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03 애통하는 자의 행복 / 마 5:4

20191103 애통하는 자의 행복 / 마 5:4

마 5:4/애통하는 자의 행복

191103 주일설교 산상설교3
눈물은 불행인가
저희 집 둘째 사랑이가 3학년 때부터 동네 트래블축구팀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에는 곧잘 재미있게 하던 아이가 4학년이 되자 연습할 때마다 울면서 안 간다고 떼를 쓰는 겁니다. ‘왜, 사랑아. 너 축구 좋아하잖아.’ ‘안 재미있어, 축구 싫어.’ ‘네가 안 가면 친구들이 속상하지 않을까?’ ‘나 친구 없어. 나 혼자야.’ 사실 팀에 늦게 합류한 사랑이는 백인아이들팀에 혼자 아시안인데다가 덩치가 크거나 특별한 운동신경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팀에서 제일 실력이 떨어지기는 합니다. 게다가 거친 몸싸움도 마다않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부딪히면 눈물부터 핑도는 성격이라 사실 팀원들로부터 무시당하고 보이지않게 왕따도 당했던 것 같습니다. 
우는 사랑이를 보며 한편으로는 마음이 안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리 큰 걱정은 안 되는 겁니다. 첫째 아이 평화를 보며 배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사랑이보다 더 늦게 5학년 때부터 트래블팀에 들어갔고 운동신경도 뛰어난 것이 아니아서 늘 벤치신세였습니다. 한 시간 시합하는데 내내 벤치에 앉아있다가 5분, 10분씩 교체로 들어가서 수비만 보다가 나오는게 전부입니다. 안타까워서 이렇게 저렇게 차보라고 제가 코치를 하면 자기를 늦게 팀에 합류시켜서 실력이 떨어진다고 은근히 엄마, 아빠를 원망을 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6, 7학년 때부터 키가 쑥 크면서 스피드가 늘자 출전시간이 서서이 늘어나더니 8학년 때부터는 스타팅으로 뛰기 시작하더니 9학년인 지금은 스타팅 스트라이커로 뛰고 있습니다. 불리한 조건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을 평화가 배운 것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랑이도 그렇게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5학년인 지금까지 팀을 떠나지 않고 꾸준히 몇 년을 버티니 실력도 늘고 친구들도 생기고 이제는 힘든 연습도 즐기게 되었습니다. 시즌이 끝난 겨울에는 원하는 팀원들만 신청해서 인도어 게임을 하는데 예전 같으면 절대 안 한다고 버티던 아이여서 이번에도 그러려니하고 무심코 물어보니 두 번 생각도 안 하고는 흔쾌히 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당연히 해야지 그걸 왜 물어보냐는 식으로 오히려 유쾌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 4학년 내내 울었던 시간이 오히려 사랑이에게는 성장의 기회를 주는 복이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죄를 애통하는 자
사람들은 눈물을 불행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우는 데 오히려 행복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예수님이 그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오늘 본문입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그들에게 위로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여기서 애통하는 사람은 누구이고 그들이 받을 위로는 어떤 것입니까? 먼저 애통하는 자가 누구인지 몇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애통하는 자입니다. 죄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고 수치스럽게 만들고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그래서 죄를 깨닫게 되면 슬픕니다. 그 죄로 인해 애통하는 자들의 심정을 시편은 이렇게 생생하게 묘사해 줍니다. 
(시 51:3)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시 119:136)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이렇게 애통하는 자들은 어떤 위로를 얻습니까?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닭이 울자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슬피 웁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에서 만나 위로하시고 새로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전에 사랑이가 셀폰을 침대 밑에 숨겨놓고 밤에 안 자고 유투브를 보다가 엄마에게 들켜서 ‘나를 혼내주세요. 안 하려고 하는데 안 돼요.’라며 울었다고 했던 것 기억나십니까? 그 때 제가 어떻게 했을까요? 혼낼 마음이 전혀 안 생겨요. 오히려 측은한 겁니다. 어른도 안 되는 자기절제를 이 어린아이가 어떻게 하겠나, 얼마나 절제하기가 어려우면 이렇게 울면서 호소하겠나… 하는 생각에 그냥 품에 안고 위로해 주었습니다. 사랑아, 네 잘못을 알았으니까 엄마, 아빠가 도와줄게. 엄마, 아빠 말 잘 듣고 같이 이겨내 보자. 하나님은 죄로인해 애통하는 자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위로하십니다.
(사 57:15)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
위로의 하나님을 믿으시고 모든 죄를 애통하는 심령으로 그 분께 나아가시기를 축복드립니다.
 
환란으로 애통하는 자
둘째는 인생의 환난으로 애통하는 이들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하고 예기치 않은 질병과 실패로 삶과 가정이 무너집니다. 이렇게 애통하며 슬퍼하는 이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심으로 위로하십니다. 나사로가 질병으로 사망했을 때 예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 11:33) 예수께서 그(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고난을 겪는 자들의 아픔을 공감하십니다. 그들의 실패와 연약함과 부족함을 조롱하고 정죄하고 비난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십니다. 심지어 간음의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조차 긍휼로 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예수님의 공감과 이해를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4년 인도네시아에서 쓰나미로 23만 명의 생명이 희생된 재난을 가리켜 한국의 어느 유명 목회자가 무슬림과 동성애자들 때문에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라고 설교했다는 소식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얼마 전에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 목회자가 세월호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이 아이들을 제물로 삼아 침몰시키고 죄많은 한국사람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준 것이라고 설교했다는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없는 무속적이고 경직된 사고에 갇혀있는지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입니다. 원수라해도 영정 앞에서는 조의를 표하고 예의를 지킵니다. 얼마나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으면 이토록 무례하고 무자비할 수가 있을지요. 
하나님은 또한 환란을 만난 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이 환란을 극복할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갈이 어린 이스마엘과 함께 사라에 의해 쫓겨나 죽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창 21:14) … 하갈이 나가서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더니 (창 21:15) 가죽부대의 물이 떨어진지라. 그 자식(이스마엘)을 관목덤불 아래에 두고 (창 21:16) 이르되 ‘아이가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겠다’ 하고 화살 한 바탕 거리 떨어져 마주 앉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니
그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창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창 21:19)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
그리고 그 아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생존할 뿐 아니라 큰 민족을 이루게 됩니다. 하갈은 그 광야에서 목숨을 건짐으로 위로를 얻고 그 아들이 장성하여 큰 민족의 조상이 되는 것을 봄으로 또 위로를 얻습니다. 세상에는 하갈처럼 인생의 광야에 내팽개쳐져 죽어가는 아들을 봐야하는 것 같은 환란을 당한 이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애통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고후 1:3) 찬송하리로다 그는 …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으시고 위로를 경험하시를 축복드립니다. 
 
불의로 애통하는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에 만연한 불의로 인하여 애통합니다. 이 점은 마태복음의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을 보면 분명하게 강조됩니다. 누가복음은 대조를 통해 우는 자가 누구인지 마태복음보다 선명하게 그 대상을 드러냅니다. 
(눅 6:21) …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눅 6:25) …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우는 자는 자신의 죄나 환란 때문에 우는 이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웃는 자들에 의해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압제당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우는 이유는 웃는 자들의 불의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정치적 자유는 없었지만 경제적으로 광대한 제국내의 자유로운 무역으로, 오늘날로 치자면 FTA로 자유무역이 이루어지던 시기여서, 부가 그 어느 때보다 축척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제적 번영은 소수의 지배자들의 것이었습니다. 로마인 관리와 군인들,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보장받은 헤롯왕조와 그 관리들과 성전을 백성들을 착취하는 도구로 사용한 제사장 무리와 사두개인 그리고 이들의 착취에 침묵함으로써 중산층의 지위를 보장받는 바리새인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의 횡포를 고발하다 목이 잘렸으며 예수님 역시 그들에게 위협이 되었기에 결국 십자가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의 고발은 바로 이 웃는 압제자들에게 심판이 닥칠 것이기에 울 것이며, 우는 백성들에게 구원이 주어질 것이기에 웃을 것임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불의의 칼날에 찢기고 상하여 애통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있을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메시야)게 내리셨으니…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구원)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심판)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계 7:17)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과거에는 정복자와 침략자, 왕과 독재자에 의해 저질러지던 압제와 착취가 오늘날 좀 더 교묘하고 세련된 방법으로 이 사회의 헤게모니와 시스템을 움켜쥔 권력자들에 의해서 여전히 저질러지고 있습니다. 선진국과 후진국을 가리지 않고 점점 커져가는 빈부격차, 소수의 메가리치가 천문학적 부를 점점 키워가는 동안 반대편에서는 중산층이 무너지고 빈자들의 절망이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정의를 위한 의인들의 싸움이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듯 무기력하게 보일 때 주님의 이 선언은 정의의 하나님은 잠들지 않으셨고 골리앗처럼 불의는 무너지고 말 것이며 우는 자들은 위로를 받게 될 것임을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믿고 외칠 수 있습니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정의의 하나님의 위로를 믿고 애통의 기도를 쉬지않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