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5 비통과 눈물 / 요 11:32~40

20201025 비통과 눈물 / 요 11:32~40

요 11:32-40/비통과 눈물

201025 주일설교
장례식장의 정서
한국에서 일생을 헌신적으로 목회하여 존경받았던 어느 목회자의 장례예배에서 사회를 맡은 분이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목사님은 평생 그토록 뵙고싶던 주님을 만났고 그토록 들어가고 싶던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셨습니다. 지금 목사님은 아마도 그 누구보다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우리 모두 이 승리를 기뻐하며 박수를 치십시다.” 조문객들 중 일부에서 어색한 박수소리가 났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조문객들 대부분 이 사회자의 의도를 이해 못 하지 않았겠지만 장례식장에서 박수를 치기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여겼을 겁니다. 목사님이 천국에 들어가셨으니 기뻐하고 박수를 쳐야 하나, 아니면 암투병으로 고생하신 시절과 고인과의 이별을 생각하며 슬퍼해야 하나? 조문객들이 순간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혹시 여러분은 장례식장에서 비슷한 고민을 하신 적이 혹 없었던지요? 과연 기독교인은 장례식장에서 천국의 소망으로 인해 기뻐해야 합니까, 고인의 고통과 이별로 인해 슬퍼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이 질문은 우리가 겪고 있는 고난의 상황에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코로나로 경제적 고난을 겪습니다. 질병으로 육신이 아픕니다. 결혼이 흔들리고 가정이 위험합니다. 이런 고통 앞에서 우리는 아프고 힘들다고 외치면 안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니 결코 아프지 않고 힘들지도 않다고 말하고 항상 웃어야만 믿음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슬픈 장례식장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셨을까요? 오늘도 3주째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슬퍼하신 예수님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마르다에 이어 마리아의 영접을 받습니다. 마리아도 언니 마르다처럼 예수님에게 섭섭한 나머지 예수님이 일찍 오셨더라면 오빠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말을 마치자마자 마리아는 슬픔이 북받쳐올라 겨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곁에 있던 동네사람들도 그녀의 울음소리에 함께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33절입니다.
(요 11:33) 예수께서 그(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비통함과 불쌍히 여기심, 예수님의 두 가지 반응이었습니다. 이 중 불쌍히 여기심을 먼저 살펴보십시다. 불쌍히 여기셨다고 번역된 헬라어 ‘타랏소’는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이러저리 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씁니다. 본문은 이 단어로 예수님의 심령을 묘사합니다. 즉 예수님의 마음이 우는 마리아와 사람들의 모습에 크게 흔들리셨다는 뜻입니다. 결국 나사로의 죽음을 마주하시고는 눈물을 예수님도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34-35절입니다.
(요 11:34) 이르시되 ‘그(나사로)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요 11: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예수님은 무엇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흔들리도록 불쌍히 여기시고 눈물까지 흘리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죄와 죽음의 무덤에 갇혀 있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습니다. 나사로는 죄로 인해 망가진 세상 속에서 연약한 육체를 갇고 사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운명, 질병과 노화와 고통과 사망을 겪고 무덤에 묻혀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사랑하는 이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기력함에 떨며 슬픔에 짓눌려 있습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슬픈 일입니까!
결말을 안다고 해도
한가지 주목할 것은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를 살리시려는 찰라라는 점입니다. 이제 잠시 후면 나사로를 당신이 살리실 터이고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쁨에 겨워 이 슬픔의 순간을 다 잊고야 말 겁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서 울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시니 슬퍼하실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셨다는 것은 인간이 이 땅을 살아갈 동안 겪어야 할 고통이 얼마나 가볍지 않은 것이며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인간을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그 고통에 어떻게 공감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내가 첫째 평화를 출산할 때 산부인과에서 가족분만을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남편이 분만실에 같이 들어가 아내의 출산을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와 아내는 무통주사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고 산부인과에서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내가 8시간 진통하는 동안 저는 손을 단 한 순간도 놓지않은 채 발을 동동 구르며 같이 땀을 뻘뻘 흘렸습니다. (제 기억에서는 그런데, 아닌가…) 분만 전 의사말이 산모도, 아기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고 주님이 아내를 지켜주시리라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해피엔딩에 대한 굳건한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에 몸을 비틀며 땀을 뻘뻘 흘리는 아내를 보는 것이 정말 마음이 아팠습니다. 마침내 아내가 평화를 출산한 순간 저도 모르게 눈물이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하염없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결말을 안다고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슬픔을 못 느끼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삶은 분명 고통과 슬픔과 괴로움을 동반합니다. 주님은 그런 고통을 안고 사는 자녀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그들의 고통에 동참하시고 그들의 슬픔에 공감하십니다. 우리가 울 때 주님도 우십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주님도 괴롭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고난을 당해 괴로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암환자가 고통으로 신음소리 내는 것이 비난받을 일이 아니듯 고난을 견디는 이가 울거나 괴로워하는 것이 믿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을 의지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비통히 여기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보이신 또 하나의 정서는 비통히 여기심입니다. ‘비통히 여기셨다’고 번역된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는 ‘매우 분노하다, 화가 나서 씨근거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왜 화를 내신 걸까요? 바로 불신앙 때문입니다. 먼저 마리아의 불신앙을 33절에서 보십시오.
(요 11:33) 예수께서 그(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마리아는 마르다처럼 예수님이 일찍 오지 않으신 것에 섭섭하였고 슬펐습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달리 마리아는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마르다는 섭섭하고 슬펐지만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무엇이든 기도하면 가능한 일이 있으리라고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섭섭함과 슬픔 외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녀는 부활이자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더 이상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이 불신앙에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히 여기셨습니다. 화가 났습니다.
다음으로 유대인들의 불신앙 때문에 또 화가 나셨습니다. 37-38절입니다.
(요 11:37) 그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요 11: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나사로를 사랑하지 않았거나 살릴 능력이 없어서 일부러 늦게 온 것 아니야?’ 이 의심과 불신앙이 예수님을 또한 비통하게, 화나게 만든 것입니다.
불신앙은 예수님을 답답하고 괴롭게 만듭니다. 인간도 의심을 받고 믿음을 얻지 못 하면 화가 나지만 예수님의 답답함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지 않는 제자들 때문에 여러 차례 속상하시고 탄식하시고 화를 내시고 때로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내려오시자 열두 제자들은 한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 해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 전도여행을 하며 많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친 적이 있었습니다.
(막 9: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반면 신앙은 예수님을 기쁘게 만들었습니다. 가버나움의 한 백부장의 종을 고칠 때 그의 믿음을 보시고 놀라시며 칭찬하셨습니다.
(마 8: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슬픔 너머 소망을 붙드는 믿음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십니다. 동시에 연약한 우리가 강하게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슬픔과 고통 너머에 있는 소망과 믿음을 붙들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가 믿음을 갖기를 기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에게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픈데 병원에서 준 약을 먹고 있지 않다면 부모는 화가 날 겁니다. ‘약만 먹으면 병을 이길 수 있는데 왜 고집을 부려서 점점 더 몸을 상하게 하는 거니?’ 예수님도 그렇게 화가 나시는 겁니다. ‘부활이자 생명인 내가 여기 왔는데 왜 나를 믿지 못 하고 슬픔과 절망에 갇혀 사는 거니?’
춥고 어두운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우리는 괴롭고 고통스럽습니다. 때로 울고 때로 낙심하고 때로 지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밝고 따뜻한 태양이 되십니다. 주님은 길이시고 진리이십니다. 그런 주님을 바라보는 이들은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목사이자 대학교수인 제럴드 싯처는 가족과 캠핑장을 다녀오는 길에 음주운전차량이 차선을 넘어와 정면충돌을 하는 사고를 당해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네 살 난 딸,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세 여자를 현장에서 잃었습니다. 남은 세 명의 아이와 그 날의 끔찍한 기억과 공포와 싸우며 매일을 견디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울다’는 그의 책에서 쓰기를, 매일 밤 아이들 몰래 흐느껴 울기를 40일 동안 하고 나니 눈물이 진액으로 바뀌어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더라고 합니다. 견디기 힘든 슬픔을 견디느라 치른 전쟁같은 3년을 보내고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도 슬퍼한다. 묘지를 다녀온 다음 날 한밤중에 데이빗이 위층으로 올라왔다. 그 아이는 울면서 내 무릎 위로 올라오더니 잠시 동안 거기에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엄마가 너무 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3년간 나는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을 경험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살아 있다는 것에서 그리고 보통의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인생에서 가장 큰 즐거움을 맛보았다… 하나님은 지난 3년의 시간 동안 내 삶 속에 내내 함께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그리고 영원까지 함께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심령을 자라게 하시고 크게 키우시고 그 속을 가득 채우고 들어와 계실 것이다. 내 삶은 철저하게 변화되고 있다. 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 될 거라고 믿는다.”
제럴드 싯처는 상실과 이별의 슬픔을 숨길 생각이 없습니다. 숨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슬픔 너머에 있는 믿음을, 비극 너머에 있는 소망을 붙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인생의 모든 비극의 결말을 희극으로 바꾸어 주실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4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을 믿고 그 분의 영광을 보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