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몸으로 살까
171224 대강절 3주
좁아서 어떻게 사냐
1972년 미국 애리조나주 스코츠데일에 세워진 앨코생명연장재단은 법적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시신을 액체질소를 사용해 급속냉동하여 보존하는 곳입니다. 의사가 회원들의 사망선고를 내리면 이 재단은 그 시신을 16가지 약물을 처리하여 급속냉동을 합니다. 이들은 먼 훗날 과학기술이 더 발전하면 자신들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이 생길 것이라고 믿고 한 구당 최소 20만 불 이상의 거액을 냅니다. 2016년을 기준으로 가입한 회원은 1천 여명이고 실제 사망하여 냉동되어 있는 시신의 수는 147구였습니다. 당연히 20만 불이 큰 부담이 되지않는 부자들이 회원의 대부분입니다.
이 재단과 미래의 기술발전을 믿는 사람들은 미이라를 만들던 이집트의 왕들의 현대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불로초를 구하러 군인들을 보냈던 진시황제의 현대판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무튼 부활과 영생을 믿고 기대하는 이들은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은 지난 2주간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우들이 던진 질문 중 부활에 관한 질문만 뽑아 몇 가지를 답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새하늘과새땅이 이 땅에 임하여서 죽었던 성도들까지 모두 부활하여 이 땅에 살게 된다면,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로만도 비좁은 이 땅이 더 좁아 터져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느냐는 질문입니다. 그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로 가능합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땅에서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요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심판의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분리됩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심판이라는 주제에서 자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둘째, 설사 지금까지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가 다 부활해서 함께 산다고 가정해도 그 수는 얼마 안 됩니다. 학자들은 인류의 전 역사를 통틀어 합해도 현재 인류인 70억의 두 배 정도인 140억 정도 밖에 안 된다고 계산합니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시기에 지구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최근에서야 폭발적인 인구성장으로 지구가 과밀해진 것입니다.
셋째, 사실은 현재도 지구의 대부분은 비어 있습니다. 우리가 좁다고 느끼는 이유는 도시에 밀집해 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천지가 빈집, 빈땅이고 조금만 도시에서 운전해 나가면 동부는 숲, 서부는 끝도없는 벌판입니다.
넷째, 땅이 회복되면 엄청나게 살 곳이 넓어집니다. 지금 육지의 많은 땅이 적도 부근의 사막과 극지방의 얼어붙은 땅으로 사람이 살기가 어렵습니다. 사하라 사막을 비롯해 육지의 20%가 사막입니다. 국가영토순위로 1, 2위인 러시아와 캐나다 북부의 대부분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얼음의 땅입니다. 지구가 23.5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데요, 만약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가 해결되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엄청나게 넓어집니다. 혹은 해수면이 1m만 낮아져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해안평야가 엄청나게 넓어질 것입니다. 계시록 21:1에서 새하늘과새땅을 묘사하며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지구상의 모든 땅이 육지가 되겠지요.
아무튼 이런 설명의 목적은 땅이 좁아서 이 땅에 새하늘과새땅이 임하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화장을 해도 되느냐
두 번째 질문은 부활을 믿는 우리는 화장을 해도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화장하면 몸이 다 타버려서 부활할 몸이고 뭐고 없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데요. 먼저는 화장하지 않고 땅에 묻는 매장을 해도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다 흙으로 돌아가 형체를 찾기 어렵습니다. 화장을 하면 금방 재가 되는 것이고, 매장을 하면 천천히 재가 되는 것 뿐입니다.
둘째는 매장을 하든 화장을 하든 우리 몸을 구성하고 있는 재료 즉 원소들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질량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닫힌 계 즉 이 우주를 말하는데요, 닫힌 계의 총질량은 원소들의 상태변화와 상관없이 변하지 않고 계속 같은 값을 유지합니다. 왜냐하면 물질은 갑자기 생기거나 소멸되지 않고 그 형태만 변하여 계속 존재합니다. 사람을 태우면 재만 남는 것 같지만 몸의 대부분을 유지하던 수분은 증발하고 몸을 구성하던 일부 원소들은 분자구조가 바뀌어 연기의 형태로 대기중으로 흩어지지만 소멸되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는 우리 몸은 사실상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구성요소가 바뀌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평균 7년에 한 번씩 마치 개가 털갈이를 하듯이 그 몸의 모든 세포들을 바꿉니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새 세포를 복제하고 그 자신은 수명을 다해 죽는데 7년이면 전체 세포가 모두 죽고 새 세포로 몸이 구성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입니다. 흙으로 인간의 몸을 창조하신 이에게 우리 몸이 어떤 형태로 어디에 흩어져있든 무슨 대수일까요. 걱정하지 마시고 화장도 많이 하십시오. 저도 쓸만한 장기는 기증하고 몸은 화장을 할 생각입니다. 장기기증도 아무 문제 없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시는 일입니다.
결혼은 못 하냐
세 번째 질문은 부활의 새몸을 입고 사는 삶에 관해서입니다. 부활하면 결혼도 못 하고 사니 성적인 기쁨은 못 누리고 살지 않겠느냐,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냐는 질문입니다. 부활의 몸이 성의 구분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삶이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부활의 몸은 성적인 역할이 더 이상 없는 몸입니다. 그렇다면 성의 기쁨은 더 이상 못 누리겠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큰 문제일까요?
저희 아이들은 주말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주일이면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가 아니라 주말에는 2시간씩 게임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재미있다는 겁니다. 저도 학생시절 테트리스가 처음 나왔던 때에 오락실에서 앞사람이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와 비교할 수 없이 게임의 수준이 높아졌읍니다만 이상하게도 저는 지금 게임에 재미를 못 느낍니다. 몇 번 평화와 놀아주려고 2인용 게임을 한 적이 있는데 이걸 몇 시간씩 재미있다고 하는 아이들이 신기한 겁니다. 그 때에는 그렇게 재미있다고 느낀 오락게임이 왜 지금은 재미가 없어졌을까요? 제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다른 것이 재미있습니다. 사람이 바뀌면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도 변합니다. 더 큰 기쁨을 알게 되면 작은 기쁨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의 새 몸을 입게 되면 성적인 기쁨은 사소한 것이 되고말 정도로 훨씬 큰 기쁨 속에서 살게 될 것이며, 성적인 기쁨을 느낄 필요가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새 몸의 상태를 예수님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천사의 몸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물론 잘 모르지만, 마치 아이 때의 즐거움과 다른 즐거움을 성인이 되어 누리는 것처럼 새 몸을 입었을 때는 지금의 것과 다르지만 훨씬 더 큰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즐거움을 기대하십시오. 무엇을 상상하든 더 큰 즐거움을 맛보게 될 것을 믿습니다.
새몸의 단절성
마지막 질문은 부활의 새몸이 현재의 몸과 같으냐, 다르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주는 힌트를 보면 그 몸은 현재의 몸과 연속성과 단절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단절성을 보자면, 우리의 육체가 가진 한계를 초월한다 혹은 벗어버린다는 점에서 지금의 육체와 부활의 새몸 사이에는 분명한 단절이 있습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고전 15:53) 이 썩을 것(현재의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부활의 몸)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계 21:4) (새하늘과 새땅에서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적인 구분, 썩음과 죽음, 사망, 슬픈 눈물, 통곡, 아픈 것 등의 특징이 사라진 육체입니다. 이 단절로 인해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의 모습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연구하고자 할 때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실예입니다. 예수님 말고는 부활한 이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늘 함께 다니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요 20:14)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부활하신)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요 21: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 (요 2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눅 24:15) (엠마오로 가던)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누구보다 가까이 예수님을 따르고 섬겼던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 다른 사람, 동산지기인 줄 압니다.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보고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고 나서도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었다는 표현을 덧붙이는 것은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이 볼 때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데 그 이유를 그들의 눈이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물론 물리적으로 안 보였다는 뜻이 아니지요. 보고 있는데 알아보지 못 했다는 말입니다. 왜요? 뭔가 변했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는 썩는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질적인 변화를 했기 때문이라고 우리는 성경에 근거하여 결론내릴 수 있습니다. 분명히 부활은 새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것은 병들지도 다치지도 부러지지도 죽지도 썩지도 않는 강인한 몸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병은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장애도 사라질 것입니다. 불균형은 균형잡힐 것입니다. 나쁜 시력과 축녹증과 썩은 이빨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목디스크와 심장병과 척추즉만증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관절염과 한 쪽 다리가 짧은 불균형과 무좀도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암은 사라질 것입니다. 영광의 몸입니다. 아름다운 몸입니다. 조화로운 몸입니다. 균형잡힌 몸입니다.
그 때 우리 모두는 그 몸을 보고 하나님이 처음 창조하셨을 때처럼 ‘보기에 심히 좋구나’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몸을 다 입으시길 축복합니다. 옆의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네 몸은 몰라보게 튼튼하고 아름답게 바뀔거야!’
새몸의 연속성
단절성과 더불어 부활의 새 몸에는 연속성도 있습니다. 지금 이 몸의 특징 혹은 개성 그리고 경험이 연속된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다 똑같아진다는 것은 분명 다양성과 창조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리라 믿습니다. 그 근거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은 분명 달랐지만 제자들이 그 분임을 알아볼 만큼의 연속성이 분명 있었습니다. 이 연속성 때문에 제자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하다가 그 분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요 20: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선생님)’ 하니
(요 21: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눅 24:31) (엠마오로 가던 )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겉모습이 분명 바뀌어 가장 가깝던 제자들조차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했는데 어느 순간 그들이 예수님을 알 수 있도록 예수님의 어떤 모습이 남아있었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투, 표정, 음성의 고저 혹은 그 어떤 느낌일지도 모릅니다. 또한 몸의 특징도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이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저는 이 자국들이 깨끗이 치유되지 않고 남아있는 것이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만, 어쨌든 예수님의 몸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연속성은 일상적 삶에도 적용됩니다.
(눅 24: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 (눅 24: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눅 24: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부활의 몸은 살과 뼈가 있고 음식도 먹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이 연속됩니다. 이 연속성은 우리의 현재 삶이 어떤 형태로든 부활의 몸에 영향을 미칠 것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현재 우리가 연습하는 피아노, 미술, 운동, 건축, 조직력과 리더십, 성실하고 훈련하는 자세,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평생을 바쳐 피아노 연주를 연습한 사람은 부활의 새 몸을 입을 때 그 숙련된 것을 잃지 않은 채 더욱 발전시킬 기회를 얻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읽는 책, 습득한 지식, 숙련된 기술들 모두 잃어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더욱 귀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공부를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돈이 안 된다고 연습하고 숙련시키고 탐구하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사랑하는 일들을 포기할 필요가 없는 이유입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같다고 불의에 대항하기를 멈추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변화되지 않는다고 사랑하기를 멈출 수 없는 이유입니다. 힘들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부활의 새 몸은 실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증명된 생생한 소망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오늘의 삶이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더욱 충만한 것이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