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17 온유한 자의 행복 / 마 5:5

20191117 온유한 자의 행복 / 마 5:5

마 5:5/온유한 자의 행복

191117 주일설교 산상설교4
팔복의 깊이
마이클 윌킨스라는 이의 이야기입니다. 십대 소년이었던 그는 예배당에서 젊은 전도사의 팔복설교를 들으며 코웃음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전도사는 학생들에게 공격적이고 남성적인 태도를 버리고 부드럽고 온화한 성품으로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였는데 풋불을 비롯해 더 공격적이어야만 이기는 세 가지 운동을 하고 있던 그에게는 온통 헛소리로만 들렸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흥미가 사라진 그는 교회를 떠났고 몇 년 후 베트남 정글에서 공수부대원으로 전투를 치르고 있었습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군인들이 흔히 그러하듯 그도 분노와 증오로 총을 쏘아댔고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특별히 치열한 전투를 치른 후 널부러진 적군의 시체를 제대로 치우지도 못 한 채 보초를 서다가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듯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가 비웃었던 삶의 태도 즉 가난한 심령과 죄에 애통함과 복수하지 않는 온유함에 대한 처절한 갈망을 느끼고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 날 밤 내 영혼의 비참함을 깨달았을 때 심령이 처절하도록 가난해졌다. 신이 만약 존재한다면, 그 분 앞에서 내 운명이 어떻게 될지를 생각하고는 무서워 떨었다. 내 속에 가득한 악으로 인해 울었고 우리 모두들 속에서 재빠르게 퍼져가는 악으로 인해 울었다. 젊은이로서 생애에 처음으로 나는 내 인생의 배의 선장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몰랐다. 다르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온유와 의와 긍휼과 청결과 화평이 돈과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제대 후 그는 다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현재는 탈봇신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팔복의 가르침이 고루해 보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닐 겁니다. 이 시대는 팔복에 묘사된 삶을 불행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부유하고 즐겁고 공격적이고 주도적이고 성공에 목마르고 영리한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삶의 심층부로 내려가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팔복이 왜 진짜 행복인지 깨닫습니다.
 
땅, 땅, 땅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세 번째 행복선언을 이렇게 하셨습니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함이란 성품이 온화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그들이 받을 상이 땅이라는 대목에서 의아합니다. 온유함과 땅이 도대체 어떻게 연결이 된다는 것인지, 집을 산다는 말인지, 무슨 부동산을 얻게 된다는 말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을 풀 키워드도 바로 땅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이 복선언은 예수님이 홀로 생각해 내신 것이 아닙니다. 바로 구약의 이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시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이 이미 시편에 나와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모른 채 우연히 비슷한 표현을 사용하셨을 확율은 제로입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이 표현을 정확히 아시고 그 의미를 가져와서 당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 백성들에게도 복음이자 소망의 말씀으로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그럼 시편의 이 말씀은 무슨 의미입니까? 
땅은 구약의 등장하는 복음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의 약속의 핵심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자식도 없고 정착할 땅도 없었던 떠돌이 유목민 아브라함에게 자손과 땅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첫째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을 자손으로 얻었고, 둘째 그들은 또 애굽에서 탈출하여 가나안을 정착할 땅으로 얻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할 당시 모든 이들은 각 지파별로 분배되고 다시 각 가문별로 분배된 땅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이 아닌 각 집안이, 대대로 상속되고 절대 매매되거나 빼앗길 수 없이 영원히 소유하는 땅을 갖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회, 모든 구성원이 자기 집안 소유의 땅이 있고, 그래서 부족함 없는 복지를 누리게 되고, 빈곤과 박탈로 소외되어 결국은 자살 밖에는 택할 길이 없는 절망으로 내몰리는 이들이 없는 그런 이상사회를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모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도 엘리트들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그 능력을 주변국가의 엘리트들이 그러하듯 자신의 부와 권력을 축적하는 데 쓰려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열두 지파 연합체로는 불안을 달랠 수 없다며 왕을 세우고 왕국을 세웠고 중앙집권적 권력을 추구했고 이 모든 권력집중의 핵심과제를 기어코 밀어붙이고야 말았습니다. 그 과제는 바로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으므로 하나님의 토지제도를 무너뜨리고 바알의 토지제도 즉 승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는 제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땅을 소유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을 빼앗긴 채 생존을 위해 소작농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주변국가들이 그러하듯 자신들이 경작한 땅의 수확물의 7-80%를 지주들에게 빼앗긴 채 겨우 생존할 정도의 곡물만으로 살아야했고 당연히 건강도 복지도 여유나 문화도 누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흉년이나 질병을 만나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죽어가야 했습니다. 물론 지주들은 그래도 땅을 갈 기회라도 달라고 줄 선 또 다른 빈곤층이 널려 있으니 아무 걱정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도활동을 하러 나가시는 마을마다 병자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부족한 위생관념과 더불어 대대손손이 벗어날 수 없는 빈곤으로 인한 영양부족 때문이었습니다.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복수하지 않는 온유함
시 37편은 이런 불의한 일들이 일상이 된 왕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가 노래하는 이 악인은 가난한 자들을 착취하는 사악한 지주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시 37:14) 악인이 칼을 빼고 활을 당겨 가난하고(온유하고) 궁핍한 자를 엎드러뜨리며 행위가 정직한 자를 죽이고자 하나
그런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분노하고 증오합니다. 그들의 악에 대해 복수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공산혁명을 통해 부르조아지들을 숙청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고 국민들을 착취하는 새로운 지주 공산당을 탄생시켰습니다. 지배계급의 명칭만 바뀌었을 뿐 백성들을 착휘하는 구조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합니까? 7-8절입니다. 
(시 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시 37:8)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악인을 증오하고 복수하려 하지 말란 말입니다. 그 결과는 악을 징벌하려다 그 자신이 새로운 악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불의를 묵인하고 그저 견디라는 말이 아니라 분노와 복수가 아닌 공의와 사랑을 품고 악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믿고 복수가 아닌 긍휼을 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런 온유한 자들이 무슨 복을 누립니까? 땅을 차지합니다. 
(시 37:11) 그러나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시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시 37:29)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 영영히 거하리로다
온유한 자는 그러므로 ‘불의를 당할 때 증오로 복수하지 않고 믿음과 인내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수하지 않는 모세
이런 온유함의 모델로 구약에서 가장 유명한 이는 모세입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이 극찬을 들을 때는 모세가 80세가 넘은 때로 구스 여자를 아내를 맞은 일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에게 비난을 받을 때였습니다. 모세는 그들의 비난에 분노하고 되갚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로 미리암과 아론에게 진노하시고 미리암에 나병에 걸리자 모세는 오히려 미리암을 고쳐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런 모세의 모습은 40세의 그의 젊은 시절과 대조됩니다. 그는 자신의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보고 진노한 나머지 그를 돌로 쳐서 죽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분노하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요? 악한 일을 당하고는 견딜 수 없이 분노하던 모세였지만 많은 고난을 겪고 난 후 그는 악을 악으로 갚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온유함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다
그럼 이런 온유한 자들은 무슨 복을 누립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이 표현은 정확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을 분배받는 사건 때 쓰였습니다. 여호수아서 후반부는 온통 열두 지파가 땅을 기업으로 나누어 받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오늘 온유한 성도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땅을 받은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때에도 땅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란 말이요, 천국이 저희 것임이니라는 복 선언과 정확히 같은 뜻입니다. 계시록은 우리가 받을 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 주십니다.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하나님 나라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되고 그 새 땅에서 모든 온유한 성도들은 각자 기업으로 땅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우리는 이 세상의 불의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로 맞서서 땅과 그 땅의 소출을 빼앗기고 살아가는 온유한 이들, 가난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은혜로운 구원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쉬지않고 기도하게 됩니다. 공격적이고 적극적이고 내 이익을 위해 싸우는 방식으로 땅을 차지하려는 이 세상의 풍조에 맞서서 가난한 심령과 애통하는 마음과 온유한 삶의 자세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게 됩니다. 그들이 온유한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신 우리들이 이렇게 온유하게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십니다. 온유한 심령으로 불의에 맞서서 땅을 기업으로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