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020 천국백성의 윤리 / 마 5:1~12

20191020 천국백성의 윤리 / 마 5:1~12

마 5:1-12/천국백성의 윤리

191020 주일설교 산상설교1
불가해한 인생의 비밀
2004년에 KBS 인간극장의 PD 김우현 씨가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맨발천사 최춘선,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책이 있습니다. 김PD는 지하철에서 맨발에 걸인 같은 행색으로 예수천당과 남북통일을 외치며 전도하던 최춘선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난 후 그의 인생행로를 취재하다가 깜짝 놀랄 인생스토리를 만났습니다.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하고 5개 국어를 하던 수재로 젊은 시절 김구 선생과 광복군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던 그 분은 70년대 초까지 집에 차를 5대나 가지고 김포공항 입구에서 인천 국도까지의 수십만 평의 땅을 가진 갑부였습니다. 후에 성경을 읽고 회심하고 목사가 되신 최춘선 할아버지는 6.25 이후 월남한 난민들을 당신 땅에서 집을 짓고 살게 하다가 나중에는 그 땅을 그냥 주어버리셨습니다. 그 때 나누어 준 땅이 3개 동네가 되었습니다. 남은 땅에서 교회, 학교, 양로원, 고아원을 세워 6.25 이후 고아가 된 수백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사시던 할아버지는 그 땅마저 몰래 등기를 해서 빼앗으려던 사람에게 그저 줘버리시고, 찬송을 부르며 고아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그 후로도 수십 번이 넘도록 이리저리 떠돌면서도 기쁘게 고아들을 돌보십니다. 독립유공자로서 도장만 찍으면 자녀들을 무료로 대학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지만 남북이 분단되어 독립이 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혜택을 누리냐며 스스로 이를 거부하셨습니다. 한 번은 지방에 설교하러 가셨다가 자동차에 치여 병원에 실려 가신 할아버지는 ‘저 사람도 대한민국 국민입니다’라며 운전자를 그냥 용서를 해주셨습니다. 맨발로 다니시는 이유를 묻자 조국이 통일되지 않았는데 편하게 신을 신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장남인 최바울 목사는 어린 시절 동생들을 모아 놓고 ‘아버지가 예수 믿어서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하니 우리는 절대 예수 믿지 말자.’고 원망을 하며 자랐으나 결국 그도 아버지를 따라 목사가 되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아버지를 원망하며 왜 그렇게 사시냐고 하자 최춘선 할아버지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예수님을 알면서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분은 당신의 소원대로 2001년 9월 1호선 수원행 열차에서 전도를 하다가 의자에 앉으신 채로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맨발의 성자라고 불린 최춘선 할아버지의 삶은 같은 그리스도인인 우리로서도 감히 범접하기 힘들만큼 희생적이고 고매합니다. 당신의 아들들처럼 우리도 언듯 그 분의 삶을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 분은 어떻게 그런 고귀한 삶을 사실 수 있었을까요? 세상사람들 모두가 부러워하는 행복의 조건을 다 내팽개치고 세상사람들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고단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그는 어떻게 기뻐하며 행복하다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은 세상의 어떤 철학도, 어떤 종교도, 어떤 사상도 들려주지 못 합니다. 그 답은 바로 여기 예수님의 산상설교 속에서 들려옵니다. 
오늘부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시리즈로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서론이 되겠는데요, 산상설교는 말 그대로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있는, 오늘날 팔복산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하신 설교입니다. 마태복음 5, 6, 7장에 이르는 설교문으로 요한복음 15장부터 나오는 고별설교와 더불어 복음서에 등장하는 가장 깁니다. 산상설교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소위 팔복선언이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옛사람에게 이렇게 일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이르노니’라고 시작하는 율법해석이 그 나머지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합니다. 마지막으로 건축의 비유를 통해 이 모든 가르침의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알려주십니다. 
 
천국백성의 윤리
이번 시즌의 커피브레이크에서도 이 산상설교를 공부하는데요, 제일 먼저 나오는 반응이 어떻게 이걸 다 지키며 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높은 수준의 윤리는 거의 우리 죄인들이 지키며 살기에 불가능해 보일 정도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중에도 산상설교를 실제로 다 지키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거룩한 삶이 얼마나 높은 수준인지, 그래서 우리가 도저히 그 수준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인지를 상기키시켜 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산상설교를 그저 읽고 이해하기만 할 뿐 굳이 힘들게 지키려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마음은 훨씬 가벼워집니다만 정말 그런 용도로 이 긴 설교문을 마태복음은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산상설교의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산상설교는 율법해석입니다. 율법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를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의 종노릇하던 히브리인들을 구출해 내셔서 가나안 땅에 들여보내시기 전에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주신 명령이 곧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두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누구인지 정체성을 알려 줍니다. 이 율법을 받고 지킴으로써 이 히브리인들은 더 이상 남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 이스라엘이 됩니다. 이는 마치 학생이 되면 학칙을 지치고 군인이 되면 군법을 지키고 미국시민이 되면 미국법을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가 지키는 법이 곧 그가 어디에 속한 누구인지를 드러냅니다. 종은 지킬 법 따위는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종입니다. 배만 부르고 생존만 하면 될 뿐 스스로 결단하고 지켜야 할 법 따위는 없는 것이 종입니다. 그러나 자유인은 그가 속한 나라, 단체, 조직의 법을 지킴으로써 그 공동체로부터 보호를 받습니다. 이 히브리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시작하면서 애굽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율법은 그들이 살게 될 가나안 땅에서 복지를 보장합니다. 교통법규를 지켜야 안전하고 편안한 운전이 되고 미국법을 잘 지켜야 미국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듯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야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은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 15장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15:4-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모세를 통해 주신 시내산의 율법을 제자공동체인 교회를 위해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예수님은 설교의 장소를 시내산을 상기시키는 팔복산으로 정하셨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그러므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인지 그 정체성을 확립시켜주는 윤리이며 동시에 우리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는 지침입니다. 우리가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지킬 때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국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제자인 것이 드러납니다. 산상설교 중 마 5:46을 보십시오. 
(마 5:46)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그러므로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박제된 동물머리처럼 혹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옛유물처럼 우리의 실생활과는 상관없는 죽어있는 옛교훈이라고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이 가르침은 오늘 우리가 진정한 천국백성인지 아닌지를 드러내어주는 기준입니다. 이 법을 지키며 이 윤리를 좇아 살지 않으면 교회를 다니든 말든, 얼마나 오래 다녔든 상관없이 천국백성이 아닌 것입니다. 이 가르침을 좇아 살므로 천국백성임을 확인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천국백성의 행복
또한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지킬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행복을 누립니다. 산상설교의 높은 수준의 윤리가 부담이요, 짐이고 못 이룰 목표인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우리의 행복관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테니스가 처음 들어간 것이 1880년대라고 합니다. 서울 정동 분수대 자리에 당시 서양선교사들이 테니스장을 만들어 즐기기 시작했다고 하는데요, 하루는 고종이 대신들과 함께 와서 테니스를 구경했다고 합니다. 더운 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치는 선교사들을 보고 고종이 말하기를 ‘저 힘든 일을 왜 아랫 것들 안 시키고 저리 고생하누?’ 하니까 대신들 역시 맞장구를 치기를 ‘역시 오랑캐는 어리석습니다. 아랫 것들 뒀다 뭐하고 저리 어리석은 짓을 하는지요.’라고 했답니다. 
왜 구한말 귀족들은 테니스의 행복을 모릅니까? 그들은 육체를 쓰지 않는 것이 행복이고 땀을 흘리는 것은 천한 이들이나 하는 일이라는 그릇된 가르침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관이 잘못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진짜 행복을 느끼려면 먼저 바른 행복관을 가져야 합니다. 산상설교는 우리의 그릇된 행복관을 바로 잡아줍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팔복이라는 행복관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따라야하는 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그 원리가 바로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팔복을 통해 행복관을 교정하고 율법의 바른 해석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고 순종하면 우리는 천국백성의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최춘선 할아버지가 그런 삶을 살면서 행복을 누린 이유는 팔복의 가르침을 철저히 깨닫고 이해했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 분의 삶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팔복의 가르침을 도무지 깨닫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좇아 살므로 천국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천국백성의 삶
또한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구원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시켜 줍니다. 흔히들 구원은 죽어서 고통이 없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고 믿음은 그 나라에 들어가는 티켓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천국 즉 하늘나라는 이 땅과 대비되는 저 하늘 위에 있는 어떤 나라, 죽어서 가는 내세라는 좁은 개념을 넘어섭니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사랑과 공의의 법으로 세상을 다스려오셨지만 인류는 그 다스림을 거부하고 그 법도 따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이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순종하여 그 법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됩니다. 그 건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완성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눅 17: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 천국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법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 안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구원 역시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고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새 삶을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구원에는 산상설교의 이 가르침을 지켜 순종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믿음이란 죽어서 천국 가는 티켓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고 구원을 받았는데 그 가르침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안되는 이상한 상황입니다. 마치 결혼은 했는데 그녀와 살지는 않는다는 모순입니다.
산상설교의 가르침을 순종하는 것은 우리 삶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삶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있는지요? 산상설교를 듣고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을 받으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