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13 성령으로 태어나다 / 요 3:6~8

20191013 성령으로 태어나다 / 요 3:6~8

요 3:6-8/성령으로 태어나다

191013 주일설교
거듭난 인생
제가 잘 아는 한국 어느 교회의 이모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모태신앙인이었지만 남자답게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그는 사업에 성공한 많은 비지니스맨이 그러는 것처럼 동료들과 고객들과 날마다 술집과 환락가를 드나드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할 것을 호소할 때마다 매번 건성으로 알았다고만 할 뿐 내심으로는 내가 돈을 안 벌어다 줘, 집안을 안 돌봐, 무엇 하나 남자로서 부족한 것이 있느냐며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습니다. 36세이던 1984년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새벽 2시까지 술을 마시고 귀가했는데 아내가 머리맡에 성경과 노트 한권을 놓고 엎드려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노트가 궁금해 살며시 꺼내보았습니다. 
‘오늘도 버스를 타고 수유리를 넘어갔다. 하염없이 걸으며 어김없이 죽음을 생각했다. 약을 먹고 죽을까, 손목을 그어서 죽을까. 그러나 그럴 수 없지않은가. 나를 위해 죽으신 주님의 뜻이니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주님 도와주세요, 저의 약함을 잘 아시잖아요.’ 눈물로 너덜너덜해진 노트를 읽고나니 심장이 멎고 망치로 뒤통수를 내리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서재로 나가 자신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고 있던 아내가 불쌍해서 울고 자신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셨던 어머니가 불쌍해서 울고 무엇보다 모태에서부터 은혜를 입고도 이렇게 방탕하게 살고 있는 자신이 불쌍해서 울었습니다. 더러운 걸레조각처럼 추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을 치며 또 울었습니다. 그 때 누군가 등 뒤에서 자신을 포근히 감싸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인가 싶어서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번이나 같은 경험을 한 후 마음 속에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린 순간에도 나는 한 번도 너를 버린 적이 없단다. 나는 영원히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성령님이 자신에게 찾아오셨음을 깨달았습니다. 그 날 이후 이상하게도 그토록 달던 술과 담배가 역겨워졌습니다. 손에 놓치지 않았던 화투와 카드가 보기도 싫어졌습니다. 그는 가족들이 그토록 원했지만 들어주지 못 했던, 한 때 자신의 힘으로 노력해 보았지만 이룰 수 없었던 신앙에의 헌신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를 붙드신 성령님의 능력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 방탕했던 삶을 접고 성령님의 인도를 좇아살기 시작한 그는 마침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 중 한 분이자 선교100주년기념교회의 은퇴목사이신 이재철 목사님이 바로 그 분입니다. 저는 그 분을 잘 압니다. 그 분은 저를 잘 모르시지만…
이재철 목사님의 회심과 변화된 삶은 성령으로 거듭남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줍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다
지난 주에 이어 거듭남에 대해 거듭 살펴 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중 물로 거듭난다는 것은 물세례를 받을 때 하는 신앙고백을 통해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영적 사건을 말합니다. 이 영적 사건을 거듭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 안에서 죄로 멸망할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백성인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거듭남이란 세상에 속한 삶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삶을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요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과 영은 다른 세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새 삶은 세상에 속한 삶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것이 마치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거듭남 즉 다시 태어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방탕했던 죄인 이재철이 헌신된 목회자 이재철로 바뀐 것이 그 예입니다.
 
부담스러운 거듭남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듭니다. 참된 신앙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으면 모두가 이재철 목사님처럼 삶이 극적으로 바뀌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거듭나지 않은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많을 겁니다. 이재철 목사님처럼 극적인 회심 스토리를 가진 사람이 없지는 않겠으나 몇이나 되겠습니까? 세례 받는데 눈물도 나지 않고 맹숭맹숭한 경우도 많습니다. 내가 거듭난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든 분도 있지 않으시던가요? 지난 주 설교에서 제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얼마나 큰 결단과 각오를 전제로 하는 것인가에 대해 설명드렸는데 들으실 때 각오가 새로워지신 분도 계시겠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웠던 분도 계시지 않았던가요? 지난 주 예배 후 한 교우께서 제게 물으시기를, 목사님, 거듭남은 한 번에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하는 것입니다. 네, 거듭남의 사건은 신앙고백으로 시작하여 일생 동안 계속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아마도 이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은 제가 설명드린 참된 신앙고백이 주는 부담감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어떤 결단과 각오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일 저녁에 아내에게 당신도 설교가 많이 부담스러웠냐고 물었더니 자신도 부담스러워서 설교 듣다가 제 얼굴을 안 보고 딴 데 봤다는 것입니다. 사모가 설교를 듣다가 딴 데 보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설교 중에 나가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하더군요. 지금도 딴 데 보고 계시는 분들은 앉아 계셔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거듭남의 사건이 모두 이재철 목사님처럼 극적인 것도 아니고 또 한 번으로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 시절 성공회 교회를 다니다 청소년기에 신앙을 버렸던 C.S.루이스는 33세에 다시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영적 자서전 예기치못한기쁨에서 그는 헤딩턴 언덕을 올라가는 버스 안에서 마치 눈사람이 녹아내리듯 서서히 하나님을 받아들였다고 설명합니다. 1929년 루이스는 옥스퍼드 대학 기숙사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나는 결국 하나님께 항복했다.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됐다” 그 신앙고백이 얼마나 맹숭맹숭했던지 그는 쓰기를 ‘그 날의 회심은 영국을 통틀어 가장 맥빠지고 내키지 않는 회심이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회심 후에도 그는 한 동안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영화로도 제작되어 유명한 반지의제왕 저자이자 친구였던 톨킨을 비롯한 기독교인 친구들이 그를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럴 때면 그는 ‘아무리 봄이 좋아도 동물원에서 사는 사람은 없다.’라는 말로 핑계를 대곤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교회에 갈 필요는 못 느낀다는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1931년 그는 형과 함께 동물원에 가는 길에 신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루이스는 그 날 교회를 섬기는 기독교인으로의 회심을 경험합니다. 그는 쓰기를 ‘동물원에 들어갈 때는 기독교인이 아니었는데 동물원을 나올 때는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 변증가로 명성을 떨친 루이스의 회심은 거듭남이 단 한 차례에 완성되는, 영화같이 극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듭남은 한 순간에 완성되고 끝나는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는 과정이며 하나님 나라를 향해가는 여정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남
아직도 우리에겐 여전히 이런 부담감이 남아있습니다. ‘나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런 대단한 결심과 각오도 없고 이재철 목사님처럼 극적인 사건을 겪은 것도 아닌데 과연 거듭남의 여정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을까? 지금 내 믿음은 이렇게 형편없지만 과연 언젠가는 더 큰 믿음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과 더불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성도의 거듭남에는 물세례의 역사 뿐 아니라 성령세례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신앙고백과 그 신앙고백대로 살아가는 것, 그 과정에서 겪는 온갖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전 과정을 도우십니다. 이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지 않고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바로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먼저 성령님은 우리가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신앙고백은 그 스스로의 깨달음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어떻게 도와주시나요? 바로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우리는 성령님의 도움 없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깨달을 수도 믿을 수도 없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은 신앙고백을 하도록 돕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참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신앙고백을 하고 두어 주가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그는 절망하여 옛생활로 돌아가겠다고 갈릴리로 돌아가버리지요. 기독교인이 되고도 쉽게 넘어지는 우리의 모습과 얼마나 유사합니까? 그런 그가 어떻게 위대한 사도로 변화됩니까? 바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을 통해서입니다. 
(행 2: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 (행 2: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이르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성령님은 신앙고백 후 우리의 연약한 믿음이 담대하게 바뀌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봉사하고 전도하고 양육하고 모든 것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함께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 하는 일은 지속될 수 없고 또 열매가 없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우리가 이런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을 의지하여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육체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정욕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사람 혹은 돈과 권력의 힘으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증오와 미움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자학과 절망의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두의 공통점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자유로우신 성령님
이 성령님의 일하심은 철저히 성령님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한 것입니다. 본문 8절입니다. 
(요 3:8)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하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이들에게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키셔서 거듭난 천국백성들을 만드십니다. 그럼 언제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입니까? 바로 자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때입니다. 롬 10장입니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자녀들이 주의 이름을 부를 그 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원하시는 이들이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성령세례를 부어주시는 것이 원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부터 쉬지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성령세례를 구한다면 하나님은 거듭남의 역사를 우리 안에서 날마다 날마다 멈추지 않고 거듭 일어나게 해주실 것입니다. 믿음과 겸손, 인내로 쉬지않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여러분에게 성령의 거듭남의 역사가 날마다 점점 더 강력하게 일어나게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