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6 완전한 사람 / 마 5:43~48

20200426 완전한 사람 / 마 5:43~48

마 5:43-48/완전한 사람

200426 주일설교/산상설교
Let it go
2007년 한국에서 밀양이라는 영화가 개봉되어 기독교계 뿐 아니라 한국사회에 큰 화제를 몰고왔습니다.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돈을 노린 납치범에게 하나 뿐인 어린 아들을 잃은 싱글맘 신애는 상실감과 분노를 견딜 수 없어 삶이 무너집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신앙과 교우들의 위로로 마음의 평화를 많이 찾았다 생각하고 감옥에 갖힌 납치범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그녀 앞에 나타난 납치범은 그녀의 예상과 달리 감옥에서 하나님을 만나 회개하고 평화를 찾았다며 신애도 마음의 평화를 찾기 원한다고 밝은 얼굴을 말합니다. 그녀 앞에서 빌며 용서를 구하는 납치범의 모습을 기대했던 신애는 충격을 받아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자기가 어떻게 용서를 받았냐’며 오열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이 납니다. 
영화개봉 후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습니다. 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용서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관해 고민거리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스탠퍼드대학 심리학 교수인 프레드 러스킨은 가족보다 더 사랑했던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절교를 하고 결혼식에도 초청하지 않은 친구 때문에 그는 몇 년을 아내와 지인들에게 분노와 불평을 쏟아놓고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하소연하며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작 그 친구는 자신이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 채 잘 사는데 자신만 과거에 묶여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평화로운 마음과 삶을 되찾고 미래의 행복한 삶으로 나가기 위해 그 친구를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며 용서라는 주제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용서프로젝트연구소를 설립하고 그 연구결과를 forgive for good 용서라는 책으로 발간하기도 했습니다. 배우자에 배신당한 이들, 상사와 직장의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는 이들, 범죄와 전쟁으로 자녀를 잃은 부모 등을 대상으로 상담과 세미나를 통해 용서의 기술을 익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이 책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책에서 용서에 대한 오해를 지적합니다. 가해자의 행위를 없었던 것을 잊어준다든가 별 것 아닌 것으로 묵인하는 것 혹은 반드시 가해자와 관계를 다시 이어가야 하는 것을 용서라고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용서는 홀로 그리고 스스로 경험하는 평화의 느낌입니다. 과거의 상처는 어쩔 수 없지만 현재에 나는 분노 대신 평화를 선택할 수 있고 그래서 미래로 나가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는 용서란 가해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피해자인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가 이해하는 용서는 피해자 중심의 사고로 Let it go, ‘그냥 놓아주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분명 이런 용서 이해는 효과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책에서 상담과 세미나에 참석하는 이들은 분노지수가 많이 떨어지고 평온한 마음으로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고통스러운 과거가 아닌 행복한 미래를 위해 삶을 투자한다는 반응을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피해자가 가해자의 관계가 어떠하든 상관없이 홀로 과거를 놓아주는 소위 정신승리를 통해 평화를 되찾았다면 가해자 역시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사과 없이 밀양의 납치범처럼 홀로 정신승리를 통해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이 경우 밀양의 주인공 신애처럼 홀로 평화를 찾은 가해자를 대할 때면 겨우 놓아주었던 분노가 다시 솟구치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것이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 있을가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용서란 러스킨 교수의 그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그 용서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것일까요? 오늘은 이런 문제를 좀 더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축복하는 마음
오랜만에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산상설교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6개의 대립명제의 마지막 명제입니다. 그것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배워왔던 이들에게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도록 가르칩니다. 이 대목은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용서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43절입니다.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예수님이 가르치신 용서란 가해자와 상관없이 홀로 과거, 상처를 내어버림으로써 평화를 얻고 미래로 나가도록 돕는 피해자 중심의 해결방법이 아닙니다. 더 적극적으로 가해자를 향한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과거와 상처를 극복할 뿐 아니라 가해자까지 치유받기를 구하는 행위입니다. 가해자를 사랑합니다. 가해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나 뿐 아니라 가해자도 행복하고 구원받기를 구하는 적극적 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용서는 세상이 줄 수 있는 용서와 차원이 다르게 높은 것입니다. 가해자를 마음에서 놓아주는 것도 사실 대단한 용기요, 결단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를 축복하는 것은 자연인의 힘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굳이 적용을 해보자면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놓아주는 용서를 하려고 했지, 축복하는 용서를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 했습니다. 밀양의 원작소설의 작가인 고 이청준 소설가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담은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서편제, 당신들의 천국 등 저도 학창시절 큰 감동으로 읽은 책들의 작가입니다. 그의 밀양해설을 읽지 못 하여 의도를 정확히 이해는 못 했으나 적어도 제가 보기에 소설 속 신애는 기독교적 의미의 용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하였습니다. 
성경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가해자를 마음에서 놓아줌으로써 평화와 해방을 얻는 차원이 아니라 가해자를 오히려 마음에 품고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기도로 그를 축복함으로써 나만의 평화가 아니라 가해자의 평화까지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놓아주는 용서는 사실 많은 다른 종교, 사상에서 권하고 있는 방식입니다. 성경은 그 차원을 넘어섭니다. 문제는 어떻게 이런 차원의 용서를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놓아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큰 용기가 필요한데 축복하는 것은 거의 불가사의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정말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요? 먼저 그 용서가 그렇게 어려운 이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본성을 좇는 삶
최근에 들은 어느 강연프로그램에서 성공한 어느 명사가 나와서 직장생활을 성공적으로 하는 법을 소개하였습니다. 그의 노하우는 한 마디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는 동료는 도와주고 외면하는 동료는 외면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호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외면하는데도 계속 도와주면 동료들이 이 사람은 호구로구나 생각하고 계속 더 많은 일을 떠다밀고 어려울 때는 도와주지 않는 일이 반복되어 결국 나만 바보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가장 흔한 방식의 처세술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많이 생각합니다. ‘나한테 이렇게 잘 안 해주는데 내가 왜 잘 해줘? 나한테 이렇게 잘 해줬으니 나도 외면하면 안 되지.’ 세상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우리의 본성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더 큰 이익을 좇는 욕망과 부합합니다. 이렇게 욕망을 좇는 삶에서 용서는 본성을 거스르는 아주 이질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삶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46-47절입니다.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세리는 돈을 좇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없이 욕망을 좇는 삶을 삽니다. 그런 이들에게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고 형제에게만 친절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미워하고 형제가 아닌 자는 배제함으로써 나의 생존과 안녕과 풍요를 지켜야 합니다. 그들처럼 사는 삶에서는 용서란 불가능한 선택입니다. 이건 마치 산에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산정상의 생명나무열매를 따려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그 나무로부터 멀어졌고 점점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용서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다 생각된다면 우리는 세리와 이방인의 삶 즉 욕망의 골짜기로 달려가는 썰매에 이미 올라타서 신나게 미끄러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용서가 가능한 이들은 어떤 삶을 삽니까? 
 
하나님을 좇는 삶
그것은 세리와 이방인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을 구하는 삶입니다. 45절을 보십시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제자들의 관심은 욕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시선은 돈과 성공과 쾌락이 아닌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에게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면 닮게 됩니다. 부부가 닮는 이유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닮는 이유입니다. 좋아하는 우상을 닮는 이유입니다. 청소년들이 바른 삶과 신앙의 모델을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닮아갑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긍휼의 하나님처럼 원수와 박해자들에게조차도 긍휼을 품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이들은 어떤 존재가 됩니까? 하나님처럼 온전한 존재입니다. 48절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자의 이상은 돈 벌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신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는 것입니다. 온전해지는 이들에게 원수사랑과 용서와 축복은 의무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이자 특권이 됩니다. 떠오르는 열기구처럼 점점 산정상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 곳에 가보니 생명나무열매가 열려있습니다. 그 열매를 먹는 것은 산에 오른 이들만이 누리는 행복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닮으려면 먼저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 분인지 경험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믿고 깨닫고 경험하고 누리는 자는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갑니다. 그 과정에서 원수도 사랑하고 용서하고 축복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비극은 하나님을 힘써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모릅니다. 모르니 사랑하지 못 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니 닮아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을 닮지 않으니 온전함은 꿈도 못 꾸는 일이 됩니다. 그러니 원수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기적은 감히 상상도 못 합니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에게 태도가 아니라 존재가 바뀌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분노를 버리고 평화를 택하는 태도변화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에 신물이 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택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마인트컨트롤, 정신승리로 잠시 누리는 위로요, 임시방편이요, 변든 세상을 치유하지 못 합니다. 성경은 존재를 바꾸라고 하십니다. 죄인으로서는 십자가에서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의인으로 부활한 거듭난 새생명이 되라고 하십니다. 욕망을 구하는 삶을 떠나 하나님을 구하는 삶으로 삶의 방향이 180도 바뀌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야만 원수와 박해자마저도 자연스럽게 긍휼히 여기고 용서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좇는 사람
돌에 맞아죽어가던 스데반이 가해자들을 위해 한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행 7:55) 스데반이 성령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행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이 순간 스데반의 태도 어디에 박해자들을 용서하기 위해 자아와 싸우는 고단한 모습이 나타납니까? 그들을 위해 용서와 긍휼이 기도는 돌에 맞아지르는 고통의 소리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스데반의 영혼에서 솟구쳐나오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생존과 안전과 부귀와 영화를 보고 있었더라면 이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절망과 저주와 공포가 솟구쳐나왔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용서가 이렇게 쉽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인에게 용서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기적입니다. 용서는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 그 메시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코로나를 이기고 다시 돈을 잘 벌 수 있게 해달라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방인과 세리들도 다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짜 기도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닮고 하나님처럼 거룩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우리의 시선이 스데반처럼 은혜로우신 하나님과 거룩하신 그리스도를 향하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