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02 다툼이 없는 세상 / 창 45:14~28

20180902 다툼이 없는 세상 / 창 45:14~28

창 45:14-28/다툼이 없는 세상

180905 주일설교 요셉15
시기의 무서움
유대인들의 지혜문서인 탈무드에 천사를 만난 장사꾼의 이야기를 들려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당신의 소원 한 가지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단 조건이 있는데, 당신과 경쟁하는 옆집 장사꾼이 당신이 얻은 것의 두 배를 받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100만 불을 받으면 그는 200만 불을 받게 된단 말입니까?” “물론이지요.” 그러자 그 장사꾼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 한 쪽 눈을 멀게 해 주시오.” 
경쟁자가 잘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같이 망하는 것을 보겠다는 이 심리상태를 무엇이라고 부를까요? 그것을 ‘시기’라고 부릅니다. 시기는 영과 육과 삶을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감정입니다. 이 세상에 시기보다 뜨거운 불길은 없습니다. 시기는 선한 생각과 감정을 모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독일 속담에 ‘남의 불행보다 기쁜 일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C.S.루이스는 그이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입을 빌어 말하기를,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을 제외한 다른 모두의 수치, 하락, 파멸을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루이스는 또 현대 사회 전체가 시기에 사로잡혀 있다고 꿰뚫어봅니다. 부자들에 대한 시기, 성공한 이들에 대한 시기, 경쟁자들에게 대한 시기 등…… 그는 평등주의의 가면을 쓴 현대사회의 시기심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그 시기를 다스리지 않으면 이 세상에 평화가 결코 올 수 없음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십니다. 
 
다투지 말라
오늘 본문은 요셉이 형들과 감격적인 재회를 하는 장면입니다. 지난 주에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형들에게 밝히고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것은 하나님이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아버지를 모시고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요셉이 베냐민과 형들과 안고 입을 맞추고 울며 재회를 기뻐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애굽왕 바로는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내려와 정착하도록 허락하고 그 명령대로 요셉은 형들에게 양식과 선물을 주어서 돌려보냅니다. 아들들로부터 요셉이 살아있고 애굽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야곱이 내려오기로 결심하는 것으로 오늘 본문이 끝을 맺습니다. 요셉 이야기가 시작되면서부터 점점 커져온 요셉의 고난과 형들의 고난이 해결되고 요셉과 형들 사이의 긴장이 모두 해결되어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이 대목에서는 그러므로 화해와 반가움, 평화와 기쁘고 놀라운 소식만이 가득해 보입니다만 그 중에서도 미묘하게 흐르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 긴장이 24절에서 살짝 드러납니다. 
(창 45:24) 이에 형들을 돌려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아니, 모든 것이 좋기만 한데 왜 형들이 다툴까봐 요셉은 걱정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요셉이 형제들에게 준 선물 때문입니다. 바로 앞문맥을 보십시오. 
(창 45:21)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그대로 할새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를 주고 길 양식을 주며
형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 아버지 야곱을 모시고 오도록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양식 외에 반가움과 호의의 표시로 선물도 줍니다. 
(창 45:22) 또 그들에게 각기 옷 한 벌씩을 주되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주고
형제들에게 옷 한 벌씩을 주면서 베냐민에게만은 다섯 벌에다가 은 삼백을 따로 챙겨주었습니다. 왜입니까?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사랑 때문이지요. 그리운 어머니 라헬을 떠올리게 만드는 동생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사랑을 주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형들에게 시기를 불러 일으킬까봐 요셉은 걱정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걱정은 근거가 없지 않습니다. 바로 22년 전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아버린 일이 이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 (창 37:4)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더 사랑받고 비싼 채색옷을 입었다는 것이 그를 시기하여 마침내 죽이려다 팔아버리는 비극을 불러일으켰던 것처럼 이제 베냐민이 다른 형제들보다 다섯 배나 많은 옷과 돈을 선물로 받았다는 사실이 또 다른 시기와 다툼을 불러오지 않을까 요셉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 다투는가
온 세상을 다툼으로 가득 차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시기입니다. 시기는 욕심과 더불어 다툼을 불러 일으키는 가장 오래 된, 뿌리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류 최초의 다툼이자 살인인, 가인이 동생 아벨을 돌로 쳐죽인 사건이 바로 시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시기의 사전적 정의는 ‘남의 세력이나 재능을 샘내어 미워하는 것’입니다. 시기는 욕심과 다릅니다. 욕심을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지만 시기는 대상을 미워합니다. 욕심을 대상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기지만 시기는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밀어냅니다. 시기는 자신의 삶을 파괴합니다. 
요셉의 형들이 시기 때문에 저지른 일과 치른 대가를 보십시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을 보고 시기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다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 일로 그들은 22년 동안 죄책감을 품고 편안히 발 뻣고 자지 못 했습니다. 매일 어깨에 돌덩이를 얹고 살아가는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원히 값지못할 빚을 진 채무자로 살아가는 심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아버지가 죽을 듯이 슬퍼하고 더 늙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요셉이 없어짐으로 그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에게 자신들의 악행을 숨기며 살면서 어떻게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보며 진정한 부자지간의 사랑과 공경을 나누며 살았겠습니까?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형제들끼리 우애있게 자라라고 할 수 있었을까요? 이런 악행을 저지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행복하게 살 것이라 감히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불행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들은 죄값을 치른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해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용서를 들은 후에도 그들은 떨치지 못 하는 죄책감과 복수의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는 사실은 창세기 말미에 가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기는 상대를 미워하여 불행하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인데 형들이 요셉을 시기하였다고 요셉이 불행해졌습니까? 한동안은 노예와 죄수가 되었으니 형들이 원하는 대로 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결국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고 자신들이 그 앞에서 절하는 처지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시기한다고 해서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 반대로 자신들이 더 불행하고 불쌍한 처지가 되고야 맙니다.
만약 형들이 동생 요셉을 시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고 남은 아들 요셉에게 집착하느은 아버지 요셉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는 철부지 동생 요셉을 긍휼히 여겼다면 말입니다. 동생을 죽이려다 팔아버리는 비극도, 평생을 죄책감과 두려움에 갇혀 사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야곱 일가를 애굽으로 보내셨겠지만 다른 길을 사용하셨겠지요. 훨씬 복된 삶을 그들 모두가 살았을 것입니다. 
 
왜 시기하는가
물론 형들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할 수 있습니다. 왜 아버지는 요셉만 편애하고 그에게 채색옷을 입히나? 우리는 이렇게 볼품없는 무채색 옷만 입히시면서? 똑같은 아들이 아닌가? 같은 이유로 요셉에게 선물을 받아 돌아가는 형제들에게 불만과 시기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왜 베냐민만 다섯 벌의 옷을 주고 은도 저렇게 많이 주는가? 왜 우리에게는 옷 한 벌 밖에는 선물을 주지 않는가 말이다. 
우리도 형들처럼 이런 불만을 얼마나 많이 가집니까? 왜 저 사람은 나보다 실력도 없는데 더 잘 되는가? 승진하고 돈을 벌고 자식도 잘 되고 남편도 잘 만나고 아내도 예쁘고… 나보다 믿음도 부족하고 봉사도 적게 하는데 더 빨리 직분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가? 
이런 불만을 가질 때 요셉의 형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받은 것이 모두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형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 전까지 그들은 2년 동안의 흉년으로 인해 굶어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요셉이 모른 척 했다면 5년이나 더 이어질 흉년으로 그들은 모두 굶어서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 요셉이 그들의 악행을 심판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전에 모두 목이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요셉의 용서를 얻고 살아날 양식을 얻었습니다. 애굽으로 이주해 혹독한 흉년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요셉이 주는 옷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불만을 가진다면 이 모든 은혜와 선물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는 것이 됩니다. 
선물은 주는 이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얼마만큼을 줄 지, 줄지 말지조차도 주는 이의 마음입니다. 받는 이는 그저 받은 것에 고마워할 뿐 다른 선택지가 없습니다. 안 줘도 그만인 것을 줬으니 고마을 따름입니다. 은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이들이 받는 선물입니다. 자격도 없는 이를 살려주고 선물까지 줬더니 그 선물이 적다고 원망하고 시기한다면 이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22년 전 요셉의 형들은 그랬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받는 사랑이 자신들의 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그 대목으로 가보십시다. 
(창 37:3)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요셉은 야곱을 더 사랑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아들들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모두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그들이 받은 생명, 돌봄, 사랑은 모두 은혜입니다. 원래부터 그들이 받은 자격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 뭘 주고서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권리로 여겼고 당연하게 여겼고 더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고 더 받는 요셉을 시기했습니다. 여기서 비극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것이 모두 무엇입니까? 은혜요, 선물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은혜입니다.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것이 은혜입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의 물과 공기와 자연의 혜택을 입고 사는 것이 선물입니다. 우리가 받은 자격이 있는 것도, 무슨 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미국에서 사는 우리가 누리는 안전과 풍요와 문화는 지구상에 사는 대부분 인류에게 꿈도 못 꿀 복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못 받았다고 생각되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더 받았다고 생각되는 이를 시기하고 미워합니다. 그래서 다툼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요셉은 베냐민과 형들을 돌려보내며 다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이렇게 당부합니다. 
(벧전 2: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벧전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우리 안에 남아있는 시기를 버리고 거룩한 양식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