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26 돼지 목의 진주 / 마 7:1~6

20200726 돼지 목의 진주 / 마 7:1~6

마 7:1-6/돼지 목의 진주

200726 산상설교25
내로남불
 2009년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였던 마크 샌포드는 두 가지 이유로 국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았습니다. 첫째는 불륜스캔들입니다. 그는 하이킹을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5일 동안 애인과 아르헨티나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것이 발각되어 8년간 이어온 불륜을 고백해야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비난받기에 충분했지만 그가 전 국민적인 미움을 받게 만든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1997년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 사건이 터졌을 때 ‘도덕적 정통성이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며 빌 클린턴 대통령의 탄핵에 압장섰던 그가 정작 자신은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주지사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텼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국인들은 정치인들의 성스캔들에 관대하다는 평을 받습니다. 여러 유명 정치인들이 성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정치생명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거짓과 위선이 결합되면 좀처럼 용서하지 않습니다. 위선적 태도를 성적 부정보다 더 큰 문제로 본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타인에게 가혹한, 흔히 내로남불이라 하는 위선적 태도는 그러나 유명 정치인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자리잡고 있는 죄성이기에 이 땅을 살아가는 그 누구에게서라도 어렵잖게 발견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들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위선적 태도를 극복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판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설교 중 후반부에 속하는 교훈으로 이웃을 향한 위선적 비판을 금하십니다. 1절입니다. 
(마 7: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흔히 이 본문을 오해하기를, 예수님이 일체의 비판을 금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잘못을 보아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일체 남의 허물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모두 교회 안에 잘못에 대해 치리를 해야 한다고 가르치셨고 어떻게 치리할지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법권이나 경찰력 등에 대한 존중을 가르칩니다. 일체의 비판, 판단을 금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상식적으로도 바른 비판, 분별, 판단이 없다면 우리는 도둑과 사기꾼, 강도, 거짓 선지자를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학생들을 지도할 때 옳고 그름을 가르쳐 놓고도 그른 행동을 바로 잡을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자신을 돌아보라
그 첫째 의미는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마 7:3) 어찌하여 형제의 눈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4)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왜 우리가 형제의 눈의 티를 그렇게 잘 보는 것일까요? 자신의 눈의 들보를 못 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와 불행이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 하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다는데 인간은 태초부터 자신이 누군지 망각하는 존재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창조주처럼 될 줄로 착각했고 그 결과 세상에 죄와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망각합니다. 자신들의 허물과 실수와 죄와 잘못은 쉽게 잊어버립니다. 부와 권력과 재능과 성공에 취해서 자신들이 창조주가 된 듯 여깁니다. 그 증거가 바로 이웃을 쉽게 가혹하게 비판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말씀하십니다. 
(약 4:12)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법을 세우신 이도, 그 법을 따라 판단하시는 이도 하나님이신데 도대체 피조물인 인간이 무슨 능력과 권한으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는 것이냐? 이웃을 향한 가혹한 비판이야말로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 할 때 일어나는 가장 대표적인 행태입니다. 그러므로 가혹한 형제비판은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죄성인 자아숭배, 교만의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
이 말씀은 네 자신을 돌아보고 네가 누구인지, 네가 얼마나 허물이 많은지 그것부터 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이웃을 향한 비판과 정죄의 대부분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보다 더 큰 허물이 자신에게 있고 그래서 형제를 비판할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자신을 정직하고 바르게 돌아볼 수 있는 영성을 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너그럽게 대하라
오늘 본문의 둘째 의미는 그러므로 형제의 허물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2절과 5절입니다. 
(마 7:2)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마 7: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큰 들보를 발견하면 감당못할 크기의 하나님의 긍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한 후에 이웃을 돌아보면 그 때의 시선은 더 이상 그 전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나도 이런 큰 긍휼이 필요한 존재인데 저 사람에게도 그런 긍휼이 필요하지 않겠나, 라고 비로소 생각하게 됩니다. 
긍휼로 이웃을 대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가장 위대한 메시지는 구원이 인간의 도덕적 완성이 아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중심의 타종교에서는 그가 얼마나 도덕적이냐로 그 사람의 종교성을 판단할 수 있지만 은혜 중심의 복음에서는 그가 얼마나 긍휼을 알고 의지하느냐로 그의 영성을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거듭 형제에 대한 긍휼을 요구하십니다. 이미 살펴본 산상설교의 전반부를 돌아보십시오. 6:14-15입니다. 
(마 6:14)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끊임없이 자신을 자랑하고 타인을 비난하는 이는 사실은 하나님의 긍휼을 모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입니다.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든, 얼마나 중요한 직분을 맡았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긍휼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이웃을 너그럽게 바라보는 긍휼의 마음을 주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겸손히 교훈을 들으라
오늘 본문의 마지막 의미는 이 교훈을 겸손히 받으라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과 진주는 복음과 주님의 교훈을, 개와 돼지는 그 가르침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가리킬 때 개라는 경멸적 표현을 썼고 돼지 역시 돼지고기를 먹지못하는 유대인은 절대 키우지 않는 이방인들의 가축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 개, 돼지는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의미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의 문맥에서는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에게 달려드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난하고 율법을 제대로 배우지못한 민중들을 죄인취급하며 멸시하였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에게 너그럽기를 아무리 가르쳐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교만한 눈으로 정죄의 화살을 날리며 날선 혀의 칼날로 이웃을 난도질하기를 그치지 않는 이들이 있을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그들은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개, 돼지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무지한 이들은 아무튼 회개하지 않을 것이고 그런 이들을 바로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탄식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그런 이들의 멸망은 어쩔 수 없는 일임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겔 3:19)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깨우치고 돌이키지 못 하는 개, 돼지만큼 불행한 인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이 저와 여러분이 개돼지가 되지 않을 수 있도록 깨우치고 돌이키는 마음을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