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30 대접을 받고 싶은대로 / 마 7:12~14

20200830 대접을 받고 싶은대로 / 마 7:12~14

마 7:12-14/대접을 받고 싶은대로

200831 산상설교
폐를 끼치지 말라
일본에서 어느 외국유학생이 겪은 일입니다. 그가 머물던 작은 동네에 주민대청소날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침에 나갔는데 모인 사람들이 청소할 것이 없어 그냥 다 흩어져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 전날 밤에 주민들이 모두 자기 집 앞을 미리 청소를 해두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이웃 주민들이 내 집앞을 청소하느라 고생하게 두는 것은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아마 세계에서 가장 거리가 깨끗한 나라 중 하나일 겁니다. 밖에서 만든 쓰레기는 반드시 자기 주머니나 가방에 넣어오지 그냥 버리는 법이 없다고 합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일본인들의 일상에 뿌리깊게 자리잡은 문화를 메이와쿠(迷惑)라고 부릅니다. 민폐란 뜻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迷惑(메이와쿠) 문화 :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일본인들이 어려서부터 가정과 학교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는 말이 ‘히토니 메이와쿠오 카케루나’ 즉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황금율은 세계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개념입니다. 공자와 제자들의 대화를 기록한 책 논어(論語)의 위령공편(衛靈公篇)을 보면 제자 자공이 공자에게 ‘한 마디 말로써 평생을 지키면서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이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 때 공자가 한 대답이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입니다. 해석하면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입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기소불욕 물시어인) : 네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라
개신교에서 외경으로 분류하는 유대경전인 토빗기에도 유사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토빗 4:15) 네가 싫어하는 일은 아무에게도 행하지 마라…
의무윤리의 한계 
이 가르침은 분명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 유용하지만 그 한계도 분명합니다. 일본이 이런 정신으로 사회질서를 효율적으로 유지하는 이면에는 질서유지에 걸림이 되는 이들을 가혹하게 대한다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이지메, 왕따, 집단따돌림문화입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거나 질서유지에 걸림이 되면 아이들 뿐 아니라 성인사회에서도 가혹하게 왕따를 시켜서 매장시킵니다. 그래서 일본사회는 집단 이지메의 공포가 오랫 세월 동안 누적되어 옴으로써 질서유지를 강제화하고 있는 사회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1세기 유대인들도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이들이라 자부했지만 그럼으로써 자신들을 의인이라고 여겼고 율법을 지키지 못 하는 이들,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멸시하고 정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외형적 율법은 지키면서 내면적 탐욕과 교만은 숨긴 위선자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당시 유대사회를 율법주의라는 괴물이 집어삼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윤리는 분명 외형적 질서유지에 효과가 있지만 내면적 의로움은 만들어내지 못 하고 또 그 윤리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 하는 이들을 철저히 배제시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이 윤리적 가르침에 이런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윤리의 비밀
우리는 어느 덧 산상설교의 결론부에 도달했습니다. 오늘 본문 7장 12절은 산상설교 전체의 가르침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 초반부에서 설교의 의도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산상설교는 구약의 율법을 폐기시키고 주시는 새 가르침이 아니고 구약의 율법을 완성시키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그 가르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이웃사랑을 넘어 원수사랑까지 이르는 것,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이야말로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그 방법을 산상설교에서 여러 예를 들어 설명하셨지만 이것만으로 실생활에서 마주치는 복잡다단한 모든 상황마다 적용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사랑실천의 원리가 무엇일까요? 바로 12절입니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내가 받고 싶은 대로 남에게도 행하’면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 됩니다. 이것은 의무의 윤리가 아니라 사랑의 윤리요, 최소윤리가 아니라 최대윤리입니다. 여기에는 의무윤리와 최소윤리에는 없는 윤리의 핵심요소가 들어있습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도 하지 않는 것은 의무감으로 되지만 내가 받고 싶은 대접을 이웃에게 대접하는 것은 사랑이 없이는 안 됩니다. 전자는 최소한 이것 정도는 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만 후자는 최대한 여기까지 하라고 가르칩니다.
의무윤리와 사랑윤리는 그러므로 차원이 다릅니다. 전자는 인간의 힘으로도 할 수 있지만 후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없이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인류를 계몽시켜온 사상가들도 의무윤리, 최소윤리 이상을 요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고려하면 사랑윤리는커녕 의무윤리조차도 높은 이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그런 사상가들이 꿈도꾸지못한 사랑윤리를 가르치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개입되면 이런 일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하셨는데 사실 이 명령은 하나님의 아들인 당신이 하나님의 백성인 제자들에게만 하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사람을 돕는 것은 폐를 끼치지 않는 의무감으로는 할 수 없고 강도만난 이웃을 돌아보는 긍휼과 사랑이 없으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귀한 섬김인 동시에 쉽지않은 희생입니다. 작게는 사마리아인의 돈과 시간, 수고가 들어간 일이었지만 크게는 언제 강도가 다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지역에 머무는 일이요, 이 일과 관련하여 강도의 복수를 당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 쓴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기를 격려하는 선한사마리인아인법이라는 것이 제정되는 나라도 있지만 실제 잘 시행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선한사마리아인법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다가 발생하는 불상사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켜주는 것에서부터 그를 돕지 않는 것을 처벌하는 것까지 폭이 넓습니다만 실제 적용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선한사마리아인의 행위는 의무로 강제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직 사랑으로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소윤리만 요구할수밖에 없는 법으로는 강제하기 어렵습니다. 오직 최대윤리를 자발적으로 행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엄두도 못 내고 쉬운 길, 기껏해야 내가 싫은 일은 남에게도 행하지 않는 수준의 의무윤리, 최소윤리인 법만 지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천국은 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는 곳입니다.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사랑을 행함으로 가는 곳입니다. 그래서 바로 다음 구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마 7:13) (사랑을 행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의무만 행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은 사랑윤리, 최대윤리로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은 힘들지만 생명의 길입니다. 넓은 문은 의무윤리로 사는 것입니다. 그 길은 편하지만 멸망의 길입니다.
생명과 멸망의 길
눅 16장의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보면 죽어서 음부에 떨어진 부자가 딱히 잘못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쳤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부를 부정하게 모았다는 뉘앙스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 왜 그는 음부에 떨어졌습니까? 그는 사랑윤리를 외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날마다 호화로운 파티를 벌이는 그의 집 문 앞에서 거지 나사로가 병들고 굶주려 죽어가는 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굶주리고 있었고 그의 상처를 개들이 핥았다는 말은 그 부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행함으로 폐를 끼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누리고 싶은 것을 남에게도 베푸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 25: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전제용 선장
1985년 11월 14일 참치잡이 원양어선 광명87호는 1년간의 원양조업을 마치고 부산항으로 돌아오기 위해 남중국해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오후 5시경 전제용 선장은 96명의 살려달라고 절규하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찬 작은 배를 발견합니다. 그들은 공산화된 베트남을 탈출한 소위 보트피플로 당시 국제사회의 골치거리였습니다. 규정대로 한국의 회사에 보고를 하자 ‘관여치 말고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전제용 선장은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회사의 명령을 거부하면 그의 경력과 미래를 모두 잃게 될 것이 분명했고 선원들마저 그를 걱정하며 말렸지만 그는 결국 뱃머리를 돌려 그들을 구조합니다. 본사에 구조사실을 알렸더니 사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무인도에 그들을 모두 내려주고 돌아오라고 다시 명령합니다. 전제용 사장은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진다며 25명의 선원들을 달랜 후 부산항까지 그들과 열흘의 항해를 시작합니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선원들의 침실을 내주고 노인과 환자는 선장실로 데려다 치료하고 보살폈습니다. 식량과 식수가 금방 떨어져 배에 가득한 참치를 요리해서 베트남인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마침내 부산항에 도착하여 베트남인들은 난민수용소에서 1년 반을 지낸 후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 날 이미 25척의 배가 그 난민선을 보고 지나쳤습니다. 강도 만난 이를 보고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말입니다. 만약 전제용 선장도 회사의 지시대로 배를 돌렸다면 그들을 외면한 26번째 배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입장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당연히 구조했을 것이라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가 치른 대가를 생각하면 마음이 흔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항에 도착한 즉시 전제용 선장은 회사에서 해고되었고 안기부에 불려가 가혹한 조사를 받았습니다. 여러 선박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으나 모두 거절당한 그는 고향 통영으로 내려가 멍게양식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대기업의 이사로 일하다가 편의점을 연 것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전제용 선장은 96명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1명이 희생하는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며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2004년 미국에서 자리잡은 당시 베트남인들이 전제용 선장을 LA로 초청하여 감동적인 해후를 하였습니다. 그 때 영상을 잠시 보시겠습니다. <영상>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을 인도해줄 친구가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