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0 할로윈 단상 / 고전 10:23~33

20191110 할로윈 단상 / 고전 10:23~33

고전 10:23-33/할로윈 단상

191110 주일설교
할로윈의 고민
지난 주에 어느 교우가 목사님네는 할로윈 퍼레이드에 아이들을 보냈는지, 할로윈을 어떻게 보냈는지 물어오셨습니다. 이번 할로윈에 아주 골치가 아팠다는 겁니다. 아이들은 할로윈 퍼레이드와 Trick-or-Treat이라고 사탕을 얻으러 다니는 놀이를 하러 가고 싶어하는데 보내도 될지에 대해 부부간에도 의견이 다르고 주변 사람들도 의견이 둘로 나뉘더라는 것입니다. 한 쪽에서는 귀신숭배풍습에서 유래한 놀이에 아이들을 보내면 안 되고 교회에서 대체제로 할렐루야 나잇, 홀리윈 나잇 등의 행사를 하니 거기에만 보내면 된다고 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그저 놀이일 뿐이니 큰 의미 둘 필요가 없다고 하고 어떤 미국교회는 아예 귀신 가면 대신 건전한 가면을 쓰고 교회에서 퍼레이드와 Trick-or-Treat행사를 주최해 주더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회에서 하는 행사는 당연히 가고 학교나 친구들과 하는 놀이도 가고 싶은데 교회 행사만 보내려는 부모와 옥신각신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자, 그럼 저희 집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답은 설교 끝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 않으면 율법처럼 오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팔복 설교를 잠깐 멈추고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할로윈 문제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사실 소재만 다르지 비슷한 고민이 다른 분들에게도 적지 않습니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는 가족, 친지 댁에 가야 하는지, 가서는 제사에 참석하거나 제사밥을 먹어도 되는지부터 큰 계약을 할 때면 고사부터 지내는 사장님 밑에서 일해도 되는지, 술 마시는 친구들 모임에 가는 것은 괜찮은지… 사실 비슷한 원리의 문제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불교신자인 남편과 기독교신자인 아내가 시댁제사를 모시는 것 때문에 갈등을 겪다가 이혼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먼저 할로윈 퍼레이드에 참석하는 것이 죄인지부터 물어봅시다. 할로윈을 고대 아일랜드의 켈트족이 새해를 맞아 농사를 망치는 잡귀를 쫓아내기 위한 의식으로 귀신복장을 하고 시끄럽게 온 마을을 돌아다닌 풍습에서 유래되어 여기에 중세 카톨릭교회가 모든 성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소위 만성절이 결합되었다고 합니다. 만성절-All Hollows Day라는 표현에서 할로윈이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기원이 악귀를 쫓는 이방풍습이기에 교회에서 할로윈을 금기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무엇이 있을까요? 대표적인 예가 올림픽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올림픽은 기원전 7세기 경 그리스 올림피아에서 제우스를 비롯한 그리스도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연 축제를 그 기원으로 합니다. 고대 올림픽이 중단된 것도 기원후 4세기 경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한 후 올림픽 경기가 우상숭배이기에 금지시킨 것으로 학자들은 봅니다. 현대 올림픽은 고대 그리스신들의 숭배의 흔적을 여전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시작을 알리는 성화봉송은 그리스 신화 중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신들에게서 훔쳐 인간에게 전해준 신화를 재현한 것으로 그리스 여신 복장을 한 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성화봉송주자가 성화 거룩한 불을 붙이러 달려갑니다. 1960년 로마올림픽부터 개막식과 폐막식에 울펴퍼지는 공식올림픽 찬가를 더욱 그 성격이 분명합니다. “불멸하는 고대의 영혼, 순결의 아버지여, 아름다움, 위대함, 진리 속에 계신 자여, 이곳에 내려와 모습을 드러내어 성화와 같이 빛나소서… (중략) … 이제 이 성전을 향하여 서두르라, 순례자들이여! 모든 나라의 불멸하는 고대의 영혼이여!” 올림픽의 성격이 이러하다면 기독교인들은 올림픽에 참여하거나 그 경기를 즐기거나 응원하는 것은 모두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죄가 아닙니까?
 
세상문화
여기서 우리는 신자들이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문화에 대한 이해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할로윈과 올림픽 뿐 아니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문화에는 뿌리를 찾아내려가면 비기독교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예를 들기시작하면 이 예배시간을 다 써도 턱없이 모자랍니다. 당장 우리 한국인들이 무심코 쓰는 용어 중에는 불교와 유교와 무속신앙에서 유래된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불교에서 유래한 상용어 지명 사전’을 보면 ‘교회’라는 단어는 애초에는 부처의 가르침을 믿는 사람들이 예불하고 법문을 듣는 모임이란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성당’ 역시 애초에는 법당 혹은 불당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장로’는 선종에서는 주지를 가리키는 단어였고 율종에서는 종파의 주관자를, 화엄종에서는 퇴임한 고승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전도’는 깨달은 도를 전한다는 불교용어였습니다. 이 외에도 말세, 불가사의, 세계, 인심, 인식, 자유, 점심, 직업, 종자, 지식, 차별, 출세, 평등, 허공, 도로아미타불, 이판사판, 아수라장, 야단법석 등 도저히 이 시간에 다 소개할 수 없을만큼 우리가 무심코 쓰는 불교용어가 많습니다. 한반도 불교는 무려 1,600년의 역사를 가졌고 대한민국 국보와 보물의 62%가 불교유물입니다. 불교적 용어와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로운 한국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비기독교적 뿌리를 가진 모든 문화요소를 우리 삶에서 제거하려 한다면 단 한가지 선택지 밖에는 남는 것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그 방법을 설명해 주지요. 
(고전 5:9)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런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여기서 2시간 차를 타고 내려가면 펜실베니아에 있는 재세례파 계통의 개신교 아미쉬 공동체가 그들입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에도 있는 아미쉬 공동체는 일체의 세속적인 현대문명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전통적인 농축산업에 종사하며 자급자족하는 고립된 생활을 합니다. 정말 세상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 이런 선택에도 분명 의미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만 사도 바울은 한 말의 의미는 정말 세상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 아니라 ‘정말 세상 밖으로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즉 세속적인 문화에서 비기독교인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유와 배려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처한 이교적 상황을 배경으로 합니다. 번영한 그리스 도시였던 고린도에서 시장에 나온 고기는 거의 대부분이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쓴 것을 내다파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로서 그리스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에 쓰인 고기를 먹는 것은 대단히 마음에 꺼리끼는 일이지요. 할수만 있으면 신전에 쓰이지 않은 고기를 사서 먹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요즘처럼 풍요롭지 못 한 고대사회에서 깨끗한 고기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그런 고기를 찾기도 어렵고 잔치에 초대받아 가서도 그런 고기를 찾으려면 아예 잔치에 가지 않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합니다. 
(고전 10: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고기)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고전 10: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할 때에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고기)은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고전 10: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여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시장에서 매번 확인하면 너희는 고기를 아예 못 먹을 수도 있고 식사초대를 받아가서 우상의 고기니 못 먹겠다는 말은 몹시 무례한 일일 뿐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모든 음식이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깨닫고 감사함으로 받으면 우상의 제물이건 아니건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율법의 조항에 얽매인 율법주의자들은 누리지 못 하는 그리스도인의 놀라운 자유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에는 단서가 붙습니다. 그것은 그 자유를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전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고전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고전 10: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형제 자매가 마음이 불편하면 기꺼이 절제하여서 공동체를 시끄럽게 만들지 않는 덕을 세우고 형제 자매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한 마디로 ‘자유와 배려’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유에 대해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할로윈이나 올림픽이나 불교적 용어와 사고방식에 대해서 자유를 가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대부분의 할로윈 퍼레이드에는 악귀를 쫓는 의미가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들에게 그렇게 말해 보세요. ‘이 아줌마, 뭔 소리 하는 거야?’하는 표정으로 쳐다볼 겁니다. 아이들에게 할로윈의 의미를 설명할 때도 똑같은 반응입니다. ‘엄마, it’s just fun. 그냥 노는 거야.’ 즉 건강한 문화는 결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자체로 죄라고 할수도 없다는 말입니다. 올림픽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림픽 응원을 하면서 제우스께 영광을! 이라고 생각하는 분 계셔요? 우리는 더 이상 불교적 가치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교회, 성당, 장로, 인연, 말세라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문화의 영향에 대해 자유롭습니다. 자유로울 뿐 아니라 그 문화 속으로 들어가서 문화를 변혁시킬 기회도 얻게 됩니다. 이 자유를 발견하면 기독교인들의 세계는 무척 넓어집니다. 반면 이 자유를 모르면 기독교인의 세계는 교회 안에 갇히고 동시에 문화를 변혁시킬 기회도 잃습니다. 아미쉬 타운에 안 들어가도 아미쉬처럼 살아가게 됩니다. 
동시에 배려는 우리는 성숙하게 만듭니다. 이 때 배려란 세속문화가 불편한 같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배려, 기독교적 가치가 낯선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배려를 모두 포함합니다. 세속문화에 대한 자유는 복된 것이지만 형제 자매에게는 시험거리를 던지는 것은 아닌가, 세속문화를 잘 절제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비기독교인에게 무례와 독선으로 비취지는 않는가를 고려하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뭣이 중한디
그럼 어느 정도의 자유와 어느 정도의 배려가 좋을까요? 그 답은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습니다. 그 때 그 때 다른 그 자유와 배려의 수준은 본질에 의해 좌우됩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본문 31절 이하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고전 10: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 교회의 덕, 이웃의 유익… 이것이 본질이고 할로윈 퍼레이드를 하느냐, 않느냐는 비본질이라는 말입니다. 사소한 데 목숨 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본질은 모두 나 자신의 유익과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내가 편하니까 자유하고 내가 불편하니까 절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자유하는 이는 형제 자매를 배려합니다. 교회의 덕을 위해 절제하는 이는 자유하는 이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자유하는 이는 절제하는 이를 무시합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 절제하는 이는 자유하는 이를 비난합니다. 
이제 저희 집은 어떻게 하는지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평화 때부터 아이들에게 할로윈의 의미를 잘 이해시켜 스스로 절제하도록 하자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평화는 기질이 범생이어서 원칙을 지키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1학년 때부터 엄마 말을 잘 이해하더니 반에서 혼자 할로윈 퍼레이드를 하면 도서실에서 책보고 놀았습니다. 괜찮았냐고 물으니 아무 상관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사랑이와 진리는 모든 룰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들입니다. 매년 이 맘 때면 엄마의 설명을 듣고도 so what? it’s just fun. 그냥 노는 거니까 보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보내줍니다. ‘대신 아빠가 목사라고 절대 말하지마.’ 신앙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신앙이 그들의 자유와 즐거움을 빼앗는 것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년에도 또 설명하고 스스로 판단할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아미쉬 공동체도 자녀들이 16세가 되면 계속 아미쉬로 살 것인지, 공동체 밖으로 나가 현대문명에 섞여 살 것인지 선택권을 줍니다. 신앙은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요?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며 세상을 변혁시키는 공동체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