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 3:6-8/깊고 넓고 풍성한 구원
201004 주일설교 코로나9
세상의 처방과 성경의 교훈
지금은 은퇴한 한국교회 원로이신 이재철 목사님께 예전에 한 젊은이가 찾아와 돈 4천 만원만 좀 급히 빌려달라고 사정을 하였습니다. 어느 아가씨를 사랑하게 된 이 젊은이는 환심을 사려고 자신의 처지를 부풀려서 자랑을 했고 연애할 때 돈을 펑펑 쓰고 결혼식도 성대하게 하고 집도 능력보다 큰 것을 구하느라 은행대출로도 부족하여 결국 사채빚까지 내야만 했습니다. 빚을 제 때 못 갚자 업자들이 매주 직장에 나와 협박을 하고 여차하면 집으로까지 찾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급전을 구하려 목사님께 찾아왔던 것입니다. 사정을 다 들은 이재철 목사님이 답하시기를, ‘이보게 젊은이 첫째 내게는 4천 만원이란 큰 돈이 없고 둘째 있어도 자네에게는 절대 빌려줄 수가 없네.’라고 하였습니다. ‘자네의 문제는 사채업자가 주는 고통도, 아내가 자네를 떠나는 것도 아닐세. 진짜 문제는 사채도 마다않는 허영심과 아내를 속인 거짓이라네.’ 절망적인 표정으로 그 젊은이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당장 가서 아내에게 모든 진실을 밝히고 용서를 구하게나. 그리고 집을 작은 곳으로 옮기고 씀씀이를 줄여 최대한 빨리 사채빚을 갚아야 해.’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슬픈 얼굴로 돌아간 부자 청년처럼 그 젊은이도 슬픈 표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성경 속 그 젊은이와 달리 이 젊은이는 몇 년 후 이목사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그 때 저에게 돈을 빌려주시지 않고 꾸짖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만약 그 때 빌린 돈으로 사채빚을 갚았으면 저는 아직도 아내를 속인 채 허영심에 가득 차 살며 더 큰 곤경에 빠졌을 겁니다. 그 날 아내에게 가서 용서를 구하고 집을 작은 곳으로 옮기고 절약해 살며 온 힘을 다해 빚을 갚았습니다. 아내는 저를 이해해 주었고 이제 빚 없이도 검소한 생활을 부족함 없이 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더 이상 속이지 않아도 되고 사채빚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이 얼마나 편안하고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1. 고통을 넘어 죄에서 해방을
이 젊은이는 급전을 구해 사채업자의 압박과 아내에게 진실을 들키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 문제해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목사님은 진실을 드러내고 허영심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문제해결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통에 대한 세상의 처방과 성경의 구원이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줍니다. 지난 주 우리는 오늘날 한국과 미국의 대표적인 처방인 긍정주의가 고통 속에 있는 우리에게 왜 답이 될 수 없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긍정주의가 모방하고 있는 진짜 구원의 길,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은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세상의 처방과 성경의 구원이 첫째 다른 점은, 지난 주에도 살펴보았듯이 추구하는 바 목표입니다. 세상의 처방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합니다. 성경의 교훈은 고통의 원인이 된 죄로부터의 해방을 목표로 합니다. 세상의 처방은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 풍요, 성공을 거두는 것을 목표로 하지만 성경의 교훈은 죄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회복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데스다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요 5:14) …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죽임당할 위기에서 구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11) …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병을 고치고 죽을 위기에서 빠져나온 것은 모두 감사한 일이지만 거기서 멈추어 버린다면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죄를 버림으로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백성으로 거듭나야만 진정한 구원입니다. 세상의 처방은 우리에게 언제쯤 코로나가 끝나고 힘겨운 경제상황을 끝내고 좋은 시절이 올까, 그 때까지 어떻게 견딜까를 생각하라고 하지만 성경의 교훈은 어떻게 하면 이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바르고 깊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까 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문제해결이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2. 개인을 넘어 인류의 구원을
세상의 처방과 성경의 구원이 두 번째로 다른 점은 개개인의 안녕에 시선을 뺏긴 세상의 처방과 달리 성경의 교훈은 개인을 넘어서서 공동체 더 나아가서 인류 그리고 피조세계 전체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의 병, 경제적 곤경, 고난을 벗어나는 것에 온통 시선이 빼앗겨 있는 세상의 처방에는 이런 넓고 큰 시야가 없습니다. 반면 성경의 교훈은 우리를 높은 하늘 위로 데리고 올라가 넓고 깊게 세상을 보게 만들고 그래서 나를 넘어 가족과 사회와 인류와 역사와 문명과 피조세계 전체를 돌아보고 치유와 회복의 길을 찾게 만듭니다.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구원의 이야기는 역시 출애굽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땅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보십시오. 오늘 본문 7-8절입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고통을 알고 (출 3:8)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에 이르려 하노라.’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받는 당신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셔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감격스러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약속은 언제 처음 주신 것일까요? 바로 앞 6절을 보면 압니다.
(출 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약 6백년 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지금 성취하시려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 가나안을 주리라 약속하셨는데 사실 아브라함은 죽을 때까지 가나안 땅에서 자기 소유의 땅이라고는 헤브론에 있는 가족묘지 외에는 가져보질 못 했습니다. 네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고 약속하셨지만 그가 살아서 본 자손은 이삭과 이스마엘 외 몇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 개인으로만 보자면 그가 받은 약속은 어느 것도 성취되지 못 한 채 여전히 나그네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6백년 후에나 이루어질 약속을 그저 믿고 살다가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 한 채 생을 마감했다는 말입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구원약속은 아브라함 한 사람의 안녕과 복지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애굽에 있는 백성들의 입장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이제 모세를 통해 구원의 약속을 받았으니 기뻐하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출 12:40)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지 사백 삼십년이라 (출 12:41)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거주 초기에는 요셉의 영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편하게 살았다 치더라도 아무리 짧게 잡아도 대략 3백 년 이상을 노예로 살면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 동안 여러 세대가 흘렀고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되새기며 기다리다가 그것을 보지 못 한 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생을 마감했을 겁니다. 여호와의 구원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왜 그들은 약속된 구원을 그들의 생에 경험하지 못 했을까요? 하나님의 구원은 개인도 넘어서고 세대도 넘어서서 민족 전체를 구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민족도 넘어섭니다. 이스라엘이 6백년 만에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을 통해 그들을 향한 구원약속이 성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시야가 그보다 더 넓고 멀리 내다보고 계시다는 것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진정으로 성취하실 메시야가 오실 것이라고 그들은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그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우리 이스라엘을 넘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모든 민족을 향한 구원을 행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구원은 이 거대한 인류구원의 퍼즐의 한 조각이라는 것입니다. 나 하나의 구원만 생각할 땐 당장 고난이 제거되고 안녕과 복지를 누리는 것이 가장 좋은 정답 같은데 인류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면 내가 자리잡아야할 퍼즐의 자리에 가야 전체 그림이 완성이 됩니다. 그 자리는 내 생각대로 고난은 없고 복지만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어쩌면 그 자리는 핍박과 순교의 자리일 수도 있고 가난과 희생의 자리일 수도 있고 운좋게 우리처럼 안전과 풍요의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21세기 한국과 미국이라는 안전한 나라, 풍요로운 시대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희생과 고난, 핍박과 순교의 자리를 배정받은 믿음의 선배들에게 그리고 여전히 위협과 가난과 싸우며 믿음을 지키는 자리를 지켜야 하는 제 3세계 믿음의 동료들에게 진 빚이 크다고 믿습니다.
그럼 다른 이들에 비해 더 힘겨운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을 억울하지 않을까요? 인류 구원을 위해 왜 나는 남들보다 더 힘겨운 자리에서 구원의 퍼즐조각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세상의 처방과 성경의 구원이 다른 세 번째 이유가 중요합니다.
3. 현재를 넘어 영원의 회복을
그 셋째 다른 점은 성경의 교훈은 현재에 묶여있는 세상의 처방과 달리 영원에 이르는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처방은 지금 여기서 내가 겪는 고통과 내가 누릴 행복 외에는 관심도 없으려니와 관심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그 이후에 무엇이 있을지 알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 처방이 고통을 줄이고 건강, 풍요, 성공을 가져다 주었다 칩시다. 얼마나 갈까요? 급전을 구해 사채를 막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빚을 지게 되지 않을까요? 돈을 벌어 성공을 했습니다. 그 돈과 성공이 얼마나 지속되던가요? 병이 나았습니다. 그럼 이제 천년만년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삽니까? 이 모든 해결책은 임시적입니다. 진정한 구원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들에게 그 너머에 있는 시간 더 나아가 영원에 이르는 시야을 제공합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입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그리스도께서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성도들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영원의 소망으로 인해 우리는 죽은 것 같아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잠든 것일 뿐입니다.
(눅 8:52)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입니다. 망한 것이 아니라 잠시 쉬어가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소망을 더욱 굳게 붙드는 것입니다. 다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요.
한 사람이 망했냐 아니냐는 얼마나 지금 고생하느냐가 아니라 장래의 소망이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됩니다.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온갖 즐거움을 다 쫓아다니며 재미있게 노는 친구는 행복한 것 같지만 졸업하고 갈 곳이 없으니 사실은 망한 것입니다. 아침부터 공부하고 실력을 쌓느라 고생하는 친구는 코피 터지고 힘드니 망한 것 같지만 사실은 원하는 대학, 하고 싶은 일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영원한 구원과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기다리는 우리가 어떻게 망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넘어지고 낙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절망하고 좌절할 수 있습니까? 이 영원의 소망은 세상의 싸구려 처방이 절대로 흉내낼 수 없는 참된 구원의 가르침입니다. 이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코로나보다 더한 위협이라도, 전쟁보다 더한 위험이라도 절대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낡으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큰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잠깐 보이는 세상과 보이지 않으나 영원한 나라 중 어디를 바라보고 계십니까? 세상의 가벼운 진통제로 고통을 면하는 것에 만족하지 마시고 진리의 치료제로 죄와 사망을 이기고 참된 구원에 이르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