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08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6 – 하나님의 열심 / 딤전 2:4

20180408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6 – 하나님의 열심 / 딤전 2:4

딤전 2:4/어떻게 구원을 받는가6-하나님의 열심

180408 주일설교
신화냐 사실이냐
오늘날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큰 위협 중 하나는 성경을 고대신화 중 하나로 여기는 것입니다. 단군신화나 그리스신화 혹은 중국신화나 인도신화와 같이 여기고 기독교인을 신화를 믿고 사는 어리석은 이로 여기는 폄하하는 것이지요. 
기독교 변증가로 널리 알려진 작가 C.S.루이스는 고대신화와 문학을 전공한 학자이기도 합니다. 신화학자인 그는 성경을 고대의 신화가 아닌 진실에 대한 기록으로 믿는 이유 중 하나로 기록의 세심함을 꼽습니다. 그가 연구한 거의 모든 고대신화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심에 놓고 그에 필요한 몇몇 요소만을 묘사한 후 나머지 디테일한 묘사를 모두 생략합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를 다룬 이솝 우화식의 묘사라는 것입니다.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사건은 시간, 장소에 대한 묘사, 주변환경에 대한 어떤 묘사도 없으며 실제로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해 창작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시간, 장소,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 벌어진 사건 등을 디테일하게 묘사하는 현대소설의 기록방식은 문학사에서 극히 최근에서야 발달한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마치 현대소설처럼 세부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입니다. 신화를 기록하기로 한 당시 성경기록자들이 수천 년 후에나 나타날 문학기법을 미리 발견한 천재들이었거나 아니면 그들이 실제로 보고 경험한 사건을 기록한 사실의 기록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루이스가 성경의 진실성을 믿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사실적 묘사 때문입니다. 고대 신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신화화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그 인물들의 출생, 인격, 업적 등이 비현실적으로 과장되게 묘사되어 있는 반면 그들의 인간적 약점, 실수, 잘못들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가장 존경받는 위인이라 할지라도 신화 속 인물들처럼 과장되어 묘사되는 법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가장 수치스러운 약점까지도 포장되지 않은 채 모두 공개되곤 합니다. 이 점은 가장 위대한 믿음의 위인으로 꼽히는 구약의 아브라함, 모세, 다윗이나 신약의 베드로와 사울 등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점이야말로 구원에 관한 기독교 메시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기독교 구원관의 그 특징은 구원의 주도권이 인간이 아닌 온전히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구원의 동력
오늘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하는 주제로 하는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간 우리는 죄인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인간이 요구받는 회개와 믿음조차도 성령님의 도우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할 때만 가능하다는 사실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역사가 벌어지는 곳으로 겸손한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죄인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구원의 동력은 다름아닌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하나님의 이 열망에 비한다면 구원을 갈망하는 어떤 죄인의 갈망도 보잘것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태양 앞에 놓인 촛불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어두운 밤에야 촛불이 존재감을 보이겠지만 태양 아래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됩니다. 
이것은 진리를 찾는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된 많은 종교들이 그 진실성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치 앞에서 상대적으로 보잘것없는 것이 되고야마는 이유입니다. 그 종교들을 의미있게 만드는 인간의 헌신이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 앞에서 별 의미없는 것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성경은 죄인의 구원이 온전히 하나님의 열망에 의해서 하나님의 주도권 아래서 진행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는 아브라함의 예를 보십시오. 성경은 그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인정을 받았다고 선언하십니다. 
(롬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 선언만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구원에 결정적인 요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 믿음을 가지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과연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스데반의 설교입니다. 
(행 7:2)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 7:3)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셔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주목할 것은 이 때의 아브라함은 여호와를 섬기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그의 아버지 데라를 따라 이방신을 섬겼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설교입니다. 
(수 24:2)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성경 어디에도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와 달리 갈대아 우르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까지는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신 이유를 느헤미야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느 9:7)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 옛적에 아브람을 ‘택하시고’ 갈대아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시고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하나님을 찾아서도 아니고 그에게 선함이나 탁월함이나 정직함이 있어서도 아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은 그 자신이 택함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것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그는 가나안에 들어선 이후에도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고 그 땅을 떠나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 곳에서 제 안전을 위해 아내를 누이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또 한 번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자녀를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 하고 여종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이 모든 그릇된 선택이 일으키는 문제를 매번 하나님이 해결하시고 그를 지키십니다. 왜입니까? 그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왜 그 약속을 주셨습니까? 그를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창세기가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잘못들은 하나님의 선택이 아브라함의 자질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브라함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 때문입니다. 이에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9:11) 그 자식들(에서와 야곱)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6) 그런즉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을뿐 아니라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그가 원해서 된 것도 아니고 그가 노력해서 된 것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이해할 수 없는 긍휼히 여기심과 선택하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아브라함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열망과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인자요, 도망자였던 모세나 역시 자신의 부정을 감추려고 살인을 한 다윗,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나 교회를 박해했던 바울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원리입니다. 
 
그리스도
그리고 그 열망과 열심이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범죄하여 당신을 떠난 그 순간부터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수도없이 멸망받을 인류를 향해 오래 참으셨습니다. 
(벧후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구원을 예언하시고 때가 되기를 기다리셨다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마침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 지불해야 하는 값을 계산합니다. 좋은 집을 발견하면 가격을 묻습니다. ‘얼마인가요? 50만불요? 그럼 내 가진 것을 다 다운페이하고 매달 얼마씩 내면 좀 힘겹지만 살 수 있겠네요.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 정도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갖고 싶은 정말 너무 예쁜 집이예요. 80만불요? 그럼 내 수입을 거의 모두 모기지 갚는데 쓰고 나는 거지처럼 살아야 해요. 이 집이 탐나긴 하지만 그렇게 살면서까지 사고 싶지는 않네요.’
우리는 지불해야할 대가보다 열망이 더 클 때만 그것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중에 집 살 돈을 만들기 위해 아들이나 딸을 팔아치울 사람이 계시나요? 혹은 영주권을 얻기 위해, 비지니스의 성공을 위해, 병을 고치기 위해 자녀를 팔아치울 분이 계십니까? 아무리 우리가 그것들을 원해도 자녀를 희생시키면서까지 그것들을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보내시고 거기서 인류의 온갖 더러운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왜입니까? 당신의 아들을 희생시켜서까지라도 가치도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 그 사랑이야말로 우리 죄인들의 구원의 유일한 희망이자 참된 동력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이 열망, 이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욱 우리를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해지기를 원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욱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며 살기보다 하나님이 더욱 우리를 사랑의 능력으로 살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과 구원의 열망을 의지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