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10 정말 장수하는가 / 출 20:12

20200510 정말 장수하는가 / 출 20:12

출 20:12/정말 장수하는가

200510 어버이주일
부모공경의 상 
할렐루야, 우리 주님의 놀라운 평화와 위로가 코로나 사태를 믿음과 인내로 이겨내고 계시는 모든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들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 넘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오늘은 미국에서 mother’s day로, 교회에서는 어버이주일로 지킵니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자녀들이 부모님들을 방문하기도 조심스럽고 부모님들도 자녀들을 부르기가 겁이 나서 그 어느 때보다 안타까운 어버이주일이 아닌가 합니다. 어버이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가 묵상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오늘 본문입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신약 에베소서에서는 이 말씀을 좀 더 풀어놓았습니다. 
(엡 6:1)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엡 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계명이니 (엡 6:3)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에게 순종과 공경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유여하를 떠나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거기다 상도 있습니다. 잘 되고 장수합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장수한다는 말만 있었는데 에베소서는 잘 된다를 덧붙혔습니다. 사실 장수라는 말 안에 형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행하면서 장수한다면 복이 아니라 저주겠지요. 
이것은 십계명 중 5계명지만 복의 약속이 따라오는 첫 계명입니다. 앞의 하나님을 향한 바른 자세를 명령하는 4개의 계명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기에 아무런 복의 약속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바로 부모 공경의 계명부터 축복의 약속이 따라 붙습니다. 
부모공경은 또 이웃사랑의 첫걸음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이 틀로 나누어보자면 앞의 4계명은 하나님사랑, 뒤의 6계명은 이웃사랑으로 요약되는데 이웃사랑의 첫째가 부모공경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주신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면서 피도 섞이지 않은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정말 장수하는가
그런데 매년 어버이주일에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정말 잘 되고 장수할까? 여러분은 궁금했던 적이 없었는지요? 이 말씀을 증명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을 비교집단으로 구분하여 일생동안 쫓아다니면서 행동과 수명을 기록한 통계라도 있으면 확인해 보겠는데 이런 연구가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를 증명할 만한 예가 있는지 찾아봤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흥미로운 본문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4장, 5장이 두 개의 족보를 비교해 보여주는데 바로 가인과 셋의 족보입니다. 
아담의 첫째 아들 가인은 시기와 질투로 경건한 동생 아벨을 살해했습니다. 가인의 아벨 살해는 불순종의 죄인들이 순종의 의인들을 박해하는 첫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로인해 의인들은 시작부터 그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벨을 대신할 셋째 아들인 셋을 주셔서 의인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창 4: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그리하여 가인을 통해 죄인들이 세상에 퍼져가고 반면 셋을 통해 의인들이 세상에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럼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의 삶은 각각 어떻게 달랐을까요? 먼저 창 4장에서 가인의 후손을 보면 6대까지만 소개합니다. 5장에서 셋의 후손을 9대까지 소개하는 것에 비해 적습니다. 단지 수만 적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의 질도 매우 나쁩니다. 4:13-14입니다. 
(창 4: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창 4: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찌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은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의 두려움에 짓눌려 삽니다. 16-17절입니다. 
(창 4: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창 4: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그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을 수 없어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성을 쌓고 그 안에 스스로 갇히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3-24절입니다.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후손들 중 가장 번성한 라멕조차도 늘 창으로 찔리고 부상당하는 투쟁의 삶을 살아야 했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인이 한 것의 11배나 되는 보복으로 가족조차 위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불안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마디로 가족조차 믿지 못 하는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생존을 위해 죽고 죽이는 삶,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의 삶의 질은 셋의 후손들과 비교하면 더욱 비참합니다. 5장을 보면 흥미롭게도 셋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수명을 소개하고 있고 그 수명이 평균 900세가 넘습니다. 반면 가인의 후손들은 어떻습니까? 4장의 족보는 단 한 명도 그 수명을 소개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은 셋의 후손들에 비해 가인의 후손들은 그 수명이 기록할 만큼 의미있는 경우가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 짧고 비참한 삶의 후손들조차 대홍수로 인해 땅에서 모두 멸망하고 맙니다. 
(시 1: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 1: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장수한 사람들
반면 셋의 후손들은 어떠합니까? 이미 말씀드렸듯이 하나같이 9백세가 넘도록 장수합니다. 그 중 최고는 므두셀라로 969세를 삽니다. 거의 천 년을 산 것입니다. 혹시 이 긴 세월을 백발의 노인으로 비틀거리며 산 것이 아닐까요? 5장은 그들이 자녀를 출산한 때를 소개합니다. 아담은 130세에, 라멕은 182세에 그리고 노아는 500세에 자녀를 출산합니다. 노아는 600백세에 방주를 만듭니다. 이 말은 그들이 인생의 대부분을 자녀를 출산하고 거대한 배를 만들 수 있는 건강한 상태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만 건강하고 오래 산 것이 아닙니다.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벨의 죽음으로 끊어진 예배를 셋의 후손들이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배자들이었습니다.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그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들이었고 그 중 에녹은 죽음을 보지않고 승천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창 6:9) …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들은 심지어 의인이며 완전한 자라는 칭찬을 듣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셋의 후손들이 육체적으로만 건강하고 오래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을 닮은 완전한 사람으로 영적, 정서적으로도 건강하고 충만한 삶을 살았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장수와 형통은 부모공경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의인 셋의 의로운 후손들이 이토록 장수하고 복된 삶을 누렸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의로운 삶이 부모를 공경하는 효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 공경이 곧 하나님 사랑이며 그들은 이렇게 복되고 장수하는 삶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혹 4, 5장에는 부모공경이라는 표현이 직접 등장하지 않아서 공경과 측복의 관계가 좀 덜 명확하다고 생각되신다면 또 다른 족보를 보여드리겠습니다. 
 
반복되는 역사
대홍수로 인해 인류가 멸망하고 노아가 아담을 대신하는 제2의 시조가 됩니다. 그런데 하루는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장막 안에서 잠이 듭니다. 그 때 세 아들이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함은 아버지의 치부를 속히 가릴 생각은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흉을 봅니다. 
(창 9:22) 가나안의 아비 함이 그 아비(술취한 노아)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고하매
반면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치부를 속히 가려줍니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취하여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아들과 공경하는 아들의 마음이 각각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자, 그들과 그 후손들은 각각 어떤 삶을 살게 될까요? 다시 한 번 족보를 비교해 봅시다. 창세기 10장에 등장하는 함과 셈의 긴 후손들의 족보 중 우리 귀에 익숙하면서도 중요한 부분만 정리했습니다.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던 함의 후손들 중에는 창 11장의 바벨탑 사건을 일으키고 온 땅으로 흩어진 시날땅의 바벨 부족이 있습니다. 이들의 후손이 후에 바벨론 제국이 됩니다. 또 앗수르 제국의 주역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내내 갈등했던 블레셋도 함의 후손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쫓겨난 가나안 부족들도 그렇습니다. 바알 숭배의 원조격인 두로와 시돈 사람들도 함의 후손입니다. 멸망한 소돔과 고모라도 그렇습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갈등을 겪고 그들을 괴롭히던 백성이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모두 멸망하여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지금은 그 흔적을 유적지의 돌무더기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결국 최후의 심판으로 모두 멸망하고 말 멸망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반면 아버지를 공경하여 그 치부를 가리려 애썼던 셈의 후손들은 어떠합니까? 그 후손 중에 아브라함이 등장하여 인류의 제3의 시조라 할만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됩니다. 이삭, 야곱, 요셉의 믿음의 조상들이 나오고 다윗이 나와서 위대한 나라를 건설하고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그 족보에서 나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그 족보는 영적인 이스라엘 교회로 이어지고 마침내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할 천국백성이 됩니다. 
 
공경하는 마음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은 항상 3형제로 묶여서 묘사되다가 창세기 9장에서 아버지의 치부를 대하는 장면에서만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다른 운명의 갈림길이 바로 이 부모공경이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있을까요? 이제 더욱 명확해집니다. 부모공경은 이웃사랑의 첫걸음이며 하나님 사랑의 다른 표현이며 형통과 장수의 비밀입니다. 
여러분과 자녀들, 후손들이 셋의 후손처럼 형통하고 장수하다가 셈의 후손처럼 구원의 백성 되기를 원하십니까, 가인의 후손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함의 후손처럼 비참한 결말을 맞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부모님을 향한 마음가짐부터 새롭게 하여야 합니다. 마음으로라도 부모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미워한다면 갑자기 부모님의 허물을 마주칠 때 함처럼 행동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늘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면 평소에도 잘 섬기지만 갑자기 허물을 마주쳐도 셈과 야벳처럼 공경의 행동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부모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 후손들이 형통과 장수와 구원과 영생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