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8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 6:12~15

20200628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 마 6:12~15

마 6:12-15/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200628 주일설교 산상설교21
행복의 비밀
1938년 20대 젊은이 724명을 선정하여 그들이 90대가 될 때까지 무려 75년 동안을 추적한 연구가 있습니다. 하버드대 연구팀이 내놓은 책 ‘행복의 비밀’에 요약된 이 연구는 책 제목처럼 ‘무엇이 인생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드는가’를 조사한 것입니다. 이 연구를 주도한 조지 베일런트 교수에 의하면 80대의 노년까지 ‘행복하고 건강한 그룹’과 ‘불행하고 병약한 그룹’을 가르는 결정적 비밀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재능, 부, 명예, 학벌 등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바로 관계였습니다.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는 관계에 관한 세 가지 교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첫째, 사회적인 관계는 유익하지만 고독은 해롭다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공동체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행복감과 건강에서 큰 차이를 보였습니다. 둘째, 관계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더라는 것입니다. 많은 관계보다 깊은 관계를 가진 이들이 더 행복하고 건강하더라는 것입니다. 가족, 친구, 동료, 교우들과의 깊은 관계는 고난과  노화, 질병의 충격을 줄여주는 완충제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관계는 육체 뿐 아니라 뇌도 보호해 준다는 것입니다. 애정어린 관계를 맺고 있는 노인은 육체건강 뿐 아니라 정신건강도 상대적으로 더 좋더라는 것입니다. 기억력, 판단력 등에서 좋은 상태를 보여주었습니다. 
 
관계의 비밀
75년의 연구는 좋은 관계가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는데 그럼 그 좋은 관계는 어떻게 해야 맺을 수 있는 걸까요? 음, 답을 얻으려면 75년만 더 기다려보시길 권해드립니다. 하지만 기다리시기 지루할테니 우선 저의 개인적 경험으로 한 가지 팁을 드리고자 합니다. 좋은 관계를 맺는 방법 중 하나는 잘 잊는 것입니다. 망각하는 것!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아니 가까운 관계일수록 섭섭한 일이 많이 생깁니다. 그런 일은 빨리 잊어야 합니다. 섭섭함을 마음에 오래 담아두면 둘수록 관계가 멀어집니다. 제가 아내와 아이를 셋 낳고 20년 가까이 살 수 있었던 비결, 섭섭한 일들을 빨리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아내가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잊어주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내는 저를 때릴 땐 때리더라도 돌아서면 잊어버려 주는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잊는다는 말은 곧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세상 모든 관계가 용서 없이는 유지되지 못 합니다. 가족도, 친구도, 동료도, 교우도 그리고 심지어 국가간에도 말입니다. 지난 주중 6.25사변 7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 참혹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용서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평화와 통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일제식민시절의 만행을 용서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일본과 전쟁하지 않고 이웃국가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세상의 어떤 관계도 용서없이 유지될 수 없고 이 용서야말로 건강한 영적 삶의 가장 중요한 비밀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에서 용서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풍요로운 영혼의 비밀 
산상설교 중 주기도문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크게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전반부와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후반부의 기도로 나눕니다. 후반부는 다시 육의 필요와 영의 필요로 각각 나뉘는데 전자는 2주 전에 살펴본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였습니다. 후자는 오늘 본문의 기도로 각각 죄사함와 시험을 이김과 악에서 건지심에 대한 기도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이 짧은 기도문에는 우리의 영적 삶이 건강하게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요소가 두 가지 나옵니다. 육신의 생명을 위해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듯 영적 생명을 위해 죄사함, 죄용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필요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도 역시 필요합니다. 
죄는 영혼의 암입니다. 육신의 암을 수술하여 잘라내고 키모하여 죽이듯 영혼의 암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술하고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은 살아나고 관계는 회복됩니다. 앞서 행복과 건강의 비밀이 풍요로운 관계이고 그 관계는 용서로 유지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영혼이 살아나는 비밀도 하나님과 이웃과의 풍요로운 관계이고 그 관계는 죄용서로만 유지될 수 있습니다. 용서받은 영혼만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고 용서받은 영혼만이 이웃과 원수맺지 않고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죄사함은 얼마나 자주 필요한가
그러면 이런 죄사함의 기도는 얼마나 자주 드려야 할까요? 바로 앞의 기도문을 보면 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이 기도는 매일 기도드린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나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기도라면 일주일치 양식을 주시옵고 라고 해야겠지요. 그렇다면 죄사함을 구하는 기도도 매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매일 하나님의 은혜의 폭포수 아래서 자신을 씻을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죄사함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죄까지 모두 씻김을 받은 것이 아닌가요? 구원파는  그러므로 한 번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죄사함을 받은 이들은 다시는 죄사함을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죄사함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죄사함이란 사망이라는 죄의 대가지불을 면제받는 것과 타락이란 죄의 노예된 상태로부터의 해방되는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마치 민간인이 군인이 되는 과정과 같습니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군인으로 소집되면 즉시 신분이 바뀌어 군복을 입고 군생활을 시작합니다. 즉시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군인으로서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모르고 총을 쏘고 적을 물리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민간인의 습관이 남아 질서와 군기와 명령체계도 모릅니다. 군인으로 쓸모있도록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지속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변화입니다. 그는 신분으로는 군인이 되었지만 실제 군인이 되기 위해 계속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대가로 죄의 책임을 면제받았지만 오랫동안 몸에 길들어진 죄의 습관과 성향을 벗어버리기 위해 성령님으로부터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죄와 싸우고 죄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한 싸움을 매일매일 계속 해야 합니다. 
이는 또 암을 이기는 것과 같습니다. 수술을 통해 암덩어리를 제거해 내지만 재발하지 않기 위해 식습관과 생활습관을 고치고 필요하면 키모를 받는 등 암을 완전히 이기기 위한 노력은 계속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일용할 양식처럼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자 그 의미를 이해 못 한 베드로는 이렇게 만류합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당시 천한 종들이 하는 일을 스승되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을 감당치 못 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답하십니다.
(요 13:8)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발을 씻기시는 섬김은 단순한 봉사가 아니라 그들의 죄를 씻는 거룩한 희생임을 의미합니다. 그러자 여전히 그 원리를 이해 못 한 베드로가 앞서 갑니다. 베드로는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입니다. 
(요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하시니
온 몸을 씻는 목욕은 믿음 안에서 받은 세례로 그들의 죄가 씻긴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라도 매일 발을 씻듯 매일 죄를 고백하고 씻김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매일 아침 큐티시간을 이 주기도문을 드림으로 시작합니다. 매일 밥을 먹듯 매일 주님의 기도로 묵상과 간구를 하는 것입니다. 
 
죄용서는 죄사함의 조건인가
이 본문을 읽을 때 많은 이들이 갖는 의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 주님께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조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본문 14-15절을 보면 그렇게 이해될 법 합니다. 
(마 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나 주석가들은 몇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첫째는 이 기도문이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앞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목욕을 끝낸 사람들이고 매일의 발을 씻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죄사함의 조건이거나 이웃을 용서하지 않는 것이 죄사함의 취소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둘째는 이웃을 용서하는 것이 공로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주님의 용서는 어떤 공로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는 아무런 자격도, 공로도 업는 이들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의 결과이고 그래서 그것을 거저 주시는 은혜, 은총이라고 부릅니다. 이웃 용서와 같은 어떤 공로, 자격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문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이웃용서가 주님의 용서를 체험한 제자들의 참된 회개의 삶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죄사함을 받은 이들의 삶에서는 산에서 메아리가 울리듯 반드시 이웃을 용서하는 열매가 맺힌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은총을 입기 위하여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행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죄용서는 죄사함의 열매다
회개는 공로가 아닙니다. 회개는 주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무하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회개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렇게 은총을 받아들여 응답한 이들은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됩니다. 그 은총의 힘은 우리 삶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정크푸드로 망가졌던 체질이 건강하게 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가 바로 이웃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용서는 죄사함의 전제조건이 아니라 죄사함의 결과입니다. 만약 그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면 그는 사실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총을 모르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믿음의 진위는 열매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7: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마 7: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마 7: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이 기도는 죄사함을 구하는 간구인 동시에 그 은총을 힘입어 이웃을 용서하는 자리로 나아가라는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매일 이 죄사함의 기도를 드려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욱 풍요로운 영생의 삶을 누리기 위해 매일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웃과 매일 평화의 삶을 누리기 위해 용서하기가 필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누리기 시작하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매일 이기도가 여러분의 영혼에서부터 우러나오도록 기도를 시작해 보십시오.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