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08 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 마 5:7

20191208 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 마 5:7

마 5:7/긍휼히 여기는 자의 행복

191208 주일설교 산상설교6/대강절2주
바베트의 만찬
영화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인 인기를 끈 소설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인 이자크 디네센이 쓴 다른 소설로, 역시 영화화되어 많은 팬을 가진 ‘바베트의 만찬’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때는 지난 세기 초, 덴마트의 작고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유일한 목사였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결혼도 마다한 채 마을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천직으로 여기며사는 아름다운 두 자매 마르티나와 필리파가 있습니다. 두 자매는 신앙과 봉사에 헌신하지만 온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던 아버지 생전과 달리 마을 사람들은 서로 다투고 시기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던 중 이 자매의 집에 파리에서 왔다는 바베트란 여인이 찾아옵니다. 그녀는 프랑스 내전으로 남편과 아이를 잃고 갈 곳이 없다며 이 자매의 집에서 거처하는 가정부가 되기로 합니다. 14년이 흐른 어느 날 바베트는 파리의 친구를 통해 산 복권이 당첨되어 1만 프랑이라는 거금을 받습니다. 모두들 부자가 된 그녀가 마을을 떠나리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자매에게 돌아가신 목사님의 탄생 100주년 만찬을 자신이 준비하고 싶다고 부탁합니다. 파리로 떠난 그녀는 얼마 후 살아있는 거북이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이 생전 처음보는 재료들을 잔뜩 실은 마차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만찬 날 저녁 마을 사람들 모두가 태어나 처음보는 화려한 접시에 담긴 에피타이저와 스프, 메인 요리와 고급 포도주에 눈이 휘둥그래진 것은 물론 그 오묘한 맛을 보고 입이 딱 벌어집니다. 자매 중 언니 마르티나를 사랑했으나 그 사랑을 이루지 못 한 채 파리로 떠나 장군이 된 로렌스는 숙모네에 왔다가 이 만찬에 참석하고는 역시 깜짝 놀랍니다. ‘이런 만찬은 파리에서도 가장 유명한 까페 엉글레가 아니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급식사입니다. 어떻게 이런 시골에서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믿어지지 않습니다.’ 음식을 먹는 내내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더니 급기야는 모두 감격한 나머지 서로 질시하고 다투던 사람들이 마을 우물을 둘러싸고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고 춤까지 춥니다. 마을사람들이 화해하는 것을 보고 감격한 자매는 바베트에게 파리로 돌아가더라도 이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고 합니다. ‘전 파리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요? 부자가 되었잖아요.’ ‘그 돈은 만찬준비에 다 썼어요.’ ‘네,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한 끼 식사에 다 써요?’ ‘1만 프랑은 까페 엉글레에서 12사람의 저녁식사값 밖에는 안 된답니다. 그 까페 엉글레의 주방장이 바로 저였어요.’ 두 자매는 바베트를 안고 고마움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소설이 끝납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현실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가끔 만납니다. 2015년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사는 퀸 듀안은 결혼식 5일 전 피앙새로부터 파혼통보를 받습니다. 충격을 받은 퀸은 그러나 자기연민에 빠져있는 대신 고난 중에 있는 이웃에게 긍휼의 시선을 돌려 한 가지 결심을 합니다. 4성급 호텔에 예약해둔 35,000불 짜리 피로연을 취소하는 대신 지역의 노숙자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대접하기로 한 것입니다. 결혼식이 열리기로 했던 날 소식을 들은 120여 명의 노숙자들이 홀을 가득 메운 가운데 연어와 스테이크 등 고급요리들이 서빙되었습니다. 다섯 아이와 함께 식사를 한 어느 부부는 직장을 잃고 하루아침에 노숙자로 전락한 후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못 먹는 날이 많았다며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으니 힘을 내어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겠다며 퀸의 가족들에게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차가운 겨울의 냉기를 몰아내어주는 벽난로처럼 이 세상을 훈훈하게 덥혀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긍휼입니다. 차갑고 냉랭한 이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긍휼의 벽난로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팔복 중 다섯 번째 복을 이렇게 선언해 주셨습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이라는 헬라어는 엘레몬입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헤세드가 긍휼로 번역됩니다. 긍휼이란 상대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껴 행동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긍휼이란 연약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말합니다. 
(출 34: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시 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서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 덕분에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살고 구원받고 복을 누립니다. 
(롬 9:16) 그런즉 (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은 이런 당신의 성품이 당신의 긍휼을 입은 자녀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기를 원하십니다. 어디서 누구를 향해 나타나야 할까요? 
 
고난에 희생당한 자들
첫째는 고난을 당한 자를 향한 것입니다. 예나지금이나 가장 흔한 고난이 무엇일까요? 바로 가난입니다. 가난은 불의한 구조에 의해 그들의 일한 권리 혹은 복지를 누릴 권리를 빼앗긴 상태를 말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은 인류에게 복을 주셨는데 그 복 안에 에덴동산을 관리할 사명과 에덴동산의 모든 나무의 열매로 배불리 먹을 권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할 권리와 복지를 누릴 권리입니다. 천부인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침범하는 마귀의 악은 인류에게서 이 권리를 빼앗아 갑니다. 그 결과 가난이라는 고난을 겪게 됩니다. 
역겨운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샌프란시스코에는 똥 탐색대가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이들은 도시 전역에서 발견되는 인분을 치우는 사람들입니다. 발견한 곳을 표시한 똥 지도도 있습니다. 2011년부터 매년 그 발견횟수가 엄청난 비율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LA는 쥐군단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온갖 전염병도 돌고 있고 전문가들은 콜레라와 나병도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노숙자들의 증가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는 2017년 대비 30%의 노숙자가 증가해서 점점 더 늘어나고 있고 엘에이는 6만 명을 넘어서서 역시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노숙자는 왜 이렇게 빨리 늘어날까요? 집값 상승 때문입니다. 이는 물가상승을 가져오고 최저임금을 아무리 올려도 생활비는 점점 늘고 집구입은커녕 렌트비도 못 내는 상황으로 몰립니다. 이런 상황에서 직장을 잃으면 바로 노숙자로 전락하고 심지어 직장을 가져도 노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추락합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보다 특별히 게으르거나 뭘 잘 못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못지않게 성실하고 정직하고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예일대 졸업생까지 한순간에 노숙자가 되었다는 기사도 있습니다. 땅값을 올려서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가 되는 불의한 구조에서 희생된, 고난당하는 이웃일 뿐입니다. 샌스프란시스코의 지역사무소장 제이미 알만자는 지난 8월에 한 토론회에 나와서 1명이 집을 사는 동안 3명이 노숙자로 전락한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불의한 구조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바로 그런 고난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해 성도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이 긍휼입니다. 잠언을 보십시오. 
(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예수님은 이런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마 15:3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가라사대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이 가난에서 질병과 고독과 절망과 불화와 중독과 여러 가지 다른 고난들이 뒤따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셨습니다. 
(마 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는 이 사회의 빈자들을 향한 기도를 멈추면 안 되고 그들을 돕기 위한 행동을 멈추면 안 됩니다. 교회는 빈자들을 향한 긍휼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사회에 일깨워주는 공동체여야만 합니다. 
 
죄악에 희생당한 자들
둘째로 긍휼은 죄의 그물에 걸린 자들을 향한 것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던져 물고기를 잡듯, 거미가 거미줄을 쳐서 먹이를 잡듯 마귀는 유혹의 그물을 던져 사람들을 잡아 죄의 노예가 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향해 긍휼을 품으셨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마 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요 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호 6:6) 나는 인애(긍휼)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교회는 이런 죄인들을 향한 긍휼을 품은 공동체여야만 합니다. 교회는 먼저 긍휼을 입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의인이기 때문에 교회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입었기 때문에 성도라 불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처럼 그 긍휼을 입지 못 하고 있는 이들을 향하여 긍휼을 품어야 합니다. 교회가 죄인들을 향해 분노와 멸시를 품고 심지어 증오심을 쏟아놓는 것은 자신들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렸듯 긍휼이 아니면 감히 주님을 볼 자격도 없는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에 다른 이들을 겁도없이 정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이렇게 고난당하는 자들과 죄악에 희생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장차 미래에 받게 된다는 의미로 미래형 신적 수동태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아 은혜의 구원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미 긍휼을 입어 긍휼을 베풀 수 있게 된 자요, 더 나아가 영원한 긍휼까지 입게 될 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복을 이미 누리고 있고 또 누릴 자입니까? 정말 복이 있는 자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이런 복을 누리는 자인 줄 믿습니다. 
지난 9월에 충격적인 사건 하나가 언론에 보도되었습니다. 텍사스주 달라스의 백인 여경관 가이거는 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남자친구와 문자를 주고받다가 3층인 자신의 아파트 층수를 착각하고 4층에 내려서 자신의 집에 침입한 강도인 줄 알고 그 집주인을 총으로 쏴죽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피해자였던 회계사 보탐 진이 아프리칸 어메리칸인 데다가 경관의 휴대전화에서 인종차별적인 문자가 다수 발견되면서 인종범죄로 알려져 큰 비난여론이 일었습니다. 게다가 형량이 예상보다 낮은 10년으로 선고되자 법정 안팎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검찰은 28년형을 구형한 데다 전날 배심원단이 유죄 평결을 내리면서 최대 99년형이 가능해진 상황이어서 분노에 찬 시민들은 더 무거운 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 때 증인석에 앉아있던 피해자의 동생 브랜트 진이 입을 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감옥에 가거나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을 축복하고 싶고 그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던 형이 원하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브랜트는 자신이 그를 한번 안아줄 수 있겠느냐고 판사에게 물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동생은 법정 한 가운데서 한참을 포옹한 채 흐느끼며 대화를 주고받았고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던 법정도 어느 새 흐느낌과 오열로 가득 찼습니다. 분노와 증오가 지배하던 세상 한 구석을 긍휼과 자비가 점령한 것입니다. 마귀가 깃발을 꽂았던 진지에 하나님 나라의 나팔소리가 울려서 돌맹이가 잔잔한 호수에 일으킨 물결처럼 온 세상으로 퍼져갔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진정한 능력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이런 긍휼로 세상을 섬기는 자들은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이고 또 영원한 긍휼을 입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 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