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3:21-26/어떻게 구원을 받는가4 : 십자가
180318 주일설교
무엇이 다르나
요즘 커피브레이크 모임에서 야고보서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2주 전 리더모임에서 믿음은 행위에 의해서 증명되어야 한다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공부하던 중 한 리더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참 믿음이 행위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라면 결국 믿음으로 인한 구원과 행위로 인한 구원이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행위로 증명되는 믿음이란 결국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해 이렇게 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수십 에이커에 이르는 거대한 산불이 나자 두 사람이 불을 끄러 나섰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 집 뒷마당에 있는 물탱크에서 물지게로 물을 길어다가 산봉우리를 올라 물을 뿌리기를 반복합니다. 다른 사람은 바다로 연결된 소방호수를 강력한 펌프의 힘으로 끌어올려 산 전체에 뿌립니다. 소방호수가 닿지 않는 곳에는 소방헬기로 물을 길어다가 하늘에서 뿌립니다. 과연 누가 이 산의 불을 끌 수 있을까요? 전자는 자기의 노력으로 의를 이루려는 율법적 행위를 가리키고 후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이루는 믿음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똑같이 노력하는 듯 보이지만 의의 기원과 크기가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하는 제목으로 네 번째 설교를 합니다. 앞선 설교에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과 성도가 요구받는 회개와 믿음을 이루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오늘은 기독교인이 요구받는 믿음이 행위와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다른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과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봅니다. 이것은 성도의 구원이 가능하게 해주는 위대한 힘이 무엇인지를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이 주제로 한 두 번째로 설교에서 저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동의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은 곧 따르는 삶 그 자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서 역시 강조하기를 참 믿음이란 행함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행위라는 말인데 이것은 율법을 다 지키는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는 유대교나 선한 행위를 하여서 구원 얻는다는 타종교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의의 기원
그 답은 의의 기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율법준수나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얻는다는 가르침에서는 의가 그 행위의 주체인 인간에게서 발생합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키는 순간 의가 발생하고 혹은 선한 행위를 하는 순간 의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 의는 행위의 주체인 인간의 의가 됩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발생시킨 의를 부지런히 자신의 텅빈 의의 탱크에 적립하는데, 이 탱크는 우리의 죄로 인해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아무리 채워도 채운 것보다 더 많이 빠져나갑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로 이 탱크를 채우려는 인간은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는 유대인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라고 부르신 이유도 이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선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이들이나 그런 삶을 진작에 포기해 버린 사람이나 모두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반면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에서는 인간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순종하거나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의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의는 인간의 순종의 행위가 아니라 순종의 대상인 그리스도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이미 그리스도에 의해 2,000년 전에 완전하고도 충분한 의가 십자가에서 발생되어 온 인류를 구원하고도 남을만큼 넘치도록 적립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그리스도를 믿으면 즉 전 인격으로 그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종이 되어 그 분의 뒤를 따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과 그 분의 영이 연결됩니다. 이 연결된 통로로 그 분의 의가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옵니다. 그래서 우리 영의 탱크를 가득 채웁니다. 그 분의 의는 우리의 탱크에 난 구멍을 메우고 차고 넘치도록 흘러들어옵니다.
정리하자면 믿음은 아무런 의도 없는 우리 자신과 충만하고 완전한 의를 가지신 그리스도를 연결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행함은 그 자체로 의를 발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들어온 의의 결과입니다. 이 점에서 믿음의 삶은 구원의 조건인 행함과는 분명 구별됩니다.
의의 크기
또한 성도의 믿음은 그 대상에서 다른 종교의 신앙과 구별됩니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진실하게 믿으면 되지 꼭 기독교여야만 하느냐? 기독교인 못지않게 진실하게 믿는 이들이 타종교에도 얼마나 많은가?’라고 묻습니다. 맞습니다. 다른 종교에도 기독교 못지않게 신실한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그 믿음 자체는 참 진실한 것이고 거짓이 아닙니다. 문제는 기독교인은 진실하게 믿고 타종교인은 진실하게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기독교를 진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인 이유는 신앙인들의 진실함 때문이 아니라 신앙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의 진리되심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종교의 신앙의 대상과 달리 완전하고도 충만한 의를 공급하시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든 마호메트든 혹은 모세든 종교의 창시자들 혹은 지도자들은 믿는 자들에게 그들의 신에게 인정받기 위해 의의 탱크를 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들의 신이 얼마나 위대하든 상관없이 이 믿음체계는 의의 결핍을 해결할 책임이 믿는 자 인간에게 있습니다. 믿는 자가 자신의 선행과 율법준수와 계명완수로 자신들의 부족한 의를 채워야 합니다. 그들의 신에게서 그들에게 의가 공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대상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직접 부족한 인간들의 의를 가득 채우고도 남는 충분하고 거대한 의를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압력으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이 과정은 삼투압의 원리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땅굴을 파다가 그 굴이 바다로 연결이 되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바다쪽을 향해 굴이 뚫리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엄청난 압력으로 바닷물이 그 굴속으로 쏟아져 들어오겠지요. 어떤 것도 그 힘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어마어마한 양의 바닷물을 바닷물 자체의 수압과 수면 위의 기압이 엄청난 압력으로 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
성경은 믿음이라는 굴을 통해 바닷물처럼 거대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쏟아져 들어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바닷물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의 압력이 누르고 있다고 하십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십시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내가 확신하노니 … (롬 8:39) …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하나님의 이 사랑은 바닷물을 누르고 있는 압력입니다. 그리고 그 의의 바닷물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입니다. 오늘 본문 23절 이하입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아폴뤼트로시스)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속량이라는 단어는 ‘몸값을 받고 종을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사망의 운명에 갇힌 우리들이 거기서 풀려나기 위해서는죄의 대가가 지불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흘리신 희생의 피로 흘리심으로 우리들의 죄의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힐라스테리온)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화목제물로 번역된 단어의 원뜻은 속죄제물입니다. 구약시대에 회개한 죄인이 죄용서를 받으려면 제사장을 찾아가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죄의 대가는 오직 죽음 뿐이기 때문에 죄인이 죄를 씻는 유일한 길은 그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는데 그가 죽음을 면할 수 있는 은혜의 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를 대신하여 죽을 제물을 끌고와 그 제물을 죽이는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제물은 흠이 없는 양이어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죄인과 제물의 머리에 양 손을 얹고 기도를 드리면 죄인의 죄가 흠 없는 제물에게로 전가되었습니다.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죄를 짊어진 양이 제단에서 죽음을 당하고 죄인은 죄를 벗고 돌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속죄제사가 십자가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믿는 자의 죄를 예수님에게 모두 전가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라는 제단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선언하였습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이 세상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의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이제 회개하고 제사장에게 나갔던 구약시대 사람들처럼 회개하고 믿음으로 예수님 앞에 나가는 이들은 그들의 죄가 깨끗이 용서받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의가 죄인이었던 이에게 쏟아져 들어와 그를 의롭게 만듭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은 온 인류에게 요구되는 의를 당신이 대신 다 이루신 것입니다.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그것은 바로 모든 죄값을 다 치르시고 모든 의의 요구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죄인인 우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와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스스로 의를 이루려는 행위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완전하고 유일한 의의 근원이신 그리스도를 향한다는 점에서 타종교의 신앙과도 다릅니다.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를 의지하고 있음을 깨닫고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