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531 생기와 티끌 / 창 2:7

20200531 생기와 티끌 / 창 2:7

창 2:7/생기와 티끌

200531 성령강림주일
어둠 속의 빛줄기
가슴 아픈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지난 월요일 미네소타 미니애폴리스에서 벌어진 지미 플로이드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데릭 쇼빈이란 백인경관이 그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8분 동안이나 무릎으로 목을 눌러 죽음에 이르게 만든 사건으로 인종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나고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이 경관은 3급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지만 시위는 수그러들 줄 모릅니다. 사람의 목숨을 이렇게 빼앗는 것은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로나 사태와 경기침체로 그렇잖아도 고통스러운 미국 땅에 더 큰 갈등과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어서 속히 증오와 미움이 아닌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고 폭동이 사라지도록 기도하여야 하겠습니다. 
가슴아픈 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인도에서 벌어진 사건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영상1-기차역에서 코로나로 엄마를 잃은 아기>
기차로 귀향하던 한 엄마가 어린 아기를 남겨놓고 차가운 역 바닥에서 목숨을 잃고 담요를 수의 삼아 누워있다는 이 소식을 할 말을 잃지 않을 이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인도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이렇게 기차를 이용하는 최소한의 호사도 누리지 못 한 채 수백 마일을 걸어서 집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고 길에서 탈진해 목숨을 잃는 이들이 부지기수라고 합니다. 이런 비극의 한 가운데서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드는 뉴스도 없지 않습니다. 이 소식도 한 번 보시지요.
<영상2-수퍼맨이 된 배우 소누 수드>
코로나 사태 이후 이미 사재를 털어 매일 일자리를 잃은 수천 명을 먹이던 인도의 배우 소누 수드는 뉴스에서 보신 바와 같이 이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소누 수드가 사람들을 먹이고 돌보고 돕고 있습니다.
 
선에 봉사하는 사람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악이고 살리는 것이 선이라면 악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고 선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진리에 도전하기를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이 이렇게 고난과 악으로 가득 차 있느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질문이 잘못 되었습니다. ‘죄악이 이렇게 가득한데 왜 세상은 멸망하지 않는가? 세상이 멸망치 않도록 하나님께서 사랑과 능력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라고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마치 사춘기 철부지가 ‘엄마, 아빠가 내게 해 준 게 뭐가 있어?’라고 투정하지만 사실은 매일 매순간 엄마, 아빠의 돌봄과 사랑과 기도로 자라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귀가 악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병들게 하고 멸망으로 몰고 가려 할 때에 하나님은 선에 봉사하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이 죄와 악으로 이렇게 병들어 있는데도 여전히 멸망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모든 일 중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일을 기념하는 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오늘은 교회력으로 성령강림주일입니다. 2000년 전 오늘 유대땅에서 오순절을 맞은 제자들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명령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며 열흘 째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성령이 제자들 위에 충만히 임하셔서 교회가 시작되었고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를 창세기를 통해 들여다 보겠습니다.  
 
생기와 티끌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리입니다. 창 2:6입니다. 
(창 2:6)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티끌)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사람의 재료는 두 가지입니다. 흙과 생기. 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뜻은 티끌, 먼지입니다. 한글성경에서는 식물을 자라게 하는 토양을 이루는 흙이란 단어로 번역되어 가치있는 재료인 듯 한 느낌을 주지만 원래의 의미는 바람에 날리는 티끌, 먼지로서, 아무런 가치를 갖지 못 한다는 의미가 더 강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미세먼지입니다. 누가 먼지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반면 생기로 번역된 단어는 생명이란 단어와 호흡이란 단어의 결합입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명의 호흡 즉 생명의 원천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사실상 이 생기의 존재에 달려 있습니다. 의사들이 사람의 생명유무를 확인할 때 맥박과 함께 코에 호흡이 있는지를 확인합니다. 생기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명의 능력입니다. 
생령이란 단어는 살아있는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살아있는 영적 존재 즉 생명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이를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창조의 원리는 무가치한 티끌에 고귀한 생기가 더해지니 천하보다 귀한 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무가치한 티끌과 고귀한 생기의 요소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티끌의 욕망과 생기의 욕구가 함께 있습니다. 티끌의 욕망은 무가치합니다. 허영과 탐욕과 정욕이 그것입니다. 생기의 욕구는 고귀합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에 대한 갈망이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두 욕구가 모두 있습니다. 이들은 마주 보고 달리는 열차처럼 서로 충돌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갈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 갈등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합니다. 티끌을 택하면 티끌처럼 무가치한 사람이 됩니다. 생기를 택하면 생기처럼 고귀한 사람이 됩니다. 이 역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롬 8: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아담의 후손들은 그 선택이 가져오는 다른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몇 주 전에 가인과 셋의 후손을 비교해 설명드렸습니다. 가인은 티끌의 사람입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시기심으로 죽이고 티끌과 같이 무가치한 삶을 살아갑니다. 이후 그와 후손들이 얼마나 번성했든, 얼마나 문명건설에 기여했든 상관없이 그 삶은 무가치합니다. 반면 셋은 생기의 사람입니다. 그와 후손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소금처럼 세상이 썩지 않게 만들고 맛을 내고 빛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고귀한 가치를 가집니다. 
 
티끌의 욕망
그러면 인류역사에 티끌의 사람과 생기의 사람 중 누가 더 번성했을까요? 즉 티끌의 사람이 세상을 병들이가 쉬웠을까요, 생기의 사람이 세상을 치유하기가 쉬웠을까요?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쉽습니다. 구정물통에 생수를 여러 병을 부어넣어도 그건 여전히 구정물입니다. 반면 생수통에는 구정물을 단 한 컵만 부어도 그건 더 이상 마실 수 없는 구정물이 됩니다. 무엇이든 더럽혀지기가 깨끗하게 유지되기보다 훨씬 쉽습니다. 티끌의 욕망은 강렬해서 생기의 욕구를 압도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티끌의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이런 사실을 아벨과 셋의 후손들이 번성해서 온 땅에 퍼지기 시작했을 때 벌어지는 상황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 6:1-2을 보십시오. 
(창 6:1) 사람이 땅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 6: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정체를 놓고 해석이 분분합니다. 그러나 바로 전문맥인 창세기 5장까지 아벨과 셋의 후손들의 족보와 그들의 삶을 자세하게 설명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들은 생기의 사람인 셋의 후손들이고 사람의 딸들은 티끌의 사람인 아벨의 후손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야할 생기의 사람 셋의 후손들이 티끌의 욕구로 살아가는 사람의 딸들 즉 아벨의 후손들과 결혼을 하며 그 거룩한 삶을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를 5절이 이렇게 설명합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그리고 마침내 티끌의 욕망이 아닌 생기의 거룩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노아의 가족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생기의 사람들 셋의 후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거룩함을 버리고 타락했다는 말입니다. 
 
개입하시는 하나님
이런 상황을 내버려두면 세상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병들고 썪어서 멸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이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역사에 개입하기로 하십니다. 바로 노아의 대홍수를 통해 티끌의 사람들을 심판하고 생기의 사람 노아를 새로운 시조로 삼아 생기의 사람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들을 재창조하신 것입니다. 이런 창조와 타락, 심판과 구원의 패턴이 역사 내내 반복됩니다. 
첫 시조 아담에게서 아벨이라는 티끌의 자손이 나온 것처럼 둘째 시조인 노아에게서도 함이라는 티끌의 자손이 나옵니다. 함의 후손들은 티끌의 사람들을 모아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께 도전하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을 흩어버리셨습니다. 반면 생기의 사람인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 역시 타락합니다. 아합의 때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자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은 7천 인을 남기셔서 생기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남북왕국이 모두 불순종으로 멸망할 상황이 되자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은 남은 자들을 통해 역시 생기의 역사를 잇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간신히 그 명맥만 끊어지지 않고 이어가던 생기의 역사를 부흥시킬 계획을 세우셨고 그 때가 되자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티끌의 욕망의 노예된 자들을 구원하여 생기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 모든 백성들을 생기의 사람으로 부르신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순절 성령세례를 통해 교회를 세우신 이유입니다.
성령님은 이 땅에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교회를 세우시고 티끌의 욕망으로 살아가던 이들을 생기의 거룩함으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성령님의 교회 사역은 함께 우리들을 생기의 사람으로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다니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그러므로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티끌의 욕망을 좇아 살지 않고 거룩한 생기의 능력을 좇아 삶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백성이 세상에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티끌의 욕망으로 병들고 부서진 세상을 생기의 능력으로 치유하고 회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세상을 멸망치 않고 구원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통해 이 세상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죽이고 빼앗고 차별하고 멸시하는 악의 역사가 티끌의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망가뜨리는 동안 살리고 나누고 치유하고 사랑하는 의의 역사를 생기의 사람들을 통하여 이루셔서 세상을 구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생기의 사람입니까, 티끌의 사람입니까? 세상이 병들고 부서졌지만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로 치유되고 구원받을 것입니다. 생기의 사람이 되어 그 역사의 주인공으로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