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15 마음이 청결한 자의 행복 / 마 5:8

20191215 마음이 청결한 자의 행복 / 마 5:8

마 5:8/마음이 청결한 자의 행복

191215 주일설교 산상설교7/대강절3주
서시
오늘 설교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독립운동혐의로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고문을 받고 27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 윤동주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첫 장에 실린 시입니다. 이 시는 원래 제목이 없이 실렸는데 가장 앞에 실렸다고 하여 차례 서자를 써서 서시라고 부릅니다.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에게 독실한 기독교 신앙교육을 받고 자란 윤동주의 시에는 식민지의 암울한 시절을 견뎌야 했던 지식인의 고뇌와 함께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성찰의식이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먼저 식민지 시절을 견디는 지식인의 고뇌를 잘 드러낸 시로 1940년에 쓴 ‘팔복’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X8)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얼마나 깊은 좌절 속에 살아야 했는지 절절히 느낄 수 있지 않습니까. 한편 이 서시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의 자기성찰의식이 묻어 나옵니다. 결코 그 누구를 향해서든 비방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하는 윤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의 바람을 성경구절로 표현해 보라면 아마도 오늘 본문보다 더 적절한 구절이 있을까 의심됩니다.
(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 구절은 팔복 중 여섯 번째 복을 소개합니다. 청결한 마음이란 윤동주가 바랐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을 가진 이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로도 어렴풋이 본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의문이 여전히 좀 남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입니까? 청결한 마음이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다는 것도 비유라 모호하지 않습니까? 
 
예배 속에서 보다 
앞선 다른 복들을 묵상할 때마다 예수님이 구약의 어느 구절을 염두에 두시고 각각의 복을 선언하셨다는 것을 확인했었지요. 이 구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구절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시 24편입니다. 
(시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시 24: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 시 속에 여섯 째복이 들어있습니다. 4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5절 복이 있나니, 3절 여호와의 산에 올라서 그 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산은 시온산을 말합니다. 시온산에 무엇이 있습니까? 바로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산에 오른다는 말은 곧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곧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예배자가 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전에 와서 마당만 밟고 가는 사람입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은 실제로 마당만 밟고 갔습니다. 성전 안 성소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성소 너머의 지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그 길이 열린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님을 모시고 지성소 깊은 곳으로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즉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고 대면하는 예배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하지 못 한 이들은 이런 예배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예배당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 같지만 어떤 이들은 지성소 깊은 곳까지 들어가 하나님을 보고 그 분의 음성을 듣고 속사람이 살아나는 산예배를 드립니다. 어떤 이들은 성전 마당에 서서 감히 성소로 들어가지 못 합니다. 아니,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의 찬양은 형식입니다. 그들의 예물은 의무입니다. 그런 이들은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지만 마음은 자기를 예배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이는 성령님께서 그를 지성소로 인도하십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기쁨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그 앞에 무릎 꿇으며 하나님께 진정으로 사랑의 헌신을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하나님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참으로 보는 예배를 드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영원 속에서 보다
동시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종말론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즉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 날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지금은 영이신 하나님을 육에 속한 우리가 온전히 볼 수 없지만 그 날에는 우리도 온전히 영에 속해서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볼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육체가 없이 영혼만 남아 하나님을 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활한 우리의 육체가 죄와 같은 장애물이 없이 하나님과 같이 온전히 거룩한 존재가 되어 완전히 열린 눈으로 그 분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의 글을 보십시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계신 모습 그대로 보고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때 일어나는 일은 성도들이 그 분과 같아진다는 말입니다. 육체가 없이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부활한 육체를 입지만 하나님과 같은 수준의 거룩함과 정결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비전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행복인가요! 이런 복을 누리는 이는 바로 마음이 청결한 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모두 한 분도 빠짐없이 완전하신 하나님처럼 되어 하나님을 보시는 구원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더럽혀지지 않은 마음
누가 이런 복을 누린다고요? 바로 마음이 청결한 이입니다. 그럼 그 마음의 청결이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청결이란 더럽혀지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본문에서 청결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카타로스의 용법을 보십시오. 마태복음 27장입니다.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카타로스) 세마포로 싸서
세마포 천이 정하다고 할 때 같은 단어 카타로스가 쓰입니다. 이 때 카타로스의 뜻은 더럽혀지지 않아서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먼지, 때, 얼룩, 흙, 땀 등이 묻지 않은 상태의 세마포가 정한 즉 청결한 상태입니다. 세탁소에서 막 드라이크리닝을 마친 옷에는 더러운 것이 묻어있지 않지요. 그런 것이 정한 상태, 청결한 상태입니다. 세탁한 옷처럼 더러운 것들이 묻어있지 않은 마음이 청결합니다. 우리 마음을 더럽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막 7: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 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막 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우리 마음 속에서 솟구쳐나오는 온갖 더러운 생각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혀서 카타로스, 정한 마음, 청결한 마음이 되지 못 하도록 만듭니다. 이런 것들이 가득한 우리의 마음은 청결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지요. 그럼 과연 이런 우리의 마음이 어떻게 청결해질 수 있을까요? 과연 가능이나 할까요? 
 
섞이지 않은 마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청결의 또 하나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둘째 청결이란 섞이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계 21장에도 카타로스가 쓰입니다. 
(계 21:21) 그 열 두 문은 열 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카타로스)이더라.
정금이란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금을 말합니다. 정금을 만드는 과정은 용광로에서 불순물을 지속적으로 제거하는 것입니다.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맑은 유리 같은 정결한 금, 카타로스한 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다른 것들이 섞여있지 않나요? 가장 많이 섞여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6: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정금과 같이 욕심과 섞이지 않았을 때 그것이 청결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이라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으며 하나님과 같이 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죽었다 깨어난들 우리의 죄악으로 더럽혀지고 욕심으로 섞인 마음이 청결해질 수 있을까요? 답은 바로 죽었다 깨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복의 선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 선언이 도덕책에 쓰여서 이렇게 청결해지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면 우리의 항아리에는 절망 외에는 남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선언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은 우리를 당신처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교활한 독사같은 우리를 양처럼 순결하게 재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은 성령님으로 불가능한 구원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놀라운 약속을 베드로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주십니다. 
(막 10: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막 10:27)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저와 여러분의 더러운 마음을 청결한 마음으로 재창조하시어 하나님을 보게 하실 우리 주님만 전심으로 의지하시는 이 성탄의 계절이 되기시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