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512 천국을 누리는 가정 / 창 2:20~25

20190512 천국을 누리는 가정 / 창 2:20~25

창 2:20-25/천국을 누리는 가정

190512 어버이주일
위기의 가정
한국의 어린이날인 지난 5월 5일 주일 새벽 경기도 시흥에서 발견된 한 자동차 안에서 일가족 4명이 숨진 채 발견되는 안타까운 비극이 들려왔습니다. 30대 부부는 각각 4살난 아들, 2살난 딸을 품에 안고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이 가족은 생활고로 진 사채빚 7,000만원을 갚지 못해 고생하던 중 다니던 주물공장마저 문을 닫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가정의 달, 모든 어린이들이 마땅히 행복해야 할 어린이날에 세상을 떠난 아이들의 비극은 예외적인 사건도, 한국만의 비극도 아닙니다. 캘리포니아에서 작년 3월 제니퍼 하트와 사라 하트 부부는 6명의 입양자녀들을 굶기고 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자 아이들을 차에 태운 채 해안절벽으로 돌진하여 8명 일가족 전원이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마땅히 행복해야 하는 가정에서 이런 비극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신성한 가정
오늘을 한국교회에서는 어버이주일로, 미국에서는 mother’s day로 지킵니다. 5월 한달을 가정의 달로 지키기도 합니다. 가정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회는 없지만 교회만큼 이를 강조하는 곳도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가정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정을 신성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정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잠들게 하시고 갈빗대를 취해 여자를 만들어 아담에게 이끌어 오심으로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즉 가정의 창조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우리는 내가 사랑에 빠져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었다 생각하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가정의 원형을 창조하셨고 우리가 그 신성한 공동체에 참여하도록 하셨습니다. 
가정은 교회보다 먼저 창조된 공동체이자 세상의 모든 관계와 공동체보다 먼저 창조된 곳입니다. 교회가 신성한 곳이라면 가정은 그보다 더욱 신성하면 신성하지 결코 못하지 않은 곳이라는 말입니다. 가정을 이루는 부부관계도 그러므로 신성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우리는 부부가 됩니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는 것은 가정의 기원이 되신 하나님의 역할에 비하면 어쩌면 사소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지난 주에 저는 총회참석차 캐나다 뱅쿠버에 다녀왔습니다. 그 먼거리를 비행기를 타니 5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빨리 이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제가 비행기표를 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잉사가 비행기를 만들고 에어캐나다사가 그 비행기를 운행하고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항공시스템을 설치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고 결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 먼저 하나님이 우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가정의 원형을 창조해두셨고 우리가 만나도록 인도하시지 않았다면 가정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방탕한 문화
그러므로 이토록 신성한 가정을 깨뜨리고 파괴하는 행위는 악한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가정을 위협하는 악이 존재합니다. 이런 악 앞에 가정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역시 방탕한 문화입니다. 자유로운 성을 강조하는 이 시대의 문화는 한 사람의 배우자에게만 성실한 결혼생활을 심각하게 위협합니다. 젊은이들은 결혼 전부터 여러 파트너와 관계를 가지는 것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예전에 한 리서치에서 결혼 전 자유로운 성관계겸험이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았던 이들이  각각 결혼 후 배우자와의 관계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자유로운 관계경험이 있는 이들의 만족도가 크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자유로운 경험이 있는 이들은 과거의 파트너와 현재의 배우자를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유로운 관계를 경험한 이들은 결혼 후에도 배우자가 아닌 이와의 관계에 대한 거부감이 적기 때문에 일탈의 위험이 그만큼 커집니다.  
넘쳐나는 선정적 영화, 음악, 소설, 포르노 등의 문화컨텐츠 역시 사람들이 배우자에 만족하지 못 하게 하는 위협이 됩니다. 예전에 어느 뉴스에서 이혼법정에서 한 여자가 호소했다는 내용을 읽었습니다. 남편이 인터넷 포르노에 빠져서 자신과는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면서 집안 살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고 점점 나이들어가는 자신이 아무리 꾸미고 노력한들 TV에 나오는 젊고 예쁜 배우들과 어떻게 경쟁을 하겠냐며 흐느껴 울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 아닙니까? 한 때 장돈건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저조차도 목회하느라 이렇게 삭아버리는 마당에 누군들 예외가 되겠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원주민들의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강력히 경고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우상숭배문화가 가진 성적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예를들어 바알숭배는 신전에서 대기 중인 성창들과의 잠자리를 예배의식의 일부로 여겼습니다. 이런 성적 타락은 가정을 파괴하고 더 나아가 민족 전체를 병들게 하고 마침내는 안에서부터 갉아먹어 집을 무너뜨려버리는 흰개미떼의 공격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더욱 울림이 큽니다. 거룩하고 신성한 부부관계를 지키는 것은 가정을 지키는 것일뿐 아니라 우리가 속한 사회와 국가의 건강함을 지키는 길입니다. 범죄는 개인의 고통 뿐 아니라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는 부작용까지 있는 것처럼 성적 타락 역시 개인의 영혼과 가정의 파괴 뿐 아니라 사회, 국가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만듭니다. 성도들은 경건과 거룩으로 이런 위협으로부터 가정을 지켜내야 합니다. 
 
희생을 강요하는 문화
가정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악은 희생을 강요하는 억압과 착취의 문화입니다. 가정 내에 이런 문화가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우실지 모르지만 엄연한 현실이고 한인사회에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사회 젊은이들이 결혼을 점점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닌데 그 중에서도 여자들의 결혼거부감이 더욱 심합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오랫동안 한국사회가 가정에서 여성의 희생을 강요해왔기 때문입니다. 
총회기간 중에 잠깐 다른 노회원들과 식당에 갔습니다. 거기서 백인노부부와 그 아들인듯한 백인젊은이, 며느리인 한국여자와 그 손자인 듯 한 두어살 된 아이가 옆테이블에 있었습니다. 아이가 걸음마를 하면서 아장아장 테이블에서 걸어나가자 아들이 냉큼 일어나서 그 아이 뒤를 쫓아가고 며느리는 태연하게 앉아서 시부모들과 음식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1세들에게 어지간해서 상상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과거 한국사회에서 이런 경우에는 으례히 며느리가 벌떡 일어나 아이를 챙겨야 했습니다. 여자는 아이가 몇이든지 밤낮으로 육아를 책임져야 했고 직업이 있든 없든 집안일도 여자의 몫이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시댁에 먼저 가서 지내다가 늦게야 처가에 잠깐 들르거나 여유가 없으면 못 들렀습니다. 잔치가 있으면 음식 준비부터 온갖 궂은 일은 여자들의 몫이었고 남자들은 차려놓은 음식을 먹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잡담을 하고 윷놀이나 화투놀이를 하고 있으면 그 음식상을 치우고 후식을 내놓고 설겆이를 하는 것도 여자들의 몫이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큰 방에서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TV를 보고 있으면 제가 바로 앞에 앉아있는데도 어머니는 작은 방에 있는 여동생을 불러서 상을 치우라고 시켰습니다. 그 때 저는 그게 당연한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구남자랑 결혼한 여자들에게는 희생에 대한 하나님의 큰 상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어느 나라 할것없이 봉건사회라면 이런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었습니다만 한국사회는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중입니다. 여자들이 희생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성도의 가정은 희생의 강요가 아닌 섬김의 장으로서 거듭나도록 하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불의한 경제구조
또 다른 위협은 불의한 경제구조입니다. 젊은이들이 결혼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불의한 경제구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열심히 일해도 가정을 꾸릴만한 여유를 가질 수 없기에 결혼을 자꾸만 미룬다는 것입니다. 지난 7일 한국보건사회연구원에서 내놓은 자료에 의하면 결혼을 원하지만 미루고 있는 젊은이들의 68.5%가 주거문제를 해결하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습니다.
이건 제가 겪었기 때문에 너무 잘 압니다. 요즘에야 그렇지않지만 제가 결혼할 때만해도 34살에 결혼한 제가 동기들 중에 제일 늦은 편이었습니다. (젊은 여자와 결혼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고 오해하시는데 사실 저는 젊은 여자가 싫었습니다. 죽어도 제가 아니면 안 되겠다고 매달리는 통에 이것도 내 십자가려니 하고 마지못해 결혼한 것입니다.) 사실 늦게 결혼한 이유는 순전히 돈이 없어서였습니다. 전도사 사례로는 저 혼자생활도 계속 적자가 나는데 가정을 이루는 것은 꿈도 꾸지 못 했던 것입니다. 저는 제가 택한 목회의 길이었던만큼 아무 불만이 없었습니다만은 요즘에는 적지않은 일반 젊은이들도 제대로 된 직업을 구하지 못 하거나 구해도 수입이 충분치 않아 저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사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전에 말씀드렸지만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1970년대에는 남자 혼자 벌어도 집사고 아이들 대학보내고 중산층 삶을 넉넉히 살았습니다. 그 이후 실질임금이 갈수록 떨어져서 지금은 부부가 다 나가 벌어도 그런 삶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국가경제는 발전하고 GDP는 계속 늘어나는데 왜 서민들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점점 떨어지는 것일까요? 불의한 경제구조 때문입니다. 한국과 미국은 OECD국가 중에서도 소득불평등, 자산불평등지수가 최고인 나라들입니다. 엄청난 부가 소수의 수퍼리치들에게 집중되는 반면 중산층은 갈수록 줄고 서민층의 삶의 질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불평등한 경제구조는 구성원 모두를 고통속에 몰아넣고 결국 가정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런 불의한 경제구조를 고치기 위해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이 명하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깨어 기도한다는 것은 주님이 언제 오시나, 어디 오시나 지켜보며 깨어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 부자되는 일에 모든 정신을 빼앗긴 노예가 되어살지 말고 이 시대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눈을 부릎 뜨고 지켜보고 기도하고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천국을 누리는 가정
건강한 가정을 만드는 길은 하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미세먼지가 뒤덮은 도시에 살면서 미세먼지를 안 마실 도리가 없고 플라스틱으로 뒤덮힌 바다를 헤엄치면서 플라스틱을 삼키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또 건강한 가정을 만들지 않고서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 도리가 없습니다. 가정에서 평안하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 하면서 건강한 교회생활은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도 건강한 가정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필수적인 일입니다. 가정을 천국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주어진 최고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이루어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