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126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 / 창40:16~23

20171126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 / 창40:16~23

창 40:16-23/하나님이 나를 잊었다

171126 주일설교

 침묵

작년에 명감독 마틴 스콜세이지가 만든 영화 사일런스, 침묵이란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원작은 엔도 슈사꾸가 쓴 동명의 소설 침묵입니다. 17세기 일본 나가사키 지방에 선교사로 온 포르투칼의 예수회 페레이라 신부는 봉건영주들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박해를 당하는 신도들을 마주합니다. 영주들은 페레이라 신부를 배교시키기 위해 그 앞에서 신도들을 천천히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고문하면서 죽입니다. 기도도 하고 호소도 하고 부르짖어보지만 속절없이 죽어나가는 신도들을 보면서 그는 신앙의 위기를 직면합니다. 당신의 자녀들이 이렇게 고통당하며 죽어가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당신은 왜 침묵하시는가? 그는 신앙을 지키고 그들과 함께 죽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고 그 신도들을 살릴 것인가의 선택을 강요당합니다.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는 생각은 끝나지 않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혀 온 생각입니다. 끝나지 않는 병마와 해결되지 않는 가정의 문제, 풀리지 않는 직장의 문제 등을 안고 끙끙대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침묵을 마주합니다.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듣지 않으시는데 나는 믿음을 지켜야 할 것인가,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데 나는 여전히 그를 의지해야 할 것인가? 만약 이런 갈등을 겪어보지 않으셨다면, 장담하건대 여러분은 인생의 고난이 무엇인지 충분히 겪어보지 않으신 것입니다. 요셉 역시 이런 갈등을 겪었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었다

요셉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는 떡맡은 관리와 술맡은 관리의 꿈을 해석해 주고 그 해석대로 되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의 해석대로 3일 후 떡맡은 관리는 복직되고 술맡은 관리는 사형을 당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22-23절을 보십시오.

(창 40:22)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창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그가 복직되는 것을 보고 요셉이 얼마나 흥분했을까요?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이제나 저제나 좋은 소식이 올까 기다렸지만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희망의 불꽃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낙심의 구름이 덮이고 절망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요셉이 노예와 죄수로 보낸 시간이 13년입니다. 제 생각에 그 중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시간이 이 때였을 것입니다.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크지 않지만 기대가 크면 그만큼 낙심도 큰 법입니다.

형들에게 배신당해 노예로 팔려왔을 때도 죽고싶도록 절망스러웠지만 이겨내고 묵묵히 일하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또 다시 묵묵히 이겨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만났습니다. 떡 맡은 관원장이란 고위직 관리를 도와 주고 자신의 처지를 호소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그 기회를 붙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 주가 지나고 두 주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관리가 자신을 잊어버린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은 낙심이 되고 낙심은 분노를 낳았습니다.

이 때 믿음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요! 그 관리만 자신을 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잊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 당신은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정말 나를 잊으신 건가요? 차갑고 어두운 감옥바닥이 이렇게 울부짖는 요셉의 눈물로 얼마나 흥건히 젖어들었을지요! 이 호소는 믿음의 길을 가는 모든 신앙인들이 토해내었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시 42편의 기자는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시 42: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말미암아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시 42: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반석이라고 믿지만 현실은 그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기도의 응답도 받지 못 하고 있습니다. 원수는 그를 압제하고 대적의 비방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그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왜 자신을 잊어버렸느냐고 슬프게 부르짖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고백을 쏟아놓고 그것이 불경스럽게 느껴져 마음이 무겁다면 혹은 불신앙처럼 보여서 감히 입 밖으로 꺼내 하나님께 쏟아놓지 못 하겠다면 이 고백도 들어보십시오.

(막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도 십자가의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께 왜 당신을 버려 이 십자가에 매달리게 하셨는지 항의하고 있습니다.

 

잊은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것이다

요셉의 기도는 응답됩니까? 어떻게 응답됩니까? 41장을 보십시오.

(창 41:1)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창 41:9)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말하여 이르되… (창 41:12) ‘그 곳에 친위대장의 종 된 히브리 청년이 우리와 함께 있기로…’ (창 41:14)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 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

이 년이 흐른 후 마침내 그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해 냅니다. 그리고 요셉은 바로의 왕궁에 불려들어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고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는 극적인 반전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셉이 2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더 보내야만 했던 이유를 발견합니다. 만약 요셉의 바램대로 술 맡은 관리가 복직이 된 직후에 요셉을 잊지 않고 바로에게 그의 선처를 부탁했다면 과연 요셉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과연 바로가 시위대장인 보디발이나 그 아내의 말보다 일개 요셉의 말을 더 신뢰하였을까요? 그를 풀어준다는 것은 곧 보디발의 아내가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까? 요행히 바로가 요셉의 말을 믿어주었다고 한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 노예로 돌아가는 것 밖에 얻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가 보디발의 집에 돌아가 노예가 되었다면 그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나 가능했을까요? 그러나 2년이 더 걸린 이유로 바로가 꾼 꿈을 해석하게 되고 이집트의 총리대신이 되고 이집트의 7년의 대흉년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건지게 되고 아버지 야곱과 온 집안을 이집트로 이주시켜서 그들도 흉년으로부터 구원하게 됩니다.

요셉의 바램대로 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요셉에게 놀라운 성공을 가져다 줍니다. 요셉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음으로써 응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잊은 것이 아니라 요셉을 위한 최선의 때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자녀들을 잊어버리실 수 없는 분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 49:13) 하늘이여 노래하라, 땅이여 기뻐하라, 산들이여 즐거이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은즉 그의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사 49:14)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인간의 불완전한 사랑 중에 가장 큰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하겠습니다. 절대로 자기 자녀를 잊을 리 없는 어머니가 자녀를 잊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결단코 당신의 자녀들을 잊어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이름은 주님의 손바닥에 새겨져 있고 우리 삶의 문제는 항상 주님 앞에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결단코 잊지 않으시고 항상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고 여러분을 위한 최선의 때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동참하시는 하나님

소설 침묵에서 페레이라 신부를 찾으러 온 젊은 로드리게스 신부 역시 똑같은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짓밟고 지나가면 고문당하는 신도들을 살려주겠노라고 유혹하는 영주 앞에서 그는 갈등합니다. 십자가를 밟고 신도들을 살릴 것인가, 이를 거부하고 신도들을 죽음에 내몰 것인가. 그 때 그의 마음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징표를 짓밟아라. 나는 사람들에게 짓밟히기 위하여 이 세상에 왔다. 내가 십자가를 진 것은 인간들의 고난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나를 잊지 않고 계신다는 것은 큰 위로이지만 분명 주님의 때를 기다리는 여전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그 고난에 동참하심으로써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 곁에서 그 고난을 함께 당하십니다.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가장 낮은 곳, 가장 치욕스러운 자리,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들의 고난에 동참하셨고 지금도 이 땅의 모든 고난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암으로 신음하는 성도들의 곁에, 테러로 희생당하는 이들 곁에, 가난과 압제로 비틀대는 이들 가운데, 재난과 전쟁으로 울고 있는 이들 곁에 주님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회복하실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바라봄으로써 끝나지 않는 고난 가운데서도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릴 힘을 얻게 됩니다.

요셉은 이 믿음으로 기도함으로써 차갑고 어두운 감옥의 절망을 이겨내었습니다. 어두운 밤마다 감옥 한 견에서 나즈막이 울리는 요셉의 기도를 듣는 죄수들과 간수들은 그의 응답되지 않는 기도를 측은히 여기거나 조롱하였을 것입니다. ‘이 바보야, 그런 헛된 기도 따위는 집어치고 나처럼 마음이라도 편하게 지내. 어차피 감옥에서 사는 것, 그냥 되는 대로 살아.’그러나 그가 어느 날 왕궁에서 달려온 관리들에 의해 불려나가고 마침내 그가 자신들의 운명을 한 손에 쥔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두 까무러치게 놀라 뒤로 자빠졌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 천사들에 의해 불려나갈지, 뒤로 나자빠질지는 여러분이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