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3:6-9/문명의 미래
200329 주일설교 코로나사태3
인류는 진보하는가
캐나다 금광재벌 피터 멍크가 세운 오리에재단에서 2008년부터 연 2회 세계적 석학들을 불러 당대의 이슈들을 놓고 벌이는 토론의 장이 있습니다. 멍크디베이트라고 불리는 이 토론이 2015년 11월에도 열렸는데 그 주제가 ‘Do humankind’s best days lie ahead? : 인류는 진보하는가’였습니다. 인류가 진보한다는 주제의 찬성 쪽에는 과학자 스티븐 핑커, 저널리스트 매트 리드리가 섰고 낙관하기 힘들다는 반대 쪽에는 철학자 알랭 드 보통과 작가 말콤 글래드웰이 자리했습니다. 찬성 쪽 토론자들이 근거는 통계수치입니다. 평균수명, 보건, 절대빈곤, 평화, 안전, 자유, 지식, 인권, 성평등, 지능 등 10개 항목에서 통계는 분명 인류의 삶이 더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반대 쪽 토론자들의 근거는 직관과 통찰입니다. 과거에 좋았기에 미래도 좋을 것이라는 낙관하는 것은 사고의 오류이고 인류는 인간성의 불완전함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 했기에 퇴보하는 미래를 맞이할 가능성은 도처에 널려있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핵전쟁과 환경파괴, 기후변화, 자연재해, 각종 바이러스의 창궐 등 언제라도 인류의 삶을 몇 십년 심지어 몇 백년 퇴보시킬 수 있는 시한폭탄을 안고 인류는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토론은 사피엔스의 미래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인류의 현 위치와 전망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우리 한인들만해도 한 세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에 진보한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반면 코로나 사태를 겪고 있노라면 언제라도 이런 진보는 무너지는 모래성이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 성경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계시해 주실까요? 우리 생각도 중요하고 석학들의 주장도 좋습니다만은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의 계시를 듣지 않을 수 없겠지요.’
열매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
오늘 본문은 2주전 설교본문에 이어집니다. 그 때 우리는 총독 빌라도의 갈릴리 순례자 학살사건과 실로암 망대 붕괴로 인한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의 대화를 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재앙이 누구의 죄인지 알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그 재앙을 통해 타인의 죄를 보지말고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를 덧붙이십니다. 비유의 내용은 열매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의 운명입니다. 6절입니다.
(눅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비유에서 무화과나무를 심은 이는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이스라엘 민족을 상징하였습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이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심겼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를 심어야지 왜 무화과나무를 심었을까요? 어느 주석을 보니 지력을 보완하기 위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기도 한답니다. 한가지 작물농사만 계속하면 땅이 산성화되기에 다른 작물을 교차재배한다는 것입니다. 지중해 연안국가 최고의 작물은 뭐니뭐니해도 포도입니다. 이 말은 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가 아닌데도 포도나무가 자랄 자리에 심기는 특권을 누린 것입니다. 이 점은 노예였으나 해방되고 약속의 땅에까지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이 잘 어울립니다. 또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교회에 부름받은 우리들의 상황과도 들어맞습니다. 즉 이스라엘도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도 없이 하나님의 포도원에 들어온 무화과나무와 같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무화과나무가 심은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전혀 맺지 못 한단 것입니다. 7절입니다.
(눅 13:7) 과수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이집트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은 해방되어 자유인이 되고 가나안땅을 허락받고 은혜의 진리 율법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떠나 부패하고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의 법으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고 퍼뜨리는 막중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의 법이 아닌 탐욕과 교만으로 세워진 이방제국들을 좇아가기 시작합니다. 선지자들을 보내 회개를 촉구하고 또 경고하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이 이 약속의 땅을 버리는 열매맺지 못 하는 무화과와 같다고 생각하십니다.
유예된 심판
주인의 말을 들은 과수원지기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8절입니다.
(눅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눅 13: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과수원지기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주님은 당신의 사역을 통해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한번 더 회개를 촉구할터이니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십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맺지 못 한 3년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공생애 3년과 겹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보며 하나님이 느끼시는 답답함과 애통함을 당신도 느끼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답답하셨으면 여러 번 탄식하시고 예루살렘을 보며 울기까지 하셨습니다.
(눅 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눅 19: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눅 19:42)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그리고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께 이런 이스라엘일지라도 한 번만 더 복음을 전할 기회 그래서 그들이 회개할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굶주리던 거리의 부랑아가 자녀가 없던 재벌가의 상속인이 된 것입니다. 회장은 그에게 탁월한 개인교사를 붙여 거대한 기업을 이끌 수 있도록 공부를 하고 지도력을 훈련시키고 권한을 부여하여 수많은 직원들을 책임지는 리더로 키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그가 여전히 부랑아 시절의 행동거지를 버리지 않고 게으르고 이기적이고 속이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이제는 재벌의 상속인이라고 거만하고 교만하기까지 한 삶만 살아갑니다. 그를 데려온 회장이 더 이상 그를 기다려주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방탕함은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회사에 속한 수많은 직원과 기업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이사회를 열어 그를 후계자의 자리에서 다시 내리려 하자 그 철부지를 긍휼히 여긴 개인교사가 회장에게 사정하여 1년 만 더 기회를 주면 어떻게든 그를 자격있는 리더로 만들어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부랑아처럼 이스라엘은 이제 마지막 은혜의 유예기간 grace period를 얻은 것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못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은 열매맺지 못 하는 무화과나무가 잘려나가듯 불의한 삶에 대한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재앙을 만난 사람들 개개인의 회개촉구가 민족의 회개촉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낙관하는 사람들
이제 처음 드렸던 질문으로 돌아가봅시다. 인류는 과연 진보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은 앞으로 계속 더 나아질까요, 아니면 어려워질까요? 코로나 사태 후 인류는 고속도로에 다시 올라탈 수 있을까요, 아니면 거친 비포장도로에서 헤매게 될까요?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던 서구문명의 영광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과연 어디까지 지속되고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까요?
멍크디베이트는 토론 전후에 관객들의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토론 전 관객의 71%가 진보한다에 찬성을, 29%가 반대를 표했는데 후에는 73%가 찬성을, 27%가 반대를 표하여 진보에 찬성한다는 의견이 2:1 이상의 비율로 높았고 토론을 통해 찬성의견이 조금 더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분명 2015년 서구인들은 인류의 미래에 대체적으로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문맹율, 빈곤율은 떨어지고 보건의료, 평균수명, 인권, 자유, 성평등 상황은 나아지고 세계경제는 부침을 겪지만 어떻든 성장하고 있다는 통계를 들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그 때 문득 성경에도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낙관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눅 12: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 (눅 12:19) 또 내(부자)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눅 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사도 바울의 경고입니다.
(살전 5:2) 주의 날이 밤에 도적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살전 5: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이들은 모두 그들의 미래를 낙관하고 있던 이들이지만 순식간에 멸망이 찾아올 것을 예측하지 못 했습니다. 서구문명과 인류의 미래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
신대원 시절 캄보디아에 견습선교사로 사역하던 중 휴가로 앙코르왓이라는 거대한 유적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대한 밀림 속에 곳곳에 이집트 피라미드를 능가하는 웅장한 고대도시, 사원들이 흩어져있어서 엄청난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세계적 관광지입니다. 9세기에 건설되어 15세기까지 600년 이상 지속된 이 화려한 문명의 멸망은 오랫동안 수수께끼로 남아있었는데 전쟁과 과도한 토지사용 혹은 긴 가뭄이 그 원인으로 꼽힙니다. 전 세계 곳곳에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문명들, 왕국들 그리고 제국들이 널려 있습니다. 성경도 이런 예를 얼마나 많이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기원전 8세기 북왕국의 여로보암2세 때는 북이스라엘의 황금기로 평가됩니다. 강력한 군사력으로 솔로몬왕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회복하고 중계무역을 통해 축척된 엄청난 부로 지배계층은 상아침대에 누워 온갖 향락을 즐겼다고 아모스서는 묘사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때는 우상숭배가 극에 달하고 빈부격차가 최고로 심각한 시대로 평가됩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왕국의 그 영화는 그러나 채 반세기가 지나지 않아 앗수르에 의한 왕국의 멸망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지배층은 로마제국의 비호 아래 극도의 부귀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들이 추진한 거대한 토목공사는 모두의 탄성을 자아내기 충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막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가로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지금도 성지순례를 가면 볼 수 있는 헤롯 성전을 건축하는데 사용된 돌이 얼마나 대단하던지 평균 2-5톤짜리였고 게중에는 하나에 400톤짜리도 있어서 오늘날에도 고대 불가사의한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눈에 보이는 영광과 화려함에 현혹되지 않으십니다.
(막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실제 그 화려하던 거대한 건축물 역시 채 반세기가 지나지않은 AD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한쪽 벽 토대만 겨우 남아 당시의 영광을 떠올리게 해줄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바로 이런 심판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자부심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경고입니다. 엄청난 풍요를 누리지만 주님의 뜻을 행하는데는 관심이 없고 회개의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은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개개인과 교회와 미국과 서구문명과 그리고 인류에게 주는 경고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이 배우고 많이 소유하고 많이 누립니까! 교회는 큰 건물과 화려한 예배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자랑합니다. 미국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불리는 패권국가입니다.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롭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부강합니다. 그런데 겨우 변이된 감기바이러스 하나로 일상이 무너지고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우울한 미래의 전망이 쏟아져 나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 창업자 빌 게이츠는 인류의 진보가능성을 주제로 멍크디베이트가 열렸던 2015년 테드스피치에 나서서 핵전쟁보다 미래에 더 인류를 위협할 것은 바로 바이러스의 위협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실제로 1, 2차 대전을 통해 사망한 이가 도합 8,500만 명이지만 1918년 스페인 독감창궐 하나의 사건으로만 최소 5천만에서 1억명이 죽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만약 코로나와 같이 전염성이 강하면서도 그보다 더 파괴력이 큰 바이러스가 인류에게 들이닥친다면 과연 인류의 삶이 지금과 같을 수 있을까요?
창세기의 노아의 홍수와 바벨탑 사건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아무리 강성해서 온 땅을 차지하고 하늘에 닿는 탑을 쌓아올려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문명은 결국 멸망하고야 말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과학과 의학과 기술이 발달하고 평균수명과 건강상태가 좋아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개인과 공동체는 결국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광풍을 안전하게 통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광풍을 경고로 받아들이고 잎사귀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형식 뿐이 신앙인이 아닌지 우리를 돌아보고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목을 숙이고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코로나의 광풍을 통과하는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