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 / 마 5:6

2019120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 / 마 5:6

마 5:6/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행복

191201 주일설교 산상설교5/대강절1주
배고픔
지도를 하나 보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합니다. 지금 보시는 이 지도는 무엇일까요? 알아 맞추시는 분께 점심 식사 후 디저트를 대접하겠습니다. USDA 미국농무부가 매년 업데이트해서 제공하는 이 지도는 일명 푸드데저트(Food desert) 즉 ‘음식사막’이라고 불리는 곳을 녹색으로 표시해 둔 것입니다. 음식사막이 무슨 말일까요? 미국 전역에 가득히 박혀있는 이 음식사막은 거주지에서 반경 1마일 이내에 신선한 야채와 과일을 파는 가게가 없는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아니, 이 동네들은 왜 야채와 과일을 팔지 않지? 동네주민들이 대부분 저소득층이기 때문에 그들의 작은 수입으로 당장 배를 채울 가공식품, 패스트푸드를 먼저 사먹다보니 자연스럽게 야채나 과일가게가 장사가 안 되어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선한 식품을 섭취하지 못 하다보니 영양소 결핍이나 성인병에 시달리게 됩니다. 실제 한 방송에서 리포터가 푸드데저트 지역의 초등학교에 방문하여 교실의 아이들에게 토마토를 보여주는데 아이들 중 누구도 그것이 뭔지를 모릅니다. 토마토케쳡을 만드는 재료라고 하자 그제서야 아이들이 아, 알겠다고 반응합니다. 이 동네 아이들은 토마토를 본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푸드데저트에 사는 미국인이 최대 3천 만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미국인 10명 중 한 명 꼴이고 남한 인구의 절반을 조금 넘습니다. 이것이 세계 10대 부호순위 중 8명을 보유하고 있고 세계 자원의 4분의 1을 소비하고 쓰레기의 3분의 1을 배출하는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빈부격차 현실입니다.
한국은 인구가 밀집되어 있어 식료품점이 멀어서 못 사는 푸드데저트는 없다고 합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이용할 여력이 없어서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몇 년 전에 대학생들이 과일을 못 사먹어서 비타민 부족으로 얼굴이 누렇게 뜬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시절에도 대학교, 대학원 구내식당 밥값 100원 올리는 문제로 학생들이 항의하고 대자보 붙이고 난리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시골에서 올라와 자취하는 학생들에게는 정말 현실적인 문제이지요. 그런 형편에 과일 사먹을 여유가 어디 있을까요? 저도 부모님이 고향에서 보내주시는 용돈, 아르바이트해서 번 생활비로 과일 사먹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백반 하나 시켜먹을 돈으로 라면을 끓여먹으면 3일을 살 수 있는데 젊은이들이 과일을 사먹을 여유가 있을까요?
스위스 제네바 대학교수이자 유엔식량특별조사관이기도 한 사회학자 장 지글러는 스위스 은행이 독재자와와 범죄자들의 검은 돈을 비밀리에 예치해주는 대가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사실을 고발했다가 스위스 우익으로부터 살해위협을 받고 은행으로부터 소송을 당해 파산까지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고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탐욕의 시대’ 등의 저서를 통해 제 3세계 사람들을 착취하는 다국적자본에 의해 벌어지는 사회구조적 죄를 고발하며 상황을 개선하는데 평생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10세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고 3분에 한 명씩 비타민A 결핍으로 시력을 잃고 있다. 프랑스가 생산하는 곡물만으로도 전 유럽이 먹고 살 수 있고 미국의 곡물만으로도 전 세계인이 먹고 살 수 있는 식량과잉의 시대에 굶주린 어린이의 무덤이 끊임없이 늘어나는 현실을 어떻게 제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어떻게든 세계인이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간곡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지위와 배경을 가진 성공한 지식인이 뭐가 아쉬워서 생명의 위협과 경제적 파산을 무릎 쓰며 부정과 부조리를 맞서 싸우는 것일까요? 그의 글과 삶은 지위와 풍요 그리고 성공이 채워주지 못 하는 목마름이 그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목마름은 굶어죽는 아이들이 없는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께서 팔복에서 선언하신 하나님 백성들에게 나타나는 목마름 바로 그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예수님은 팔복의 네 번째 복을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란 무엇입니까? 의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신약에 92회 등장하는데 가장 많이 용례가 공정함, 올바름이란 의미로 해석됩니다. 그러므로 의역하자면 공의에 주리고 정의에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가 됩니다.
이 의라는 단어가 산상설교 안에서 여러 번 사용됩니다. 그 중 6:33을 보십시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제자들이 먹고 마시는 것 즉 생존하고 더 풍요롭게 사는 것보다 먼저 구해야 할 대상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함께 하나님의 의를 제시하십니다. 이 구절에서 이 의란 하나님의 의이고, 하나님 나라와 함께 구해야 하는 것임이 확인됩니다. 정리하면 이 의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정함, 올바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구현되는 바른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바른 질서가 구현되기를 추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질서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정의하기를 하나님의 통치, 다스림이 있는 곳이라 하였습니다. 이 나라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사람들이 나라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올린 로마제국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 세상은 로마황제의 나라였습니다. 황제는 신으로 추앙받으며 로마제국 내 모든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채 그들을 다스렸습니다. 황제는 주라고 불렸고 또 아버지라고 불렸습니다. 마 23장을 보십시오.
(마 23: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이 구절을 사람들이 오해해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라니 기독교는 천륜을 저버리도록 가르친단 말인가 하고 하는데 여기서 땅에 있는 자는 로마황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황제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라는 말입니다. 황제의 나라에는 황제가 세운 질서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흔히 Pox Romana라고 합니다. 즉 로마의 군사력에 의해 넓은 영토가 제국으로 통일되고 모든 반란세력을 진압하여 기원후 1세기와 2세기 경 약 이백 여년간 평화가 지속된 시기를 가리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시작했다고 하여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라고도 부릅니다. 평화의 질서가 서고 풍요를 만끽한 시기입니다. 그런데 이 질서와 풍요는 황제와 지배세력의 입장에서 누리는 질서요, 풍요였습니다. 그들의 군대에 의해 짓밟힌 대부분의 제국 각지의 식민지 백성들에게 그 시기는 억압과 착취의 시대였습니다. 황제가 평화를 즐기기 위해 그들은 억압을 당해야 했고 황제가 풍요를 누리기 위해 그들은 착취를 당해야 했습니다. 로마사가들은 제국 2-3%의 지배세력을 위해 나머지 97%의 식민지 백성들은 철저하게 억압과 착취를 견뎌야만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이들이 구한 것은 황제의 나라와 황제의 질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에 반하여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질서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황제의 나라는 황제의 뜻으로 통치되는 나라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황제의 질서는 소수의 지배층을 위해 대다수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질서이지만 하나님의 질서는 모든 백성들이 부족함 없는 풍요와 복지를 누리는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 공의로운 질서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New English Bible은 이 네 번째 복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Matthew 5:6) How blest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to see right prevail, they shall be satisfied.
prevail은 안개가 쫙 깔려있는 상태를 묘사하는 동사입니다. 즉 to see right prevail, 의가 세상에 가득히 깔려 있는 것, 편만한 것을 보기를 간절히 갈망하는 이들은 복이 있다는 뜻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들의 갈망을 ‘주리고 목마르다’라고 표현한 것에는 중의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그들은 정의를 갈망하는 이들이기도 하지만 그 정의가 곧 실제로 주리고 목마른 이들을 먹이고 마시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에 5초에 한 명씩 굶어서 세상을 떠나는 저 아이들이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굶어죽는 아이를 제 손으로 묻어야 하는 아버지, 어머니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야채와 과일을 못 먹어서 비타민A 결핍으로 시력을 잃는 아이들이 더 이상 없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굶어죽든말든, 그들이 시력을 잃든말든 가난은 자기들이 게을러서 그렇다는 황제가 아닌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늘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공의롭고 자비로운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며 공의의 질서가 온 세상에 가득히 편만하기를 갈망하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공의롭고 평등한 세상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배를 부르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본문에서 배부를 것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르타조는 허기를 면하는 정도가 아니라 넘치도록 포식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미래형입니다. 넘치도록 배부른 일이 장차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어설프게 이루어지다가 마는 정의가 아니라 모든 박해받는 의인들이 위로를 얻고 모든 불의한 악인들이 대가를 치르는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공의롭고 완전한 심판에는 그 어떤 의인도 더 이상 불만이 남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악인도 어떤 핑계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늘이 땅과 완전히 결합되어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땅에서도 완전히 이루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갈망이 채워질 이 날을 바라보며 오늘도 불의와 싸우는 것입니다.
장 지글러는 그의 책에서 희망은 서서히 변화하는 공공의식에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 문제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데 희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만 좀 더 거대한 진실이 있습니다. 희망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에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희망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는 그 희망이 얼마나 실제적인가를 확신합니다. 그 구원역사를 믿고 기대하고 기다리며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 분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하는 이들의 의식이 변화하는 것은 분명 희망이 맞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편만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갈망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로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들어보십시오.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먹고 마셔도 금방 배고프고 목마른 허탄한 것들이 아니라 영원히 배부르고 시원케하는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이들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