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22:6 / 가정의 선교사
180506 어린이주일
왜 자녀를 가지나
저의 아버지는 7남매 중 장남, 어머니는 7남매 중 장녀이셨습니다. 두 분의 열네 형제들은 한 명만 빼고 모두 결혼하였고 가정마다 여러 명의 자녀들을 낳아서 길렀습니다. 명절이면 친가를 가든 처가를 가든 스무 명이 넘는 사촌들로 북적댔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당시의 여느 가정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는데요, 그러나 이런 모습은 앞으로 거의 보기가 어려우리라 생각됩니다.
50대 이상 교우들을 만나서 나누는 대화 중 거의 빠지지 않는 소재가 바로 결혼하지 않고 있는 자녀들 이야기입니다. 어떤 자녀들은 결혼에 의지가 있으나 아직 적절한 상대를 못 만난 경우이고 어떤 자녀들은 아예 결혼에 관심이 없는 듯 하여 더욱 부모의 애를 태우는 경우입니다. 우리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결혼과 출산의 기피 혹은 연기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선진국들에서 공통되게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선진국 중에서 저출산 고령화문제가 가장 심각해 이미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나라가 일본이고 그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고령화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인해 삼포세대로 출발해 칠포세대까지 출현했다고 하는데요, 삼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젊은이들을 말합니다. 젊은이들에게 연애와 결혼, 출산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아닙니까? 왜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이것들을 포기할까요? 정규직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경제적 상황이 아무래도 큰 몫을 하겠지만 혼자 사는 것이 아무런 불편이 없고 결혼해도 육아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희생하기를 부담스러워하고 자아실현에 대한 욕구가 점점 강해지는 등의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아무튼 오늘날 많은이들이 이전 세대에 비해 결혼과 출산 등을 덜 중요하게 느낀다는 것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자, 그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출산을 하는 것이 옳습니까, 원치 않으면 안 해도 되는 것입니까? 혹은 하나 둘만 낳아도 됩니까, 김목사의 강요처럼 셋 이상은 낳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봅시다. 도대체 출산은 왜 해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왜 자녀를 가지십니까? 결혼을 하고보니 자녀는 저절로 생기던가요? 그렇다면 그 아이는 사랑의 열매이긴 하지만 존재의 목적을 찾긴 어렵겠군요. 자녀는 중요한 노동력인가요? 농경사회에서는 그랬습니다만 오늘날에는 글쎄요… 노후대비용인가요? 차라리 양육비로 연금보험을 드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가 아닐까요? 양육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인가요? 말 잘 듣고 속 안 썩이는 강아지는 어떨까요? 아니면 그냥 자연의 섭리입니까? 그렇다고 하면 제일 편하기 하겠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을 맞아 출산과 육아의 성경적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출산과 육아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요?
출산의 사명
성경에서 출산에 대해 가장 먼저 말하는 곳은 오늘 본문인 창 1:27-28입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기사는 하나님의 창조에의 의도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사명을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던 세상에 인간이 그의 솜씨를 더해 더 아름다운 곳을 만들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숲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미적 감각을 가진 인간이 그 손길을 더해 정원을 만들면 기존의 자연미와 인공미가 더해져 더 아름다운 정원이 됩니다. 수목원에 가셔서 일본정원, 중국정원 그리고 유럽정원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 문화권마다 고유한 자연환경에 그들의 사상과 풍습을 담은 톡특한 아름다움을 가진 정원을 창조해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육인 인간의 손길이 하나로 만나 창조된 아름다운 세상을 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한 세대에 몇몇 인간들에 의해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끝없이 넓은 대륙과 대양, 저 깊은 바다와 저 넓은 하늘은 세대를 이어가며 그 사명을 감당할 인간들의 손길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열매맺고 수가 크게 늘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거대한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인간이 연합하여 출산하여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그러므로 인간이 창조된 목적 중 하나이며 이 땅을 다스릴 인간사명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결혼도 사명이며 출산도 사명이란 말입니다. 물론 다른 사명을 위해서나 특별한 상황 때문에 결혼과 출산을 피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타락 이후에 성도들에게는 이 사명이 더욱 구체적인 목적을 띄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온 후 사람들은 하나님과 손잡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세상을 파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또 그나마 남아있던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첫 번째 예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렸던 아벨을 그 형 가인이 시기로 죽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한 아벨은 후손을 얻지 못 했고 그를 죽인 가인의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아담과 하와는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셋’이었고 그의 후손들이 아벨이 사라진 후 비로소 다시 여호와를 예배했다고 창세기 4장은 말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6장에 이르면 셋의 후손들마저 대부분 죄악에 물들어 노아를 제외하곤 하나님을 에배하는 이들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사명을 감당할 거룩한 백성들을 새로 창조하는 것이 그 목적이었으나 그 계획 역시 죄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 바벨탑사건을 통해 드러납니다. 이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택하여 사명을 감당할 백성들을 만들기 원하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의 후손들이란 육신의 후손들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들 즉 교회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를 이루고 있는 그리스도인, 성도들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며 세상을 착취하고 파괴하는 이 세대 가운데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아름답게 다스리고 회복하는 사명을 감당할 하나님의 백성들’로 부름받은 것입니다. 다시말해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백성을 낳을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육신의 후손이 아니라 믿음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믿음의 양육이 중요합니다.
양육의 사명
신명기 6장은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신 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 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한마디로 하나님 사랑하기를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사실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도 자녀를 낳았다고 저절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교육 없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자격을 얻는다고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성도의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도가 되는 것이 물론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 못지않은 성도의 사명이 양육입니다. 신앙인의 양육에 대해 잠언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잠 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신앙인의 자녀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이에게 가르치면 늙어도 배운 대로 산다는 말로써 어릴 때 배운 것일수록 더 오랫동안 그의 삶을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까 싶지만 심지어 교육학자들은 인격형성의 상당 부분이 태아상태에서 결정된다고 합니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느끼고 경험하는 것을 태아는 본능적으로 이해하고 있고 거기서 영향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가르칠 것은 마땅히 행할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사는 삶을 가르치라는 것인데 그럼 말도 못 알아 듣는 아이에게 설교를 하란 말일까요? 당연히 그것은 아닐 겁니다. 아이들은 말을 못 알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대하는 부모들의 표정과 말투와 태도, 서로를 대하는 방식, 타인을 대하는 방식, 그들이 타인에 대해 하는 말들, 집안의 분위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의 마음가짐 그리고 예배하는 자세 등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느낍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아이에게 교육되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 속에 돌에 새기듯이 새겨집니다. 결코 지워지지 않고 평생 가는 흔적을 남깁니다.
많은 부모들이 양육을 사명이라고 생각 못 합니다. 오히려 양육을 무거운 짐이요, 양육에 드는 돈을 낭비 혹은 부담스러운 지출이라고 여깁니다. 아이 양육비는 선교비입니다. 한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비용입니다. 그 선교비가 그 아이를 모세로 만들지, 다윗으로 만들지 모릅니다. 양육을 무거운 짐이라고 생각하니 할 수만 있다면 양육의 짐을 피하려 합니다. 한 예를 들자면, 요즘 부모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TV나 스마트폰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이 조용해지고 부모들은 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오. 그 아이들이 더 크게 되면 그 TV와 스마트폰 때문에 여러분이 얻은 휴식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훨씬 더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아이들과 싸우며 보내게 될 겁니다.
아이들을 진정으로 축복하고 위하는 길은 그들에게 많은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바른 신앙과 건강한 내면세계, 건강한 몸을 가진 성인으로 자라게 해주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받으러오는 부모들에게 꼭 권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도 배운 것인데, 아이들의 TV나 게임시간을, 저희 가정의 경우에는 일주일의 2시간으로 미리 약속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가정마다 상황마다 조금씩 다르게 적용할 수 있겠으나 분명한 것은 미리 약속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약속을 하고 부모도 지키면 아이들도 그것이 당연한 줄 압니다. 그러면 남는 많은 시간에 무엇을 합니까? 책을 읽어주고 책을 가지고 놀게 하고 혹은 몸을 부대끼며 같이 놀아주는 것입니다. 물론 체력적으로 힘듭니다. (그래서 결혼을 일찍 하는 것이 좋습니다.) 성경코믹스도 얼마나 좋은 것이 많이 나와있는지 모릅니다. 교우들 가정에는 아이들이 자라서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이 항상 남아돌기 마련입니다. 도서관에는 좋은 책들이 산더미입니다. 도서관 가서 놀게 해주는 것도 방법입니다. 아이들에게 책을 통한 지식과 정서적 성장, 책에 익숙해지는 것을 선물하는 것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축복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신앙을 위해 진행하는 Daily Devotion이나 교육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신앙교육을 시키는 것 역시 추천할 만합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의 현재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의 모든 경험의 총합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톱니바퀴처럼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연히 된 내 모습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지금 보고 듣고 경험하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미래의 삶을 만들 것입니다. 그들의 미래의 모습을 결정짓는데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책임을 져야할 이가 있다면 바로 우리들 부모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모두 가정을 사역지로 하는 선교사들입니다. 우리의 선교대상은 바로 자녀들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자하는 성도들이라면 마땅히 내 자녀부터 제자로 삼지않으면 안 됩니다. 이 사명으로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기는 선교사가 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