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923 고센 땅에 살다 / 창 46:31~47:12

20180923 고센 땅에 살다 / 창 46:31~47:12

창 46:31-47:12/고센 땅에 살다

180923 주일설교 요셉19
왜 이곳인가
저는 12전 LA로 들어와서 3년 후 뉴저지로 왔습니다. LA로 들어온 이유는 그 곳의 교회 청년부에서 저를 청빙했기 때문이고 뉴저지로 건너 온 이유는 우리교회에서 청빙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미국 이민 올 때 어느 지역으로 들어오셨는지요? 그 때 무엇이 그 곳을 선택하도록 만들었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직장이나 비지니스를 해야 하는 지역 혹은 지인이 있는 지역이어서였을테고 공부를 하러 오신 분들, 자녀 유학을 위해 오신 분들은 학교가 있는 지역이었겠지요? 혹시 믿음을 잘 지킬 수 있는 지역이 어딘가를 찾아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신앙생활 더 잘 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오신 분들은 흔치 않습니다만 저는 그런 사람을 압니다. 그 사람 뿐 아니라 부모님 때부터 이 집안 사람들은 어느 곳이 믿음을 더 잘 지킬 수 있는 곳인가를 기준으로 살 곳을 선택하는 이들입니다. 그의 이름은 Joseph입니다. 한국이름도 요셉이고요,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요셉입니다. 
 
왜 고센인가
오늘 본문은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정착하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과 형들의 가족이 애굽에 잘 정착하도록 돕기 위해 애굽왕 바로와의 면담을 준비시키는데 본문은 그가 준비시킨 한 가지 질문을 강조합니다. 33절입니다. 
(창 46: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직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창 46:34) 당신들은 이르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들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비천하게)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리이다.
요셉이 예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 바로는 형들의 대답을 듣고 고센 땅에 살도록 허락합니다. 
(창 47:11) 요셉이 바로의 명령대로 그의 아버지와 그의 형들에게 거주할 곳을 주되 애굽의 (목축에) 좋은 땅 라암셋(고센)을 그들에게 주어 소유로 삼게 하고
요셉이 의도한 바는 무엇입니까? 목축을 가증히 즉 비천하게 여기는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유목민인 야곱의 가족들을 고센 땅에 살게 했다는 의미는 그 땅에는 애굽사람들이 없다는 뜻입니다. 고센 즉 라암셋은 목축하기에는 좋은 땅이지만 농경민족인 애굽인들에게는 별 쓸모가 없는 곳입니다. 결국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에 들어와 살지만 애굽 사람들과는 분리되어 살아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왜 이런 분리된 삶을 계획했을까요? 풍요로운 땅에 왔으니 이 땅에서 잘 살려면 기름진 땅에 정착해서 애굽인들과 섞여 살며 애굽인들처럼 농경생활을 배우고 애굽인의 풍습을 배우고 애굽인과 결혼도 해서 주류사회로 빨리 진출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요셉은 가족들이 이런 성공을 거두는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의 최고의 관심은 가족들이 애굽인들과 구별되어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정착은 하지만 야곱도, 요셉도 늘 그들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야곱과 요셉의 유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창 47:29) 이스라엘(야곱)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창 47:30)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가나안의)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창 47:31)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찬양)하니라
야곱은 아들 요셉에게 거듭 맹세까지 시키며 자신은 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으로 돌아가 묻혀야 한다고 하고 요셉의 거듭된 약속과 맹세를 들은 후에야 안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창 50:25) 요셉이 (유언하여)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애굽)서 내 해골을 메고 (가나안으로)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거룩의 이유
야곱과 요셉이 얼마나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하고 있었는지를 보십시오. 그들은 애굽이 주는 풍요와 안락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만약 후손들이 애굽인들과 섞여 살며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과 동화되어 버리면 주님이 그들을 다시 불러올리려 하실 때 아멘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인지, 바로인지도 헷갈리고 애굽말을 하고 애굽인처럼 농사짓고 애굽인의 절기를 지키던 이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바로 이것이 요셉이 주의깊게 애굽인들과 분리된 고센땅에 정착하기를 꾀한 이유입니다. 
야곱과 요셉은 비록 흉년 때문에 잠시 애굽 땅에 이주해 살아도 마침내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함을 알았고 그러려면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정의해 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살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려면 세상에 동화된 삶이 아니라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정말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천국백성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척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의 풍요와 안락에 취하고 세상의 성공과 즐거움을 구하고 살아간다면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고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와 상관없이 우리는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그냥 애굽에 동화된 애굽백성인 것이지요. 야곱과 요셉의 유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얼마나 간절히 가나안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하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갈망이 있는지요? 세상의 안락함에 취하여 하나님 나라를 동화속 이야기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는지요? 10년을 한 직장에서 지내도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지도 모를만큼 세상에 섞여 버린 것은 아닌지,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놀랄만큼 세상과 다름없이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저와 여러분이 야곱과 요셉처럼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고 그 나라에 합당한 거룩한 삶으로 주님께 영광 돌리게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요셉의 지혜 
거룩한 삶에 반드시 동반되어야 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혜입니다. 요셉이 어떻게 구별된 삶을 추구하는지 보십시오. 요셉은 가족들이 고센 땅에 구별되어 살 수 있기를 바랬지만 그것이 저절로 되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연히 그것을 위해 주님께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 형들이 바로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고 그 만남에서 할 말을 주의깊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요셉의 준비하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인생의 성공은 준비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얼마나 준비를 잘 하느냐가 학생의 미래를, 비지니스의 미래를, 가정의 미래 또 자녀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태도는 항상 실패와 고난을 가져옵니다. 
또한 요셉이 가르쳐준 말에도 그의 지혜가 드러납니다. 그는 형들에게 ‘우리는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하니 애굽인들과 섞여 살 수 없소. 그러니 고센땅을 주시오.’라고 말하도록 가르치지 않습니다.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바로가 질문하기를 기다리도록 합니다. 그는 바로가 무슨 질문을 할지 꿰뚫어 보고 있습니다. 어떤 대답을 해야 고센땅을 바로가 주게 될지 역시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의 습관과 사고방식, 애굽의 지리, 애굽인들의 성향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한 마디도 요구하지 않고 그들이 정확히 필요로 하는 땅을 바로 스스로가 선물하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요셉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손자병법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최고의 병법이라고 하였고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지는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셉은 바로와 애굽인들의 특성과 관심을 잘 알고 자신들의 필요를 잘 알았으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자신들의 요구가 아니라 바로의 선심으로 얻을 줄 알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런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늘 생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거룩을 아는 지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에의 열망과 더불어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 지혜는 참된 거룩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와 그 거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 하는 지혜입니다. 먼저 참된 거룩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를 생각해 봅시다. 유대인들은 이 거룩을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손을 깨끗이 씻는 등 정결규정을 지키고 율법과 정결규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멀리 하는 방식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외적인 정결추구는 사실 참 거룩과는 상관이 없으면서 유대인들을 교만하게 만들고 이방인들을 멸시하는 이유가 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씻는 정결규정에 집착하고 다른 이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참된 거룩은 내면의 정결함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15:1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 (마 15:17)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음식)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마 15:18) 입에서 나오는 것들(생각)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마 15:20)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거룩은 특정한 옷차림이나 술, 담배를 멀리 하는 것,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 등 전통적으로 한국교회가 강조해온 것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절제의 한 방식이 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거룩해지는 것이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죄와 악의 생각들과 그에서 나오는 모든 못된 말과 어리석은 행실들을 버리고 선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거룩을 이루는 지혜
둘째 그 거룩을 어떻게 이룰 것인가를 아는 지혜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거룩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틈에서 살면서 지혜가 없이 거룩을 지키려는 노력은 자칫 무례와 독선, 폭력으로 오해됩니다. 
가장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우리가 거룩하려고 노력하는 만큼 커져가는 교만입니다. 술, 담배로 몸을 상하지 않게 하고 욕과 비방을 입에 담지 않음으로 마음을 깨끗이 지키려는 노력은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그런 노력을 하는 만큼 비례해서 우리 마음에 교만이 커져갈 수 있습니다. 술, 담배를 하는 사람들, 여전히 욕과 비방을 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교만은 술, 담배로 몸을 상하게 하고 욕과 비방으로 마음을 더럽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입니다.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차라리 술, 담배로 몸을 상하고 욕과 비방을 쏟아놓으며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 교만으로 하나님 자리에 올라가는 것보다 낫습니다. 
동성애는 죄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가 동성애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동성애자들의 미움의 대상이 된 것뿐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거부받는 이유는 우리가 동성애를 반대하기 때문이라기보다 동성애자들을 멸시하고 혐오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무례와 독선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셨지만 그녀를 향한 긍휼과 애정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교회가 애정과 긍휼로 동성애자들을 대하고 지혜롭게 거룩한 성의 길을 소개한다면 오히려 이렇게 빨리 세상이 동성애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멸시와 혐오를 이용해서 동성애 옹호자들은 탄압받는 소수자라는 이미지로 오히려 세상의 긍휼을 이끌어내었습니다.
거룩을 구하되 나의 의가 아닌 은혜를 의지하는 겸손을, 죄를 미워하되 죄인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을, 불의를 멀리 하되 이웃을 멸시하지 않는 예의를 가질 때 참된 거룩을 누리면서도 세상의 칭찬을 듣는 교회가 됩니다. 오늘 여러분도 요셉처럼 고센땅을 구하고 있는지요? 거룩의 열망과 지혜로 고센땅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