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7:14-15/나를 혼내주세요
190929 주일설교
안 되는 줄 알면서
아내가 늘 핀잔을 주기를 제가 사랑이만 지나치게 예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제가 예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쁜 짓을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답했던 제가 대책없는 딸 바보였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산은 깎고 골짜기는 메워서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하는 심정으로 사랑이의 실체를 고발하는, 가슴 찢어지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이상하게 아침마다 세 녀석 중에서 제일 늦게 일어나는 것이 사랑이였습니다. 학교 늦는다고 아내가 잔소리를 할 때마다 아내에게 제가 말해주었습니다. 여보, 미녀는 잠꾸러기야. 당신도 잘 알면서 왜 그래? 그러던 어느 날 밤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평화가 예전에 쓰던 고장 난 아이폰4가 있었는데 전화는 안 되지만 와이파이가 연결되면 텍스트나 웹사이트는 이용할 수 있어서 사랑이에게 친구나 선생님에게 텍스트할 때만 쓰도록 해주었습니다. 제 책상에 있는 그 폰을 사랑이가 밤마다 몰래 가져가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늦게까지 유투브를 보느라 늦잠을 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밤 아내에게 딱 걸려 혼이 나고는 한 달 동안 주말 게임시간이 금지당했습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얼마 있다가 또 아내에게 걸린 것입니다. 절더러 야단을 치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서재에게 나오는데 사랑이가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엉엉 서럽게 울면서 그러는 겁니다. ‘아빠, 나를 혼내주세요. 안 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 저를 붙들고 서럽게 우는 아이를 보고 혼을 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느라고 제가 혼이 났습니다.
노예이기에
사랑이는 왜 자신을 혼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일까요? 그냥 자신이 안 하면 되잖아요? 그게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안 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 사랑이의 애원은 우리 인류의 애원이기도 합니다. 게으름을 이겨야 하는데 안 돼요, 경건한 생활을 하고 싶은데 안 돼요, 술 끊고 약 끊고 방탕한 생활을 끊으려고 하는데 안 돼요, 죄를 버리고 싶은데 안 돼요, 하나님만 사랑하며 살고 싶은데 안 돼요… 어쩌면 아담과 하와도 뱀의 유혹을 듣고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위대한 선교사인 바울 사도조차도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던가요?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한 줄 안다 즉 율법을 통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배웠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혀서 죄에게 팔렸다 즉 죄의 노예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실존을 죄의 노예라고 정의합니다. 죄의 노예라는 말의 의미를 15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7:15)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왜 이렇게 사는지 우리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지만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옳은 일은 하지 못 하고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부끄러운 일은 하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노예란 자유를 빼앗긴 상태가 아닙니까? 우리는 사실상 자유를 빼앗기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서구인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미국 헌법에는 모든 미국인은 생명과 행복 그리고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는 극렬히 저항합니다. 심지어 오늘날 미국의 가장 부끄러운 민낯 중 하나인 총기문제마저도 소지의 자유를 명분으로 필요한 규제마저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신체, 정치, 종교의 자유를 그렇게나 주장하는 이들도 예외없이 영적으로는 노예상태에 있습니다. 그들의 주인은 정욕이라는 폭군입니다. 그들은 탐욕과 허영과 정욕의 추구를 행복추구라는 포장지로 가린 폭군에게 휘둘리며 살아갑니다. 매일 우리가 듣고 보고 겪는 시기와 다툼과 살인과 폭력과 사기와 부정이 그 증거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죄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원하는 의를 행하고 원치 않는 불의를 버리고 살아가는 것이 자유요, 해방이요, 구원입니다.
고단하기에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노예인 우리의 삶이 몹시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롬 7:24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노예의 삶이 자유인의 그것과 달리 무척 고단한 것처럼 죄의 노예된 우리의 삶도 무척 힘이 듭니다. 왜 사는 게 이렇게 힘들지, 그런 생각이 드시거든 답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실존을 생노병사 즉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결국 죽는 것일 뿐이라고 설명하고 그러므로 삶은 고해 즉 고통의 바다라고 선언합니다. 고통을 먹고 마시고 고통 속에서 허우적댈 뿐인 것이 인생입니다. 뉴욕타임즈 최장기베스트셀러 기록을 보유한 아직도가야할길이란 책의 첫 문장을 정신과의사 스캇 팩은 Life is difficult 삶은 무척 어렵다고 시작합니다. 그가 비싼 돈을 기꺼이 내고 자신을 찾아오는 환자들을 만나보니 부유한 사람도, 배운 사람도, 성공한 사람도 예외없이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고통과 씨름하며 살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실과 고독, 배신과 실망, 가난과 질병, 다툼과 분열, 전쟁과 기근, 환경오염과 온난화와 여전히 힘겹게 싸우고 있습니다. 더 배우고 더 일하고 더 노력하면 행복만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않았던 새로운 문제가 우리를 지치게 만듭니다. 세상은 진보하고 과학기술은 발전하고 있다는데도 인생에서 벌어지는 고난은 여전히 견디기 어렵고 인류가 직면한 숙제는 풀기 어렵습니다. 역시 해결책이 새로운 숙제를 만들어냅니다. 산업혁명이 인류에게 비약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줄 알았는데 자원고갈과 환경오염, 빈부격차라는 새로운 숙제를 양산합니다. 핵발전소가 에너지 문제를 혁명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무시무시한 방사능 오염과 이익보다 더 크고 오래 걸리는 처리비용, 심지어 지구를 몇 번이나 파괴하고도 남는다는 무수한 핵폭탄을 품고자며 인류멸망이라는 시나리오를 읽고 있습니다. 개인도 인류도 고단한 삶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 고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멸망할 것이기에
우리가 구원이 필요한 세 번째 이유는 결국 멸망할 우리의 운명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롬 7:24 후반부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롬 7:24) …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망의 몸 즉 죽을 운명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망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영적 죽음을 말합니다.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고통의 삶으로 몰아넣을 뿐 아니라 마침내 영적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죄의 지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랜드캐넌보다 더 깊고 넓은 협곡을 만들어 내어서 도저히 건너편에 이르지 못 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우리는 시냇가에 뿌리내리고 철을 따라 과실을 맺던 나무가 뿌리 채 뽑혀 더 이상 수분과 양분을 공급받지 못 하는 것처럼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완전히 말라죽습니다. 이것이 영적 죽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로 인해 영적 죽음을 겪고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를 다시 시냇가에 심고 거대한 협곡을 메우지 않으면 우리는 영원히 죽게 됩니다. 멸망이요, 심판입니다. 이런 죽음의 운명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이 구원입니다.
선한 삶으로 가능한가
우리를 노예와 고통과 멸망으로 몰아넣는 이런 죄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은 도덕과 윤리라는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많은 종교와 철학이 제시하는 답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비관적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자리에게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시자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뭐라고 답합니까? 죽는 한이 있어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지요. 하지만 결과는 배신을 결심한 유다나 충성을 맹세한 베드로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마 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마 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절망했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선한 삶을 살기 위해 결심하고 노력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이 우리를 죄와 절망에서 구해줄 수는 없습니다. 저는 베드로처럼 저런 실수는 안 하는데요. 그런 생각을 하실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그런 이들도 답을 찾지 못 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요 3:4)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눅 18:18) 어떤 관원이 물어 가로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뛰어난 도덕가요, 선생으로 정평이 나있던 바리새인 니고데모나 모든 율법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지켜서 어긴 적이 없다고 하는 이 부자 청년 관원도 생명의 길을 발견하지 못 하여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이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 구원에 소용이 없음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죄인의 참된 희망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희망이 어디에 있다고 합니까? 바로 여기에 그 답이 있습니다.
(롬 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답이 무엇인지 다음 두어 주간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 답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지 철저히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죄로 인해 자유를 잃고 고단한 삶에 짓눌리며 멸망의 계곡에 추락 중인 우리 인생의 진짜 모습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 답을 열 살에 깨닫고 ‘나를 혼내주세요, 안 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라고 울부짖은 우리 사랑이는 천재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절망적인 인생의 실존을 깨닫고 예수님께 호소한 남자의 외침을 들어보십시오.
(막 9:24)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주님께 소리 질러 도움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