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5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마 6:13

20200705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 마 6:13

6:13/악에서 구하시옵소서

200705 산상설교22
끝나지 않는 전쟁
1997년 개봉하여 큰 흥행을 기록한 Devil’s Advocate : 악마의 대변인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대배우 알 파치노와 신인시절의 키아누 리브스가 출연한 영화로 묵직한 영적 교훈을 던져주어서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64회 연속재판승리기록을 가진 젊고 유능한 변호사 캐빈 로막스는 자신의 의뢰인 성추행 교사가 유죄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휴정 중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잠시 고민하지만 65연승 기록을 세우기 위해 피해자를 몰아부쳐 결국 무죄 판결을 이끌어냅니다. 이 재판 후 그를 찾아온 뉴욕의 대형로펌회장 존 밀턴에게 캐빈은 스카웃되는데 그의 지시로 맡은 사건은 모두 명백히 악한 범죄자를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맡는 사건마다 능력을 발휘하여 무죄판결을 이끌어내며 캐빈은 승승장구하지만 동시에 점점 돈과 쾌락을 탐닉하며 타락해갑니다. 급기야 뉴욕으로 이주한 후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아내가 눈 앞에서 자살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캐빈은 존 밀턴에게 그만 두겠다고 찾아갔다가 그의 정체가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악마는 캐빈의 성공에 대한 욕망을 이용하여 그를 타락시키고 파멸시켜 온 것입니다. 그에게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캐빈은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데 정신이 들어보니 영화의 첫 장면인 성추행 교사를 변호하는 재판정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악마의 유혹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캐빈은 자신의 의뢰인이 유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재판에서 지는 길을 택합니다. 연승기록은 깨졌지만 양심을 지켰다는 보람으로 뿌듯해하며 화장실 거울 앞에서 자신을 대견해하고 있는데 한 기자가 말을 겁니다. 그의 정직함과 도덕성에 놀랐고 요즘 같은 때에 찾아보기 힘든 변호사라고 추켜세우며 신문에 대서특필할테니 인터뷰를 잡자는 것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캐빈이 알겠다며 화장실을 나가자 그 기자의 얼굴이 음흉하게 웃는 존 밀턴의 것으로 바뀝니다. ‘허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죄지.’라고 존 밀턴이 말하며 영화가 끝납니다. 성공과 돈, 쾌락으로 캐빈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자 도덕적 자만심과 명예심, 허영심으로 그를 유혹했다는 뜻입니다. 
C.S.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기독교’에서 ‘교만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죄’라고 지적했고 다른 책 ‘마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는, 시련으로 넘어뜨리지 못 한 견고한 기독교인이라도 영적 자만심으로 유혹하면 못 넘어뜨리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장담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와 루이스의 책이 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바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삶은 끊임없이 그 장르를 바꾸어 가며 인간을 유혹해 쓰러뜨리려는 마귀와의 중단없는 영적 전쟁이라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오늘도 이 기도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은 가르치십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시험이란
산상설교 중 주기도문의 마지막 두 개인 여섯 째와 일곱 째 기원입니다. 먼저 시험에 들게 하지 말란 기도는 무슨 뜻일까요?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모스는 문맥에 따라 유혹 또는 시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혹으로 이해할 때는 죄를 짓도록 부추기는 시도란 의미입니다. 시련으로 이해할 때는 믿음이 흔들릴 만큼 혹독한 고난이란 뜻입니다. 두 경우를 종합하면 시험이란 성도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더 나아가 믿음을 떠나도록 압박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 시험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님이 당하신 두 번의 시험입니다. 첫째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마귀에게 당하신 세 가지 시험입니다. 이 시험은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힘겨운 길을 버리고 자신의 영광과 안락을 구하는 편한 길을 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겪으신 유혹입니다. 역시 십자가라는 참혹한 희생 대신 스스로 안전을 구하는 길을 택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시험은 기독교인이 겪는 시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 대신 나의 뜻을, 십자가의 길 대신 영광의 길을, 좁은 길 대신 넓은 길을 택하라는 유혹입니다. 아마 이것이 왜 유혹인지 의아하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나의 뜻, 영광의 길, 넓은 길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이 세대가 살아가는 방식이며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바보요, 어리석은 것이라 우리는 배우고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결국 시험이란 이 세대를 본받으라는 유혹이요, 시험을 이기는 길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이 세대가 아닌 그리스도를 본받고 나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가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들게하지 마시옵고
오늘 본문은 ‘시험에 들게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를 그런 유혹의 상황 속으로 밀어넣지 말아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야고보서를 보면 하나님은 원래 우리를 그런 시험의 상황으로 밀어넣는 분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약 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약 1: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그러므로 이 기도문의 정확한 뜻은 그런 시험 자체를 피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만났을 때 이길 힘을 달라는 즉 죄 짓지 않고 믿음을 끝까지 지킬 힘을 달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와 시험
그러면 성도에게 이 기도가 왜 필요할까요? 하나마나한 질문입니다만 답을 하자면 시험을 이기는 길이 기도 말고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첫째 시험도 40일 금식기도로, 둘째 시험도 겟세마네에서의 처절한 기도로 이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자동으로 시험을 이기신 것이 아니고 이 기도로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기도로 준비하지 못 한 이들은 시험을 이기지 못 했습니다. 그 예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 곁에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피곤에 못 이겨 모두 잠들었습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지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시험을 이기느냐, 지느냐에 기도에 달렸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잠시 후 닥친 시련, 배신한 가룟 유다가 데리고 온 대제사장의 군사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밤새 기도로 대비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십자가의 길을 담대히 가셨지만 기도하지 않았던 제자들은 겁에 질려 도망치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합니다.
기도는 영적 승리의 비밀입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곧 군인이 무장을 해제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실제로 에베소서는 기도를 비롯한 영적 전투의 장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엡 6: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옷을 입으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엡 6:14)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엡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엡 6: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엡 6: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엡 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시험을 대비하는 기도
기도는 하나님 나라 군사의 전투력을 극대화합니다. 영적 전투를 위한 모든 전신갑옷을 입는 것은 중요합니다만 기도가 없으면 전투력이 상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쉬면 시험을 이기기가 어렵습니다. 한편 기도를 드려도 복 달라는 간구만 하면 역시 시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의 내용을 보십시오. 일용할 양식을 구한 후 죄용서와 시험극복과 악에서의 구원을 위해 기도합니다. 육의 필요보다 영의 필요가 훨씬 더 분량이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기도는 종종 그 반대가 아닌가요? 10년치, 100년치, 1,000년치 양식을 구하느라 영의 양식을 구하는데는 관심이 없지 않는지요? 이런 기도는 시험을 이기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시험에 넘어지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육의 필요가 아니라 육의 욕망을 구하는 기도로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바리새인들도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는 이들이 아니었습니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시험을 이기게 할 뿐 아니라 악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지킵니다. 본문에서 악으로 번역된 헬라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어서 ‘악한 자’로도 번역됩니다. 이 악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 사탄 혹은 마귀를 뜻합니다. 시험에 넘어져서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조금씩 삶의 주도권을 성령님으로부터 마귀에게 넘겨줍니다. 그 정도가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완전히 마귀에게 장악당해서 믿음을 떠나게 됩니다. 술을 한두 번 과음했다고 중독자가 되지는 앉지만 지속적으로 과음하면 어느 순간 술의 노예 중독자가 됩니다. 
베드로와 가룟 유다는 모두 시험에 넘어진 이들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졌고 유다는 욕망에 졌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믿음을 회복하였고 유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사탄은 베드로의 영혼도 삼키려 했지만 실패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이 베드로가 세 번 당신을 부인할 것을 예고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반면 유다는 사탄에게 완전히 넘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예수님의 기도와 능력이 아니었다면 베드로의 영혼도 사탄에게 넘어가고야 말았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는 믿음을 지킬 재간이 없습니다. 악에게 삼켜지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를 쉴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의 매일의 간구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