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20/하나님을 보여줘
180729 주일설교
신을 보여줘
필리핀의 두테르테 대통령은 기행과 과격한 언행으로 이미 유명합니다만 이번 달 8일에는 공식석상에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나 셀카를 보여준다면, 또는 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즉시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국민의 80%가 카톨릭교도인 필리핀에서 반발이 거세지자 사과를 하였습니다만 유사한 발언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사과의 진정성을 믿는 이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을 보여주면 믿겠다’,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라는 도전은 어제 오늘 나온 것이 물론 아닙니다. 고대로부터 항상 있었던 논쟁이고 성경에도 그 흔적이 나옵니다.
(시 42: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사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이들 혹은 믿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는 어떤 증거도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신의 존재는 증거의 여부가 아닌 믿음의 여부에 달린 문제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성으로는 도저히 신을 알 수 없는 것이냐 하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정직한 이성으로 신의 문제를 다룬다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 긍정할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목사이자 작가인 팀 켈러는 그의 책 ‘살아있는 신’에서 증거 대신 단서라는 표현을 씁니다. 증거는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자료입니다. 단서는 일의 시초라는 뜻으로 흔히 실마리라는 단어로 대신 씁니다. 실마리는 둘둘 말려있는 실타래의 첫 부분을 말합니다. 이 실마리를 잡고 주욱 풀어나가면 실타래 전체를 풀 수 있습니다. 증거를 논하자면 문제를 풀기 어려워지는 것이, 신이 존재한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도 찾기 어렵지만 신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 역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증거 대신 단서를 통해서 신의 존재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신의 존재에 대한 단서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입니다.이에대해 오늘 본문 20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자연만물 속에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신성에 관한 단서가 참으로 명백하게 새겨져 있어서 아무도 그것을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럼 어떤 단서들이 새겨져 있나요? 오늘 우리는 요셉과 하던 여행을 잠시 쉬고 팀 켈러의 통찰을 참고하여 자연에 새겨진 수많은 하나님의 단서들 중 몇 가지만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주의 존재
첫째 단서는 우주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입니다. ‘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가 존재하느냐?’ 하는 질문이지요. 인간이 존재합니다. 미생물의 세계와 생물계와 지구와 태양계와 은하계와 우주가 존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왜 존재하느냐는 것이지요?
존재하는 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이유와 과정을 꼭 알아야 하난요?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와 과학은 인과율에 근거합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중력이 당기기 때문이고, 사람이 병에 걸리는 것은 병균이 신체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원인 없이는 결과가 없습니다. 이 인과율이 무너지면 과학도 무너지고 현대인의 사고방식도 붕괴됩니다. 세상 모든 것을 이 인과율에 근거해 이해한다면 우리의 존재 역시 이 인과율에 근거해서 이해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시 원래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존재합니다. 왜 어떻게 존재합니까?
현대 과학은 그에 대해 150억 년 전 빅뱅, 대폭발을 통해 이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대폭발을 일으킨 그 엄청난 에너지는 어디서 왔으며 그 에너지는 왜 그 시점에 특이점에 엄청난 힘으로 응축되어 있었으며 왜 150억 년 전 그 때 갑자기 폭발을 일으켰습니까? 현대과학의 대답은 ‘모른다’입니다. 왜인지도, 어떻게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폭발 이후 어떻게 우주가 오늘날의 모습까지 팽창되어 왔는지만 설명할 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바로 그 에너지의 기원과 폭발의 이유를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 1: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 1: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우주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서입니다.
생명의 존재
둘째 단서는 생명의 존재입니다. 빅뱅으로 우주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무작위적으로 흩어지는 불덩어리들 사이에서 생명이 저절로 탄생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무신론자였던 미국 국립보건원장이자 생물학자인 프랜시스 콜린스는 기독교인이 되어 창조주를 믿고 난 후 자신의 모든 과학적 지식이 훨씬 잘 이해가 된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그는 자신의 책 ‘신의 언어’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과학자의 관점에서 우주를 바라보면 마치 우주가 우리 인류의 도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중력상수, 핵력상수 등 모두 15가지 상수가 정확하게 현재와 같이 조정되어야만 생명체는 존재할 수 있었다. 이 상수들 중 단 하나가 백만분의 일 아니 몇 조분의 일만 달랐어도 우주는 지금의 모습과 크게 달랐을 것이고 물질은 유착되지 못 했을 것이고 은하계도, 별들도, 혹성도, 인간도 없었을 것이다.’
이 원리를 미세조정원리라고 합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이 우주에 창조자가 없이 저절로 생명체가 존재하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은 심심한 아이가 물감통을 캔버스에 마구 흩뿌렸는데 거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그려질 확율보다 수십억 배나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리차드 도킨스같은 무신론 전도자는 ‘눈 먼 시계공’ 같은 책에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았어도 무수히 반복되는 우연의 결과로 모나리자가 그려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럴 확율이 얼마나 낮은지 그래서 얼마나 확실히 무시할만한 것인지를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다음의 질문만으로도 도킨스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이 떨어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오래 된 고택을 방문했다가 벽에 모나리자 뺨치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림이 걸린 것을 발견했다면 옛날에 이 집에 훌륭한 화가가 살았다고 가정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수많은 아이들이 이 집에서 물감을 가지고 놀다가 우연히 그 그림이 튀어나왔다고 가정하시겠습니가? 생명의 존재 역시 창조자를 가리키는 단서입니다.
진선미의 존재
셋째는 진선미의 존재입니다. 진 옳고 그름, 선 선과 악, 미 아름다움과 추함. 인생과 역사와 문명을 존속을 위해 우리가 이해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이, 만약 우리가 목적을 가진 창조주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라면, 모두 허상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발생했기에 우연히 발생하지 않은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옳은 것과 틀린 것의 차이도 없고 선과 악의 차이, 아름다움의 차이도 본질적으로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이해하고 판단하고 느끼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그렇지 않다고 느끼면 그만입니다.
불교철학은 이런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세계가 모두 공, 허상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신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신이 있느냐 없느냐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누구나 그 안에 신을 품고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주와 같은 절대적 존재가 아니고 다 허상임을 깨달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불교철학인 인생의 본질적 문제를 기독교처럼 죄가 아니라 고통이라고 보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죄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허상일 뿐인 현상의 고통을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신론자들은 창조주를 부정하면서도 불교철학과 같은 늪에 빠지지 않고 진선미도 부정하지 않으며 여전히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웃을 돕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가며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하면서 태양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 창조세계와 그 안에 담긴 신성을 의지해 살아가면서도 신은 없으며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돌봄 아래 자라면서 부모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철부지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존 업다이크의 단편소설 ‘비둘기 깃털’의 십대 소년은 그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모르시겠어요? 만약 우리가 죽은 다음에 아무 것도 없다면 저 태양과 들판과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아, 끔찍하지 않겠어요? 그런 건 그저 소름끼치는 것들의 바다가 아니겠어요?’
우리는 오늘도 참과 거짓을 구분하고 있고 선과 악을 판단하고 있고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진선미에 대한 판단 위에 우리 인생도 서 있고 역사와 문명도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진선미의 존재는 진리이자 선하시며 아름다우신 창조주 위에 서 있습니다. 이 역시 창조주를 가리키는 단서인 것입니다.
무인도의 두 친구
두 친구가 타고가던 배가 침몰하여 무인도에 표류하였습니다. 양식도 떨어져 기진맥진하여 죽기 직전에 섬을 스쳐지나는 배를 발견합니다. 사람살려! 한 친구가 소리를 치자 다른 친구가 묻습니다. 뭐하는거야? 뭐하긴, 구조요청을 해야지. 저 배에 탄 사람들이 우리를 보도록. 이봐, 친구. 들어 봐. 저게 사람이 탄 배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응? 여긴 아무도 없는 곳이야. 오랜 시간 이 곳에서 바람이 불고 번개가 치다보면 땅에 묻혀 있던 철광석에서 철이 분리될 수 있어. 그 철이 오랜 시간 바람에 굴러다니다보면 볼트 모양, 너트 모양으로 깎이고 합판처럼 펴지고 돛처럼 구부러질 수도 있지.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더 오랜 시간 바람이 불면 그 볼트와 너트모양의 쇠들이 껴맞혀지고 합판이 서로 연결되고 돛이 우연히 거기 연결될 수도 있는 거야.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렇게 만들어진 배모양의 철덩어리들이 폭풍에 떠 밀려 바다 위에 떠다니다가 오늘 우연히 이 해변을 지나가는 것일 수도 있는 거야. 그렇게 우연히 만들어진 철 덩어리가 저런 배모양을 하고 물 위에 떠다니고 굴뚝에서 연기도 나고 뿌우하는 저 소리도 낸다고? 그럼, 마침 번개가 쳐서 위쪽에 불이 붙은 것일수도 있고 철덩어리 사이로 큰 바람이 불어서 뿌우하는 고동소리를 낸 건지도 모르지. 이 봐. 자네는 그럼 여기서 살게. 나는 저 우연히 만들어진 거대하고 정교하고 빠른 배를 타고 육지로 갈테니. 사람살려~
오늘 우리 인간이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우화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와 어리석음으로 인생의 배가 난파되어 이 절망과 무의미의 무인도에 갇혔습니다. 창조주께서 그리스도가 선장되신 생명선을 보내주실 때에 구원을 요청하고 생명의 배를 탈 것이냐, 불신앙과 무의미의 무인도에 영원히 갇혀 살 것이냐 선택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못 보시겠는지요? 저와 여러분의 믿음의 눈이 열리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