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118 결박을 푸는 능력 / 행 16:22~26

20181118 결박을 푸는 능력 / 행 16:22~26

행 16:22-26/결박을 푸는 능력

181118 추수감사주일
고난 중의 감사 
제가 아는 어느 교우님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검사결과 장에서 큰 혹이 여러 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의사 말이, 그대로 두면 암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수술을 해서 제거해야 한다고 했는데 교우님이 너무나 태연하게 ‘네, 그럼 수술받지요.’라고 답하니까 의사가 의아해 하더랍니다. ‘그래도 수술을 받는 건데 걱정이 안 되세요?’ ‘저는 지켜주시는 분이 계셔서 괜찮습니다.’ ‘누가 지켜주는데요?’ ‘저는 하나님이 지켜주시지요.’ 의사가 잠시 침묵하더니 아주 진지하게 묻더랍니다. ‘그래요? 저는 지켜주는 분이 없는데… 저도 교회를 가보면 지켜주실까요?’ ‘네, 그럼요.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자녀들을 눈과같이 지켜주신답니다. 그럼 저처럼 걱정할 게 없어요.’
왜 이 교우님이 교회 오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 의사가 먼저 교회를 가겠다고 할까요? 그의 마음을 묶고 있던 불신앙의 족쇄를 풀어버린 능력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고난 속에서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을 굳건하게 믿는 이의 감사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참된 감사에는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 어떤 것인지 오늘 본문을 통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난 중에
오늘 본문은 바울과 실라 일행이 2차 전도여행 기간에 유럽의 첫 성 빌립보에 들러서 겪는 일입니다. 그 곳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전도한 후 점치는 귀신 들린 한 여종을 치유해줍니다. 이 일로 그 여종을 통해 돈을 벌던 주인들이 바울 일행을 거짓으로 고소하여 큰 고초를 겪습니다. 그 겪는 고초를 22절 이하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행 16: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행 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행 16: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하지도 않은 일로 법정에서 거짓고발을 당합니다. 속옷까지 남김없이 찢어서 벌거벗기는 수모를 당합니다. 인정사정 없이 모진 간수들의 몽둥이로 온 몸을 많이 맞습니다. 깊고 춥고 어둡고 악취나고 쥐와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깊은 옥에 갇힙니다. 발에 차꼬, 족쇄를 차고 몸을 꼼짝달싹 못 합니다. 화장실은 물론 없거니와 어차피 족쇄로 인해 움직일 수도 없으니 앉은 채 해결해야 합니다. 아마 우리가 이런 일 중 단 한 가지만 겪어도 살기가 싫어질 정도로 괴로울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아마 울며 괴로워하며 절망하고 원망하고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붓지 않을까요?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그들은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정말 기도하고 찬송하였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럼 그들은 무슨 기도를 하고 무슨 찬송을 했을까요? 본문에는 직접 설명이 없지만 사도들이 이와 유사한 상황에서 드린 기도와 찬송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기도
사도행전 3장과 4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 사도는 성전에서 장애인을 치유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이를 싫어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체포되어 이틀 동안 감옥에 갇혔다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협박을 거듭 받고 풀려납니다. 우리 같으면 이 때 어떤 기도를 드렸을까요? 아마 더 이상 이런 고난을 겪지 않게 해달라거나 가두고 협박한 이들을 저주하거나 이런 일을 겪도록 내버려두신 하나님을 원망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대개 그렇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이렇게 기도드립니다. 
(행 4: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그들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계속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달라는 것입니다.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주님의 주신 사명을 끝까지 완수하겠다는 믿음이 없이는 드릴 수 없는 기도입니다. 
 
믿음의 찬양
그들의 찬양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사도행전 5장에는 또 다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 체포되어 모욕을 당하고 협박을 받고 채찍질을 당한 후 풀려납니다. 그 때 사도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행 5:41)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그들은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고난받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을 빌립보서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설명합니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믿고 은혜를 받았으니 고난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고난받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증거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대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합니까? 고난이 지나가면, 형통하여 건강하고 편하고 돈을 벌고 사업이 잘 되고 자녀가 잘 되면 기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된 것으로 인해 더욱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눅 10장을 보면 전도하다가 큰 권세를 행하게 된 제자들이 기뻐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성도의 진짜 기쁨은 천국 백성 된 것, 하나님의 자녀 된 것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자들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것임을 깨닫고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성도의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족쇄를 푸는 능력
사도들이 이런 참된 믿음으로 기도와 찬양을 드리자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5-26절을 보십시오. 
(행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행 16: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그들의 기도와 찬송을 죄수들이 들었습니다! 죄수들의 마음에도 큰 지진이 일어나고 닫힌 마음 문이 다 열리고 그들을 매고 있던 저주, 원망, 절망, 불신앙의 족쇄가 모두 풀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 하던 눈이 열려 하나님을 봅니다. 그 음성을 듣지 못 하던 귀가 열려 듣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가던 발의 족쇄가 풀려 하나님께 갈 길이 열립니다. 그 능력 앞에 그들은 무릎 꿇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래서 그 즉시로 구원받는 영혼이 나타납니다. 29절 이하를 보십시오. 
(행 16: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행 16: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행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추수감사주일을 맞아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기도와 찬송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복을 더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사명을 더 잘 감당하게 해달라는 기도, 복을 받았으니 감사하다는 찬송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도 주의 백성된 것을 기뻐하는 찬송 말입니다. 복 달라고 하는 기도는 세상 사람들, 타종교인들도 다 하는 기도이고 복 받았으니 하는 감사 역시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다 하는 감사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기도요, 감사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기도와 감사를 한다는 것이 믿음의 증거가 아닙니다. 참 믿음의 증거는 세상이 할 수 없는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런 기도와 감사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요, 오직 믿음의 사람만이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감사는 어떤 것인가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까, 세상을 넘어서는 참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까? 
 
천국의 기쁨
지난 주일 저녁에 일대일양육자 중간평가회가 있었습니다. 양육자 한분 한분의 나눔이 얼마나 귀한지 혼자 듣기 아까웠습니다. 한 양육자가 나눈 동반자의 고백이 가슴을 울려왔습니다. 동반자 자매가 일대일을 하기 전에는 그저 일요일에 교회만 가면 신앙생활 하는 것인 줄 알았다가 일대일을 통해 말씀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얼마나 순수하게 받아들여 믿고 순종하는지 양육자가 더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양육시간에 동반자가 묻기를 하나님께 십일조를  너무 드리고 싶은데 남편이 이해를 못 하니 어쩌면 좋겠느냐는 것입니다. 양육자가 나도 그럴 때가 있었는데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조언을 해주었더니 다음 주에 그 자매가 와서 하는 말이, 남편이 반대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십일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그러니까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겁니다. 멀리 사는 오빠와 사이가 틀어져 연락을 끊고 살았는데 말씀을 배우고 나니까 오빠와 화해를 하고 싶어지더랍니다. 10년 만에 전화를 했더니 오빠가 너무 좋아하면서 어떻게 연락을 하게 되었냐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나니까 오빠를 원망하며 살 수가 없더라고 전도를 했습니다. 지금은 매 주 한 시간 씩 영상통화를 하며 성경공부를 오빠하고 하고 있는데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말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자매는 무엇이 그렇게 기쁜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기쁨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입니다. 화해와 구원의 전도자가 된 기쁨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참 기쁨이요, 감사인 것입니다. 돈 벌고 성공하고 건강하고 자녀 잘 되는 것도 물론 기쁘지만 그보다 더 큰 기쁨, 차원이 다른 기쁨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 자녀가 되어 천국백성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기쁨입니다. 
지난 주에 한 교우께서 텍스트를 보내왔습니다. 매일성경을 소개해 줘서 정말 고맙고 너무 기쁘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물론 자녀들에게도 권해서 매일 QT하며 큰 은혜를 받고 있는데 최근에는 다소 관계도 소원하고 신앙도 멀리하던 타주에 사는 아들에게 이 교재를 권해주고 싶어서 대신 주문해 보내주겠다고 하니 자신은 성경책이 5권이나 있다면서 ‘절대’ 보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도 아니고 절대 보내지 말라는 말에 마음이 아파서 어떻게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매일 아침 그 날의 QT본문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서 보내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나서 일주일을 매일 그렇게 하고 나자 아들에게 연락이 오기를, 엄마가 찍어보낸 것을 읽다보니 너무 좋다면서 얼마가 들던지 괜찮으니 꼭 그 책을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기쁘던지! 그러면서 최근의 꿈이 생각이 났습니다. 꿈에서 아들과 다투다가 본인이 뭔가를 던졌는데 아들 가슴에 칼이 팍 꽂히더라는 것입니다. 깜짝 놀라서 잠이 깨서는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건가 걱정이 되어 잠이 안 왔는데 이 일을 겪고 보니 그 칼이 말씀의 칼이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큰 기쁨 속에서 성령의 검, 말씀의 검으로 아들의 영과 혼과 심령과 관절과 골수가 찔러 쪼개어 구원의 백성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감사한 이들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되어 생명의 말씀을 먹고 구원의 길 가는 것이 가장 기쁘고 감사합니다. 이 추수감사절에 이 천국의 기쁨과 감사가 여러분에게 흘러 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