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 아는 바를 더 확실하게 / 눅 1:1~4

20200816 아는 바를 더 확실하게 / 눅 1:1~4

눅 1:1-4/아는 바를 더 확실하게

200816 주일설교
교회의 위기와 기회
코로나로 모든 분야가 어렵지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대면예배를 못 드리기에 믿음이 떨어지는 교우들이 많이 나오리라 목회자들이 걱정합니다. 온라인예배를 누가 확인하는 것도 아니기에 한두 번 빼먹다보면 신앙과 멀어지는 이들이 많이 나올 것이란 걱정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이 위기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제도교회가 고난을 겪은 시기에는 역설적으로 신앙공동체가 정화되어 참된 믿음의 공동체로 바뀌는 긍정적인 현상이 있었습니다. 참 친구는 어려울 때 드러나듯이 참 성도는 고난의 때에 그 믿음이 증명됩니다. 믿음의 반석 위에 확고히 선 이들이 드러나고 주님이 그들을 통해 교회의 체질을 정화시키셔서 다음 세대를 위해 준비시키는 시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이 믿음의 반석 위에 확고히 선 성도들일까요? 어떻게 하면 성도들의 믿음을 반석 위에 확고히 세울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을 오늘 본문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확실히 보여줍니다. 
 
데오빌로를 양육하는 누가
오늘 본문은 누가복음의 저자와 수신자 그리고 기록목적을 설명해주는 서론입니다. 누가복음은 다른 세 개의 복음서와 달리 서론이 있는데 이는 당시의 역사기록물의 전형적 형식입니다. 역사가로서의 누가의 자질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누가가 이 누가복음의 속편격인 사도행전도 기록했는데 모두 한 사람을 수신자로 합니다. 3절입니다. 
(눅 1:3)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행 1: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누가복음)에는…
이를 보건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모두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로마제국 고위관리에게 쓴 글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1-3절이 이렇게 알려줍니다. 
(눅 1: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에 대하여 (눅 1: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사도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눅 1: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에 관해 직접 목격한 사도들의 증언을 누가가 정리했습니다.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부터 시작하여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시작된 교회의 사역을 사도들의 증언과 누가가 직접 목격한 것을 더하여 정리했습니다. 요약하면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사역을, 사도행전은 성령님과 교회의 사역을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를 자세히 살펴서 정리해 보냈을까요? 그 이유가 4절에 나옵니다. 
(눅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데오빌로는 이미 배운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이미 배운 바는 무엇일까요? 짐작컨대 초대교회에서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핵심메시지였을 것입니다. 누가의 스승이었던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당시 초대교회에 전파되던 복음의 원형이 이렇게 소개됩니다. 
(고전 15:3) 내가 (앞선 사도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고전 15:4) 장사 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베드로도 바울도 그리고 다른 전도자들도 바로 이 메시지를 전파했고 이를 믿은 이들에게 세례를 주고 교회로 받아들였습니다. 자, 그러면 다 된 것 아닐까요? 데오빌로도 그렇게 해서 복음을 믿었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니 열심히 교회만 다니면 되는 것 아닙니까? 누가는 그것으로 충분치 않다고 말합니다. 다시 4절을 보면 이렇게 쓰고 있죠. 
(눅 1: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이미 복음의 핵심을 배웠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그 복음이 얼마나 확실한 것인지 알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비유하자면 자동차의 작동원리를 이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압니다. 내연기관이 개솔린을 연소시켜 그 힘으로 피스톤 운동을 일으키고 이 운동으로 구동축을 돌려서 결과적으로 자동차 바퀴가 돌아간다는 원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장난 차를 저에게 맡기지 않습니다. 작동원리를 안다는 것과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다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일입니다. 수리는 반드시 전문 엔지니어에게 맡깁니다. 그는 작동원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부품 하나하나의 역할과 관계까지 세세하게 공부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동차 수리를 하는 능력을 가지려면 작동원리를 이해할 뿐 아니라 자동차에 대한 공부를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데오빌로에게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자세히 풀어 가르치고 더 나아가 성령님의 역사로 시작된 교회의 역사를 알아야 했습니다. 
 
장성하기 위하여
이렇게 배운 바 복음이 확실한 진리인지 알도록 더욱 자세히 가르치는 과정을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바로 양육입니다. 양육의 원래 의미는 어린 아기를 장성한 성인으로까지 기르는 것입니다. 복음을 들어서 아는 것은 영적으로 갓 태어난 갓난 아기와 같습니다. 생명이 그 안에서 시작은 되었지만 갓난 아기처럼 약하고 미숙합니다. 병균을 이기고 고난을 극복하는 성인이 되듯 죄악과 싸워이기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수 있는 강하고 성숙한 영적 용사가 되도록 자라나야 합니다. 이 일을 먼저 성인이 된 모든 성도가 함께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양육을 기독교인이 선택할 옵션 중 하나로 여깁니다.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이고 양육받으면 좋겠지만 받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갓난아기가 자라면 좋겠지만 안 자라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냥 엄마 품에 안겨서 모유나 먹고 평생 살아도 그만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생각입니까? 이렇게 영적으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켜 히브리서는 이렇게 훈계합니다. 
(히 5:12) (믿은 지)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다른 신자들을 양육하는)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모유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히 5:13) 이는 모유를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 5: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고린도교회의 양육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양육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전 14:20)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방언과 같은 신비한 은사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말이며, 양육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알고 순종하여 악과 싸워이기는 영적 성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을 좇아 양육에 힘썼습니다. 그 예를 한 번 보십시오. 
(행 18:25) 그(아볼로)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에베소에 와서)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행 18: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고린도교회에서 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전도자였던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말은 성령세례에 대해 알지 못 했다는 뜻입니다. 에베소에서 열심히 전도하기는 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 했습니다. 고린도교회 일꾼이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 아볼로를 데려다 말씀을 더 자세히 풀어 가르쳐 양육하였습니다. 양육을 받고 성장한 아볼로는 고린도로 건너가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행 18:27) 아볼로가 아가야(고린도)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여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행 18: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전도자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많은 유익을 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고린도교회 일꾼이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서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요한의 세례 뿐 아니라 성령세례에 대해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외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이 양육에 힘쓰고 양육을 통해 성장한 사례는 차고 넘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직접 양육하시고 또 다른 이들을 전도하여 양육하라고 명하신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교회는 2천 년 동안 양육을 통해 참된 교회의 일꾼을 길러왔습니다. 제대로 양육된 교회는 제자공동체가 되어 자신들의 시대를 복음화하는데 쓰임받았지만 양육되지 못 한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군중과 무리의 수준에 머물러 그 시대의 부담스러운 짐이 되었습니다. 오늘 뉴저지장로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으로 양육되어 제자로 성장하지 않는다면 제 한 몸도 추스리지 못 하는 영적 아기에 머물러 제각기 서로 자신이 옳고 자신이 제일 높다고 주장하는 철부지들의 난장판 밖에는 되지 못 할 것입니다. 
 
충성된 이들에게 부탁하라
양육은 그리스도인에게 선택지가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한 사람이 걸어가야할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길입니다. 믿음이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길에 들어선 사람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말씀 안에서 자라감으로써 그 길을 걸어갑니다. 첫 발만 들여놓고서 다음 걸음을 내딛지 않는 사람에게 길을 간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는 서 있는 사람이지 길을 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꺼이 발걸음을 내디뎌 믿음의 길을 걸어갈 뿐 아니라 그 길을 끝까지 가는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갑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그러므로 저는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여러분에게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아직 양육을 받지 못 한 분들은 하반기 일대일제자양육의 동반자반에 참여하십시오. 동반자반을 마치신 분들은 양육자반에 참여하십시오. 양육자반을 마치신 분들은 이제 주님의 명령을 좇아 다른 이들을 동반자로 삼아 가르치십시오. 양육자와 동반자를 교회에서 지원자들을 매칭해드리기도 합니다만 그보다 더 성경적인 방법은 양육자가 동반자를 직접 찾아서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제자 디모데에게 이렇게 명령합니다. 
(딤후 2:1) 내 아들(디모데)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딤후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수 있으리라.
바울이 디모데를 찾아 말씀으로 양육한 것처럼 디모데도 충성된 사람을 찾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사명을 맡기면 그들이 또 다른 이들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전파의 길이요, 전도입니다. 이 방법으로 2천년 동안 복음이 전 세계로 퍼졌고 주님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이 방법이라야 참된 교회를 세워갈 것입니다. 
 
보여주시는 성령님
어떻게 충성된 사람을 찾을 수 있나요? 나는 재주가 없는데 동반자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어렵지 않습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됩니다. 주님, 저에게 충성된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제가 섬길 동반자를 발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기 시작하면 눈이 열려 구원받을 영혼을 보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도 얻게 됩니다.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쇼핑몰을 함께 걸어도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 눈에는 식당만 보이고 옷을 좋아하는 사람은 옷가게만 보이고 전자제품 좋아하는 사람에겐 애플매장만 보입니다. 영혼을 찾는 사람에겐 남들 눈에 보이지 않는 충성된 영혼이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디서 그들을 찾습니까? 교회 안에서 먼저 찾으십시오. 지금까지 우리 교회에서 328명이 동반자반으로 양육을, 181명이 양육자반까지 양육을 받았습니다. 청년부, 이엠까지 장년출석만 1,400명이 넘으니 아직도 동반자반도 하지 않은 교인이 1,000명이 넘습니다. 다음으로 교회 밖에서 찾으십시오. 가족, 친구, 동료, 지인을 놓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그들과 동반자반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를 하십시오. 반드시 성령님이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그렇게 해주셨는데 오늘 우리에게만 응답하시지 않을 이유가 무엇입니까? 코로나가 문제입니까? 혹독한 박해와 온갖 역병도 이겨내고 복음은 전 세계로 전파되어 왔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리스도에게 충성되고 말씀에 충성된 제자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제자입니까? 우리 뉴저지장로교회 모든 성도들이 주님이 찾으시는 충성된 제자가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