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12 평강을 주시는 부활 / 요 20:19~23

20200412 평강을 주시는 부활 / 요 20:19~23

요 20:19-23/평강을 주시는 부활

200412 부활주일/코로나5
갇혀있는 사람들
할렐루야,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기쁨이 코로나로 고통받는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오늘은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기뻐하며 기념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올 해 부활주일은 코로나 사태로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운 가운데 맞이합니다. 코로나 사태로 모두들 집 밖도 나서지 못 한 채 예배도 집에서 온라인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19절 전반부입니다. 
(요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다른 것이 있다면 본문의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위협이 두려워 문을 잠그고 숨어 있다면 우리는 코로나의 위협을 피해 집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광풍이 전 세계에 불고 있습니다. 170만 명이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지금도 그 수는 계속 늘고 있습니다. 거의 감염자 세 명 중 한 명이 미국에서 나오고 있고 미국 감염자 중 거의 절반이 뉴욕, 뉴저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모두가 두려워 집밖으로 나오지도 못 하고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누가 찾아오십니까?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29절 후반부입니다. 
(요 20:19) …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강의 인사를 하십니다. 헬라어 에이레네로 번역된 이 표현은 우리말로 치면 만나면 으레 하는 안녕들하세요 하는 일반적인 인사입니다. 다른 기사라면 당연히 별 의미를 갖지않기에 생략되었을 이 첫 인사를 이 본문은 일부러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21절에서 다시한번 이 인사를 반복함으로써 이 말이 일상적 인사보다 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예의상 묻는 평안이 아니라 결코 평안 못 한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평안이 필요하며 그 평안을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21절입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두려움의 이유
이 두 구절은 제자들에게 평강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잡아서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유대교 지도자들이 그 제자들마저 잡아들여 하나님 나라 운동의 씨를 말리려 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시나리오입니다. 제자들은 실재 하는 위협 앞에서 두려워 떨며 문을 걸어잠그고 숨어서 떨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재하는 외부의 위협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평강이 없는 이유는 이것만으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이유를 본문 19절 전반부가 이렇게 보여줍니다. 
(요 20:19)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그 때가 안식 후 첫날 저녁입니다. 안식 후 첫날은 무슨 날입니까? 바로 무덤에 묻히셨던 주님이 부활하신 날입니다. 20장 1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 20: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 날 새벽에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이 무덤이 빈 것을 보았고 그 중에 일부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고 그들이 전해준 이야기를 이 제자들은 들었습니다. 만약 제자들이 이 첫 증인들의 말을 믿었다면 그 첫날 저녁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문을 잡그고 떨고 있을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흥분 속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어야 마땅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여전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까? 20:9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요 20:9) (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예수님은 이미 세 차례나 제자들에게 당신의 부활을 자세히 일러주셨지만 그들은 깨닫지도 믿지도 못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던 이유를 발견합니다. 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위협이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깨닫지 못 하는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당연히 누렸어야할 평강과 감사와 감격을 지금 누리지 못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오셔서 그들이 누렸어야 마땅할 평강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평강의 비밀
그 평강을 주시는 방법은 바로 주님의 부활을 확신시키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요 20: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는 못자국과 창자국이 나있습니다. 너무 놀라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었다는 것을 믿지 못 하는 제자들에게 십자가 형벌의 증거를 보여주셨습니다. 고난의 증거이자, 부활의 증거입니다. 이 증거 앞에 제자들의 불신앙은 깨졌고 평강을 넘어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참된 평강과 기쁨을 주십니다. 부활은 죽음으로 대표되는 모든 인생의 절망과 두려움을 깨뜨리는 결정적 승리입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 아닌가요? 건강을 잃을까, 돈을 잃을까, 사랑을 잃을까 두려워하지만 생명을 잃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생명을 우리가 다시 찾을 수 있다면 그것도 이전과 같지않은 강하고 아름답고 조화롭고 영광스러운 새 육체와 생명으로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할까요? 그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이 부활의 소망이 진실됨을 예수님은 당신이 먼저 직접 부활하심으로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기쁨으로 충만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평강과 기쁨을 회복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의 위협은 항상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유대인들이 위협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코로나가 위협이 됩니다. 코로나를 극복하더라도 새로운 위협은 항상 있습니다. 실직, 경제적 어려움, 건강, 가족, 자녀, 신분 등 항상 새로운 문제가 돌아가며 우리를 위협합니다. 이런 위협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평강을 지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 부활의 소망 궁극적인 승리의 약속을 굳게 붙들 때에 가능합니다. 
이 소망이 없는 한 우리가 찾는 해결책은 모두 진통제처럼 통증만 한시적으로 완화시키는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돈을 벌면 가난할 때 괴로움은 지나가지만 돈을 지키기 위한 긴장, 그 돈을 다시 잃을까 두려움, 돈에 집착하느라 잃는 소중한 것들은 새로운 대가로 지불해야 합니다. 병을 고치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데가 아프고 노화하고 결국 죽음이라는 병을 피하지는 못 합니다. 성공하고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누리면 좋은 일이겠으나 다 여름날 들꽃처럼 금방 시들어버리는 영광일 뿐 계절이 바뀌듯 인생의 영광도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일 뿐입니다. 부활의 소망처럼 참되고 영원하고 사라지지 않는 소망, 절망적 인생의 궁극적 해결책이 되는 소망이 어디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에게 이 소망을 주심으로 우리를 참된 평강과 기쁨으로 인도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 소망을 굳게 붙드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사명의 비밀
이렇게 평강과 기쁨을 회복한 공동체라야 비로소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평강과 기쁨을 회복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무엇을 주십니까? 사명을 주십니다. 21절 후반부입니다. 
(요 20: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병든 사람은 제 한 몸 추스리기도 힘들어 일을 할 생각을 하지 못 합니다. 반면 건강한 사람은 무엇이든 나가서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힘이 센 사람은 더 많은 일을 거뜬히 해낼 수 있습니다. 
평강과 기쁨으로 영적 건강을 회복한 제자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고 감당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사명의 자리로 보내십니다. 그 사명은 이전의 제자들처럼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는 세상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주시는 평강과 기쁨과 생명과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제자들에게 영적 건강 더나아가 영적 파워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22절입니다. 
(요 20: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성령님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십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죄를 사하는 능력입니다. 23절입니다. 
(요 20: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가까이는 초대교회가 복음을 전하여 믿음을 갖게 된 자들에게 물세례를 베풀 때 그들의 죄가 씻김받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는 이 세상의 모든 고난의 원인인 죄를 해결하는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고난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구원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더 많은 경찰을 고용해서 강도, 사기꾼, 절도범을 잡아들이면 됩니까? 그런 독버섯은 부패한 사회와 불의한 사회구조, 더 강력한 권력을 가진 불의한 정치인이라는 토양이 없이는 결코 자라지 못 합니다. 그럼 선하고 강력한 정치인이나 사회개혁가가 배출되면 될까요? 선한 의도를 가진 수많은 정치인과 개혁가들이 부패한 정치판 안에 들어가 그들과 동화되거나 아무 것도 하지 못 한 채 도태되는 일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목격합니까! 그런 부패한 정치집단과 불의한 사회구조는 왜 생겨납니까? 그것을 용인하고 배출하는 대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 대중들의 생각과 사상, 태도와 의식을 계몽하는 걸출한 철학가가 태어나면 될까요? 그런 철학가들의 사상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그것은 인류역사 이래 성장해 온 사상의 토양 위에서 태어납니다. 그 사상이란 결국 인간 개개인의 생각과 욕망의 총합입니다. 이 말은 결국 인류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본성의 악함을 고치지 못 하고서는 어떤 제도도, 사상가도, 정치인도, 경찰력도 세상을 고치는 데 무기력할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루는 것은 진통제로 고통을 완화하는 것일 뿐 근복적인 문제의 뿌리를 뽑고 세상을 치유하지 못 한다는 말입니다. 
그럼 무엇만이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변화시키고 고칠 수 있습니까? 바로 진리의 말씀 성경과 교회와 성령님을 통해 세상을 고치시는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일어나신 주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고난과 절망도 결국 그처럼 깨지고 무너지고 굴복하고야 말리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믿음 위에 서서 세상을 치유하는 사명을 감당하도록 보냄을 받은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위대한 무기를 두 손에 들고 있습니다. 바로 부활신앙과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세상을 치유하도록 평강과 기쁨을 선물받고 보냄을 받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영혼은 굳게 닫힌 불신앙과 두려움의 무덤에 갇혀있지 않으신지요?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으로 충만하여 무덤의 문을 열고 나와 세상을 치유하는 성령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