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2:35-40/어떻게 구원을 받는가7 : 믿음과 사랑
180527 주일설교 구원7
어디까지 순종해야 하는가
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시리즈는 끝난 것 아닌가, 오늘 설교제목을 보고 의아하신 분들이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예, 6주간 시리즈 설교를 이미 마쳤습니다만, 최근 다른 두 양육과정에서 몇 분들로부터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서 제가 충분히 교우 여러분들을 이해시키지 못 한 부분이 있다고 판단되어 A/S를 한 주 하기로 했습니다. ‘에이, 시리즈 설교 CD 다 만들었는데…’ 설교CD를 매주 제작해 주시는 교우 여러분들에게 정말 죄송합니다.
6주간 시리즈 설교를 통해 제가 강조한 것은 구원의 주도권을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쥐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끼어들 틈이 없으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회개와 믿음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세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반문이 늘 뒤따르는데요, 야고보서나 마태복음은 참 믿음이 반드시 행위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냥 입으로 믿는다고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 것 같은데요? 맞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가르침과 행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가르침을 조화시키는 답으로서, 믿음은 곧 그리스도를 따름이라는 신약의 가르침을 강조했습니다. 구약의 용어로 하자면 믿음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러 교우들이 질문이 쏟아졌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까지 순종해야 참 믿음을 가졌다고 인정받을 수 있나요? 사실 그리스도를 따른다고는 하지만 순종하지 못 하고 사는 일들이 참 많은데 과연 나는 구원 받을 만큼 믿음의 순종을 하고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이 믿음의 순종와 율법적 행위는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이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 먼저 첫째 믿음은 무엇과 같은가, 둘째 얼마만한 믿음이라야 충분한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법적 행위와 믿음의 열매는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믿음은 무엇과 같은가
먼저 믿음은 무엇과 같은가 하는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이 예수님을 믿으라는 명령과 예수님을 따르라는 명령을 혼용해서 사용한다는 점을 발견하고 믿음과 따름은 동의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을 대신해서 사용하는 단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신 예수님이 여기서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벧전 1:8입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과 믿는다는 표현을 나란히 사용합니다. 즉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믿음이 곧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원의 원리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믿음과 구원의 원리는 사랑과 결혼의 원리와 유사합니다.
참된 결혼의 유일한 조건은 무엇입니까? 오직 사랑입니다. 결혼식에서 주례는 무엇을 확인합니까? 오직 배우자를 죽을 때까지 사랑할 것인지입니다. 얼마를 벌어다 줄 것이며, 어느 정도 봉사할 것이며, 어느 정도 같이 살아줄 것인지 묻지 않습니다. 집에 얼마 이상 가져다 주거나 남편에게 어느 정도 이상 봉사해주거나 몇 년 이상 같이 살아주어야만 결혼할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죄인의 구원은 하나님을 믿는 이에게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정말 믿느냐이지, 하나님에게 얼마 이상 헌금하거나 일주일에 몇 시간 이상 봉사하거나 몇 년 이상은 꾸준히 예배를 드리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우편강도도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제대로 된 헌금도, 봉사도, 예배도 없었지만 예수님을 정말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우편 강도의 교훈은 아무 것도 안 해도 말만 잘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행위가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순종해야 하느냐
자, 그럼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참되게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은 행함의 열매로 증명된다고 하였는데 그럼 어느 정도의 열매라면 내가 참되게 믿는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것일까요? 이 말은 곧 어느 정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구원 얻을만한 사랑, 구원 얻을만한 믿음이 되느냐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 답은 역시 본문 37절에 나옵니다.
(마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해야만 합니다. 결혼식에서도 똑같이 묻지요? 죽음이 당신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기로 서약하십니까? 구원의 자격을 갖춘 사랑은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한 사랑 뿐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만 그 정도로는 사랑하지 못 합니다. 어떻게 하나요?’ 이는 마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하면서도 근심하였던 베드로의 모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완전한 하나님 사랑에 한참 못 미치는 보잘것없는 사랑만 가진 우리들의 이 사랑의 공백, 믿음의 공백, 의의 공백을 부족함없이 채우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십자가의 순종을 통해 완전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으로 우리들의 부족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 채우시고 우리에게 구원받을 자격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겨자씨만한 사랑,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진 우리들도 감히 완전한 사랑, 완전한 믿음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카네이션을 선물받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진리가 마더스데이를 앞두고 5불만 달라고 합니다. 왜? 물으면 비밀이랍니다. 알아야 주지, 몰라 그냥 줘. 그 5불을 들고 가서 학교에서 카네이션이랑 엄마 선물이랍시고 장난감 같은 것을 사들고 와서는 서프라이즈 하고 내놓습니다. 그러면 엄마는 어떻게 하나요? 와! 네가 이런 멋진 것을 준비하는 줄 엄마는 정말 꿈에도 몰랐어~ 5불짜리로 사온 것이 무엇 대단한 것이겠으며 진리가 그것 산다고 5불 달라고 한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만은 부모는 아이의 그 마음이 기특해서 행복한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사랑과 헌신, 봉사가 무엇 그리 대단한 것이 있습니까? 초등학교 1학년 짜리 처럼 형편없는 것 조금 드리면서, 아무 것도 아닌 것 조금 희생했다고, 온갖 더러운 마음에 오염된 예배를 드리면서도 대단한 것 드리고 희생하는 양 심각하고 억울해할 때 주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 모든 섬김과 희생과 예배를 받아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에는 근처에도 못가는 우리들의 부족한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과 의로 다 채우시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사랑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하지만 사실상 그것은 모두 은혜로 얻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믿음의 순종과 율법적 행위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여 구원받은 성도임의 증거가 되는 믿음의 순종과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는 율법적 순종의 차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할 때 행위는 주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순종과 섬김입니다. 반면 사도 바울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지 행위로 얻지 못 한다고 할 때 이 행위는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의를 자랑하기 위해 행할 때의 행위입니다. 이 둘은 겉보기는 똑같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행위는 그 행위의 크기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어떤 여인을 죽도록 사랑하는 가난한 젊은이가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힘을 다해 준비해도 작은 은반지 하나밖에 준비하지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재산만을 원하는 젊은이가 결혼을 허락받기 위해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의 순종이요, 후자는 율법적 행위입니다. 후자의 행위가 더 크고 훌륭해 보인다고 해서 참된 것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순종해야, 어느 정도 행해야 참된 믿음의 열매로 증명됩니까? 참된 믿음은 그 행위의 크기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행위의 참됨으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개를 헌금함에 넣는 것과 부자가 많은 돈을 넣는 것을 보시고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막 12: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막 12: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행위의 크기보다 행위의 진실함이 참된 믿음의 증거이며, 참된 사랑의 열매라는 말씀입니다. 44절을 보면 그녀의 행위는 객관적인 크기보다 진실함의 크기로 판단됩니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다른 예도 보십시오. 예수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 하실 때에 한 죄많은 여인이 값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녀의 행동입니다.
(눅 7: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그녀의 행동은 비싼 향유를 낭비하는 것으로 보였고 또한 이런 자리에 들어올 수 없는 부정한 죄많은 여인이어서 비난받을 만 했습니다. 바리새인 시몬은 그녀의 행동과 그것을 허락하는 예수님을 모두 마음으로 비난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시기를 5백 데나리온 빚진 자와 5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모두 빚을 면제받았다면 누가 면제해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당연히 5백 데나리온 빚진 자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7: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많이 사랑하였습니다. 그녀의 사랑이 참되다는 것은 주님 앞에 계산하지 않는 헌신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진실한 사랑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선언해 주십니다.
(눅 7: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그녀의 진실한 사랑을 구원에 이르는 참된 믿음으로 인정하셨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순종과 율법적 행위가 분명하게 구분됩니다. 믿음의 순종은 아무리 많이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고 헌신해도 그 분이 이미 주신 완전한 십자가의 사랑을 값을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이가 드리는 계산하지 않는 헌신입니다. 율법적 행위는 얼마나 주님께 드리면 구원이라는 대가를 받아낼 수 있는가를 계산하는 것으로 거기에는 주님이 주신 완전한 사랑에 대한 감격도, 주님을 향한 계산 없는 참된 사랑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순종해도 아무리 헌신해도 아무리 희생해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며 주님의 사랑을 다 값을 수 없으며 그것으로 구원얻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완전한 사랑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감히 의지하며 감사감격하여 계산되지 않는 사랑으로 그 분을 섬기는 것, 이것이 참된 사랑이며 참된 믿음이며 참된 구원받은 백성들의 증거입니다. 이 가난한 과부처럼, 죄많은 여인처럼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시는 천국백성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