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1 비관과 낙관을 넘어 / 약 1:1~12

20200621 비관과 낙관을 넘어 / 약 1:1~12

약 1:1-12/ 비관과 낙관을 넘어

200621 주일설교 코로나
낙관의 함정
1583년 조선, 대학자 율곡 이이는 선조에게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왜구가 침략해 와도 막을 수 없습니다.’라며 그 유명한 10만 양병설을 주장합니다. 선조와 조정은 율곡의 주장을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별다은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1590년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 일행이 1년 간 일본을 탐방하고 돌아옵니다. 정사인 황윤길은 일본이 많은 병선을 준비 중이고 토요토미는 위험한 인물이라며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 긴장되는 보고합니다.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낌새는 없으며 토요토미는 쥐처럼 생겨서 두려워할 인물이 아니라며 전쟁이 있을리 없다는 낙관적인 보고를 합니다. 이 두 정탐꾼의 전혀 다른 보고에 조정도 반으로 갈라져 격한 논쟁을 벌입니다. 오랜 평화에 무사안일에 빠져있던 선조는 전쟁준비와 전쟁이라는 부담스럽고 위험한 일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바람과 일치하는 김성일의 낙관적 보고를 받아들여 그나마 진행되던 성 보수, 군대 정비 등도 중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 불과 2년 후인 1592년 20만의 왜군이 부산포를 침략하여 불과 20일만에 한양을 함락하였습니다. 정유재란을 포함하여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에서 국토가 초토화됨을 물론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이 죽음을 당하고 삶의 터전을 잃고 난민이 되었고 숱한 문화재와 자원, 기술자들을 약탈당하는 등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의 피해를 입습니다. 
 
쉽게 끝나지 않는 고난
이 뼈아픈 역사는 냉정한 현실인식 없는 낙관적 태도가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교훈은 지금 코로나19사태라는 엄중한 고난의 시기를 지나는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코로나사태가 금방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경고를 거의 받아들입니다. 아직 일부 지역에서 코로나 자체가 페이크라거나 코로나는 이미 잡혀서 2차 판데믹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눈막고 귀막고 소리치는 이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말입니다. 쉽게 끝나지 않을 이 고난의 시간을 우리는 어떻게 견디어내야 할까요? 
우리는 야고보서를 통해 그 답을 들으려 합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들은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진 초대교회교인들로서 팔레스틴에서는 유대교도들에 의해, 팔레스틴 밖에서는 로마제국에 의해 혹독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 박해는 교회사를 돌아보면 1세기 중반부터 4세기 말까지 3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10번의 대박해와 그보다 더 많은 소박해로 이어졌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 혹독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박해를 결국 견뎌내고 믿음을 지켰을까요? 야고보서는 그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을까요? 그 지혜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현실을 직시하라
끝나지 않는 고난을 견디는 첫째 교훈은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정확한 판단을 하는 현실주의자가 되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냉정히 보지 못 하게 막는 것은 비관주의와 낙관주의 모두 다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약 1: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고난 중에 약자들은 자기 처지를 비관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합니다. 처지를 비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일까요? 가장 낮은 자들이 높아지는 역전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관적 태도를 갖게 되면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를 모두 잃어버립니다. 자포자기해서 작은 고난과 실패에도 일어나지 못 합니다. 
비관주의만큼이나 현실을 못 보게 만드는 것이 또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약 1:10)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찌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강자들은 자기의 처지를 낙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낮아질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처지를 낙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9.11 테러 전에 부시대통령의 참모들은 이미 테러징후를 여러 차례 감지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낙관적 소식을 요구하는 대통령에게 위험신호를 지속적으로 전할 수 없었습니다. 대통령이 불쾌해하고 듣고도 무시하는 정보를 계속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월에도 미국에 코로나 환자가 처음 발생했을 때 트럼프 대통령은 아무 것도 아니고 기적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하다가 4월이면 사라질 것이라고 하다가 여름이면 사라질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안타깝게도 두 경우 모두 냉정한 현실인식 없는 낙관주의의 대가를 힘없는 국민들이 치르고 있습니다.
어떤 고난과 위험과 위기이든 그것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려면 불필요하게 비관하지도 말아야 하지만 동시에 대책없이 낙관하지도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11절은 말씀하십니다. 
(약 1:1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것은 ‘너의 육신은 결국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처럼 자명한 진리입니다. 지금 아무리 건강해보여도 결국 우리는 늙고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말처럼 지금의 부와 영화가 아무리 크고 견고해 보여도 결국은 과거 모든 제국들이 그러했고 당대의 부자, 권력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결국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현실인식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지혜를 얻으라
비관하지도 낙관하지도 않고 정확히 현실을 인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지금 벌어지는 일을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을 통해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이 중요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거짓정보에 속아넘어가는 이들이 오늘날 많습니다. 요즘 바다에 떠다니는 셀수도 없이 많은 플라스틱 쓰레기처럼 요즘 카톡과 유투브의 바다에 떠다니는 쓰레기 정보를 보며 정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정확한 출처도 근거도 확인할 수 없는 카더라 통신, 소설, 유언비어가 쏟아져 나와 많은 이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제 3세계의 많은 이들이 신선한 생수를 구할 수 없어서 오염된 물을 마시고 온갖 병에 걸리고 수명이 단축됩니다. 서구세계에서는 오염된 정보를 습득한 이들의 영혼과 정신이 온갖 병에 걸리고 죽어갑니다. 오염된 정보는 우리를 현실을 실제보다 비관하게 하거나 낙관하게 만듭니다. 생수를 마셔야 건강하듯 정확한 정보를 접해야 정신과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역사를 봐야 합니다. 역사를 통해 과거 인류가 어떻게 이와 유사한 고난을 겪었고 견뎠고 이겨냈는지를 이해하면 현실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다음으로 미래를 봐야 합니다. 전문가들과 학자들의 분석과 전망을 들으며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견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과거를 통해 현재를 보고 미래를 전망하는 것을 지혜라고 부릅니다. 이런 지혜를 주님은 자녀들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5절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고난을 이길)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이런 지혜를 얻으면 고난의 순간에도 당황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 옛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한 것처럼 아무리 혹독한 고난이 와도 이 모든 일의 이유와 상황과 전망을 알게 되면 당황하지 않고 극복할 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소망과 인내를 붙들라
그런데 정확한 현실인식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없습니다. 현실이 내 힘으로 도저히 극복 못 할 만큼 냉혹하다면 현실인식의 결론은 무엇이 될 수밖에 없습니까? 절망과 포기이지요. 현실인식에 더해 그 고난을 극복할 소망이 있는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소망이란 무엇입니까? 12절입니다. 
(약 1:12) 시험(시련)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시험)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이 시련의 끝에는 실패가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상, 영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넘어지지 않도록 주님은 우리를 붙들어주시고 도와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을 의지해서 시련을 견디게 해주십니다. 즉 인내를 배우게 하십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약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줄 너희가 앎이라. (약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배우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주님처럼 되)게 하려 함이라.
바로 이것이 성경이 약속하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궁극적 승리를 말합니다. 이 소망은 근거없는 낙관과 다릅니다. 대개 낙관은 자신의 바람을 투영한 생각덩어리입니다.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다, 행운이 찾아오면 좋겠다, 병이 빨리 낳았으면 좋겠다, 비지니스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이런 낙관은 마치 꿩이 조그만 구멍에 머리만 집어넣고는 사냥꾼이 보이지 않으니 위험이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쓰나미가 몰려오는 현실에 눈감고 금방 사라졌으면 하는 바람을 떠올리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근거없는 낙관에 다름아닙니다.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줘서 모든 일이 잘 된다는 식의 긍정적 사고방식을 믿음으로 포장했던 지난 날의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도 사실 근거없는 낙관일 뿐입니다. 
소망이란 확실한 출처에서 나온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출처는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주신 약속은 시련을 통해 자녀들에게 인내를 가르치시고 그 인내를 배워 시련을 견딘 이들에게 최후승리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최후승리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녀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영생의 삶입니다.
 
반석 위에 서라
우리는 코로나가 금방 지나가리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제 코로나 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자위할 수도 없습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고, 일자리를 금방 얻고, 비지니스가 금방 회복되고 다시 어메리칸드림을 금새 꿈꿀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근거없는 낙관이 가끔 운좋게 들어맞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끝나지 않는 고난을 통과할 때는 오히려 우리를 비관했을 때보다 더 큰 낙심과 절망의 벼랑으로 밀어넣습니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입니다. 궁극적 승리, 영원한 승리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을 인내로 붙드는 성도는 아무리 길고 힘겨운 고난이라도 마침내 이겨내고 승리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낙심하게 만드는 비관입니까? 대책없는 낙관입니까? 아니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의 약속입니까? 참된 믿음과 소망의 반석 위에 서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