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12 하늘에 쌓는 보물 / 마 6:19~24

20200712 하늘에 쌓는 보물 / 마 6:19~24

마 6:19-24/하늘에 쌓는 보물

200712 주일설교 산상설교23
탐욕과 제자도
어느 미국인 부부가 동네를 산책하다가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크고 아름다운 집을 보았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언젠가 저런 집에서 살게 될 거예요.’ 남편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여보, 너무 허황된 꿈 아니예요? 지금 우리 집을 판 돈으로 저런 집을 산다는 건 어림도 없어요. 은행잔고와 내 수입이 얼마인지도 당신이 잘 알잖아요.’ 부부는 그 집 앞에서 30분 동안이나 된다, 안 된다로 옥신각신했습니다. 그 후 몇 달 동안 아내는 집요하리만큼 열심히 남편을 설득했고 마침내 아내의 믿음이 남편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합니다. 남편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거야’라고 확신하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후 마침내 부부는 살던 집을 팔고 큰 땅을 사서 꿈에 그리던 그런 집을 지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베스트셀러가 된 ‘긍정의 힘’의 첫 장 ‘비전을 키우라’에 등장하는 저자 조엘 오스틴 목사 자신의 이야기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시고 공감하기도 하셨을텐데요, 그러나 죄송한 말씀을 드리자면 미국의 많은 신학교에서는 조엘 오스틴 목사를 포함한 번영신학의 메시지가 기독교복음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그의 책과 설교를 가득 채우고 있는 메시지와 목차, 제목을 시중에 범람하는 자기계발서의 그것과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시면 금방 알게 됩니다. 믿음을 긍정으로, 비전을 야망으로, 은혜를 성공으로, 하나님을 내 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서 읽으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내용임이 금방 드러납니다. 큰 집, 좋은 차, 사업성공, 병치유를 하나님의 은혜라 가르치고 더 큰 집을 꿈꾸는 것을 비전이라고 하고 하나님이 그런 집을 주시리라는 자기최면을 믿음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길도 그리고 제자가 구할 하나님의 나라도 없습니다. 
 
제자도의 장애물
고 옥한음 목사님은 설교 중에 조엘 오스틴 목사의 메시지를 이단보다 더 위험하다고 비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자됨의 가장 큰 장애물인 탐욕을 비전으로 포장하고 하나님을 그 탐욕을 채워주시는 심부름꾼 정도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거짓된 메시지에 현혹되어 자신도 비전을 품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것을 간절히 믿으면 4,000만불, 500억이 넘는 재산을 가졌다는 조엘 오스틴 목사처럼 부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런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비전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은 탐욕의 다른 이름이며 그 탐욕이야말로 제자도의 가장 큰 장애물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설교 중 예수님이 구제와 기도, 금식에 대해 가르치신 후 들려주시는 세 개의 비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까지 구제와 기도에 관해 살펴보았고 금식은 메시지가 유사하기에 건너 뛰었습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제자도의 가장 큰 장애물 두 개를 소개하십니다. 
먼저 그리스도의 제자가 추구할 이상은 무엇입니까? 산상설교에 두 가지 이상이 소개됩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것으로 하나님처럼 온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공동체적인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 이상을 추구하는데 가장 큰 장애물 두 가지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부터 소개되는 탐욕과 근심입니다. 근심은 다음 주 본문에서 살펴보겠고요, 오늘 본문은 탐욕을 다루는데 이를 제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3개의 비유를 차례로 들려주셨습니다. 각각 보물, 눈 그리고 종의 비유입니다. 
 
보물의 비유
먼저 보물의 비유의 메시지는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것입니다. 
(마 6: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마 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먼저 땅에 쌓는 것은 돈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눅 12장입니다.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반면 하늘에 쌓는 것은 고통받는 이웃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눅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너희를 위하여…’ 즉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길이라고 합니다. 왜 하늘에 쌓는 것이 우리를 위하는 길입니까? 첫째 이유는 땅에 쌓아두면 손실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마 6:19) …거기(땅)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욱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1세기 유대인들은 진흙을 이겨 집을 지었습니다. 은행도 없던 시절 돈이나 보물을 집에 둘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문을 잘 잠그고 나가도 도둑이 벽에 구멍을 뚫고 들어와 훔쳐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래 집을 비워야 할 땐 도둑이 찾지 못 하도록 동전과 귀한 물건들을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면 습기 때문에 옷감에는 좀이 슬고 동전에는 동록이 생겨서 못 쓰게 되었습니다. 땅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손실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하늘에 쌓은 보물은 손실이 결코 일어나지 않고 불어나기만 합니다. 
(마 6:20) …거기(하늘)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애플이나 테슬라 주식도 비교할 수 없는 수익율로 하나님이 직접 불려주십니다. 
(눅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눈의 비유
땅의 손실과 하늘의 상이 보물을 땅에 쌓아야하는 첫째 이유라면 둘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보물이 있는 그 곳에 들러붙어버리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마 6: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22절부터는 눈의 비유가 시작되는데 이 내용이 좀 아리송합니다. 뜬금없이 눈이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22절부터 보십시오.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이것은 1세기 유대인들이 이해하는 눈의 기능을 묘사합니다. 오늘날처럼 시각정보가 안구를 통해 뇌로 전달되어 외부의 상을 인식하는 매커니즘을 몰랐던 고대인들은 눈을 몸의 창으로 이해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빛이 안 들어오고 눈을 뜨면 빛이 몸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눈을 몸의 등불이라고 불렀고 눈이 좋으면 빛이 몸 안에 들어와 몸을 밝게 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눈과 몸을 이용한 이 비유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눈은 곧 마음을 의미합니다. 전도서 2장입니다.
(전 2:10)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눈과 마음을 나란히 놓았습니다. 즉 눈과 마음은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몸은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마음은 삶에 빛을 비추는 창문이라는 뜻입니다. 성한 눈 좋은 눈은 그럼 무슨 의미일까요? 
(잠 22: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고통받는 이웃에게 후히 나누어주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반면 나쁜 눈도 있습니다.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나쁜 눈은 또 무엇일까요? 그것은 만족을 모르는 마음입니다. 
(전 4:8) 어떤 사람은 …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이르기를…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만족을 모르는 마음은 은혜의 빛을 가려서 삶이 어둠으로 가득 찬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마음이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 만족을 모르는 인색한 마음이냐 후히 베푸는 너그러운 마음이냐에 따라 삶의 질이 어둠에 둘러쌓인 불행한 것이 되기도 하고 은혜의 빛으로 가득찬 복된 것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해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종의 비유
우리 자신을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하는 마지막 이유는 보물을 땅에 쌓으면 우리가 그 보물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세 번째인 종의 비유가 설명해 줍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좋든 싫든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가미가 아닌 폐로 호흡하고 지느러미로 헤엄치지 않고 다리로 달리고 네 다리로 달리지 않고 두 다리로 걷는 것처럼 피조물인 이상 창조주를 섬기는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주의 종이 되는 것은 그런데 말할 수 없이 복된 일입니다. 그 창조주는 사랑과 권능으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아끼시는 분입니다. 그 분의 종이 되는 것은 마치 자애로운 부모님의 아들, 딸이 되는 것처럼, 뛰어난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처럼,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의 배우자가 되는 것처럼 행복과 자유가 있는 일입니다. 
반면 땅에 보물을 쌓고 마음이 거기에 들러붙어 버리면 우리는 창조주 대신 돈의 종이 되어버립니다. 그 돈의 신 맘몬, 재물로 번역된 아람어 맘몬은 탐욕의 신이기도 합니다. 그 신은 우리를 이용하고 착쥐하고 자유를 구속하고 마침내 멸망의 구덩이로 밀어넣어 버립니다. 그 신은 우리의 진정한 안녕과 복지와 행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들짐승을 잡기 위한 덫에 달콤한 먹이를 넣어두듯 탐욕의 신은 잠시 동안 우리에게 쾌락을 줍니다. 그러나 일단 덫에 걸리고나면 우리를 착취할 뿐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의 우선순위이신 하나님의 종이 되면 돈은 우리의 종이 되어 그보다 유용한 도구가 없습니다. 복지와 안녕을 지키고 유익한 사업을 일으키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데 쓰이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힘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리에 돈을 올려두는 순간 돈은 맘몬신이 되어 우리를 부리고 억압하고 착취하여 멸망케 만듭니다. 
보물을 땅에 쌓으면 보물도 잃고 삶은 어둠에 돈의 노예가 되어 멸망에 이릅니다. 그 보물을 하늘에 쌓으면 보물이 더 늘어나고 삶은 은혜의 빛으로 충만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구원에 이릅니다. 오늘 여러분의 보물을 어디에 쌓고 계십니까? 하늘에 쌓는 천국백성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