새로운 범죄를 양산합니다. 이 기간 동안 캘리포니아주가 수감자 한 사람에게 쓴 비용은 1년에 5만 불입니다. 미국에 연수입이 5만 불이 안 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5만 불로 한 가정이 일 년 동안 삽니다. 그런데 범죄자 한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두고 먹이고 입히고 감시하고 교화하는 데 쓰는 돈이 5만 불입니다. 그조차도 지금은 아마 훨씬 늘어났을 것입니다. 모두가 시민들의 세금입니다. 캘리포니아가 1980년대에 예산의 10%를 고등교육에 쓰고 3%만을 감옥에 썼습니다. 삼진아웃제를 실시하고 20년 후 예산의 10%를 감옥에 쓰고 고등교육에는 8%만을 썼습니다. 다음 세대를 교육할 돈을 범죄자들을 더 강하게 처벌하는데 쓴 것입니다.

삼진아웃제 초기에 캘리포니아주는 범죄율이 크게 줄었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결과 범죄율 감소추세는 삼진아웃제가 시행 전에 이미 시작되었고 이 기간 동안 캘리포니아주 뿐 아니라 미국의 거의 모든 주에서 범죄율이 큰 폭으로 줄었습니다. 즉 범죄율 감소는 삼진아웃제와 아무 상관이 없고 이 기간의 미국 경제성장과 일자리확대에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정상적 일자리가 늘어나는 만큼 비정상적 범죄에 대한 유혹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주정부는 그 경제성장과 일자리확대에 기여할 고등교육예산을 역효과를 내는 삼진아웃제에 쓰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소 긴 이 사례를 통해 우리가 배우는 바가 무엇입니까? 공의가 없이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지만, 공의만으로도 사회를 유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의 외에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는 공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합니다. 공의가 세상을 지탱한다면 은혜는 세상을 구원합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은혜의 복음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개인이든, 공동체든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공동체를 구원하는 은혜 

은혜는 공동체를 구원합니다. 가정도, 사회도 그리고 문명도 은혜가 없이는 유지되지 못 합니다. 앞선 예에서 살펴보았듯이 은혜는 공의와 더불어 공동체를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릴 적 어머니는 가끔 당신의 젊은 시절 일기장을 꺼내놓고 옛날 이야기를 하다가 울곤 하셨습니다. 말이 20세기이지 봉건시대나 다름없는 시댁에서 7남매의 장남인 남편의 시누이들로부터 겪은 혹독한 시집살이 때문에 말로 다 못 할 고생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친정 아버지가 잠시 들르셨다가 시댁식구들이 딸에게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 분개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딸의 손목을 잡아 끌고 나오셨습니다. 이런 집에 널 둘 수 없다, 이대로 친정으로 가자는 아버지의 호통에 어머니는 울면서 아버지에게 빌었다는 겁니다. 아빠, 나도 가고 싶은데 그러면 저 어린 새끼는 누가 키워요? 내 새끼를 어떻게 엄마 없는 자식으로 키워요? 어머니는 그 이야기를 하실 때마다 저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는 ‘네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이 집 떠났다’라며 우셨습니다. 어머니의 결정을 요즘 사람들은 뭐라할지 모르지만 저는 한 가지 확실히 믿는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그 사랑과 희생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의 김도완 목사도, 중학교 교사가 된 제 여동생 김은숙 선생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갔더니 그렇게 원수처럼 못살게 굴던 시누이들과 어머니가 얼마나 친하게 지내시는지,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미운정 고운정 다들어 원수도 친구처럼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 가정은 어머니의 은혜가 구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예수님의 은혜가 구원하셨습니다. 그 힘든 시기를 주님은 어머니의 멈추지않는 눈물을 닦아주시고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남편과 시누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개인을 구원하는 은혜 

은혜는 개인도 구원합니다. 공의는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발합니다. 범죄자 이야기를 하고 부패한 정치인, 기업인들을 욕하다 보면 우리 스스로는 의로운 사람인 듯한 착각이 듭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남을 욕하기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의 독초는 우리 모두의 크고 작은 죄의 양분을 먹고 자라납니다. 불쾌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우리의 죄는 심각합니다. 우리 모두의 죄가 세상을 병들게 합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짓나? 이런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조지아공대 연구팀은 현재 전 세계에서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연간 800만톤으로 추산합니다. 참고로 전 세계의 연간 참치어획량이 500만톤입니다. 찰스 무어의 책 플라스틱 바다는 현재 바다에 버려진 플라스틱 쓰레기 양은 바다속 동물성 플랑크톤의 여섯 배에 달한다고 계산하고 있습니다. 태평양의 무인도들은 어마어마한 플라스틱 쓰레기 하치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우리가 매일 버리는 플라스틱 물병을 생각해 봅시다. 이 병은 자외선과 파도와 바다속 유독물질에 의해 분해되어 유독성 미세플라스틱이 됩니다. 또한 우리가 입고 있는 합성섬유의복은 세탁할 때마다 무수히 많은 플라스틱 부스러기를 배출하고 이는 하수구를 통해 역시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이 외에 숱한 방법으로 버려지는 미세플라스틱 쓰레기들은 물고기의 체내에 축적되고 먹이사슬의 최상부에 있는 인간의 체내에도 지금도 계속 축척되고 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몸 안에 축척되고 있는 이 플라스틱이 향후 인류에게 어떤 유전적 문제를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자, 이 심각하고 공포스러운 해양 오염과 생태계 파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우리 중 누구라도 있습니까? 플라스틱을 안 쓰시는 분 있나요? 일회용품 안 쓰시는 분 있나요? 합성섬유 옷 안 입고 계시는 분 있나요? 이것은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수많은 방식 중 하나일 뿐입니다.

환경을 파괴하는 방식처럼 이 세상을 탐욕과 정욕과 허영, 착취와 억압과 파괴, 전쟁과 테러와 증오의 쓰레기로 파괴하는데 우리 모두는 공범입니다. 환경오염의 대가를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지불해야 하듯이 세상을 죄로 오염시키는 대가를 우리 모두가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아도취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죄와 악의 부스러기들로 세상이라는 바다를 우리는 끊임없이 오염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대가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심판이며 완전한 멸망이며 지옥입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만약 은혜가 없다면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입니다. 만약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은혜는 우리의 죄를 씻고 우리가 죄를 이기게 만들고 우리가 악을 물리치게 만들고 우리가 의의 사람으로 변화되도록 만듭니다. 은혜가 없이는 구원받을 인생이 세상에 없습니다.

 

은혜의 기원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이 은혜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빛이 태양에서 오듯이 세상에 구원을 주는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빛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이 엄청난 양의 수소를 핵융합반응으로 태워 빛을 만들어 태양계 구석구석에 뿜어내기 때문입니다. 은혜도 거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보배로우신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매다시고 사랑의 불로 태우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그 희생의 능력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는 은혜의 빛이 뿜어져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혜의 빛에 빚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벧전 2:22)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지 않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는 분이십니다. (벧전 2:23) 그분은 모욕을 당할 때도 욕하지 않고 고난을 당할 때도 위협하지않았으며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죄가 있는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공의의 실현일 뿐 아무런 공로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는 사람이 벌을 받는 것은 공의가 아닌 불의이며, 이를 바로 잡아야할 빚이 생깁니다. 그래서 무죄한 사람이 억울한 형벌을 받으면 국가가 배상을 하라고 법원이 판결하는 것입니다. 만약 죄가 전혀 없으신거룩한 분이 죄인의 모든 죄를 대신 지고 스스로 모든 형벌을 받게 되면 거기에는 엄청난 공로가 발생합니다. 이 공로는 마치 엄청난 부자의 자금과 같아서 배고프지만 돈없는 사람을 먹여살릴 수 있듯이 죄는 가득하나 아무런 공로가 없는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원리입니다.

(벧전 2:24) 그리스도께서 몸소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를 위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입으심으로 여러분이 낫게 된 것입니다. (벧전 2:25) 여러분이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방황하였으나 지금은 여러분의 영혼의 목자와 감독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뿜어내는 은혜의 빛을 받아서 우리는 용서받고 치유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는 목적 없이 죄를 먹고마시며 방황하였지만 이제는 용서받고 목적을 얻고 영생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양이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은혜 덕분에 말입니다.

이 은혜를 여러분은 누리고 살고 계시는지요? 태양빛을 거부하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 갇혀 살아가는 은둔자처럼 은혜의 빛을 거부한 채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분은 안 계시는지요?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도 저와 여러분 위에 내리쬐고 있습니다. 이 은혜의 빛 가운데로 나오시기를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