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19-28/자신을 잊어버리다
201108 주일설교
저항하는 교회
지난 주에 어느 교우께서 한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대형교회의 역사박물관에 관한 영상을 보내주셔서 봤습니다. 이 교회는 최근 세습, 수백억 원대 비자금과 부동산 문제로도 한국사회에 떠들썩하게 이름을 알렸는데요, 역사박물관의 대부분은 교회의 역사가 아니라 원로목사님의 일대기였습니다. 그 분의 생애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업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주요사건들을 미니어처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교회 행사 때마다 목사님의 실제크기와 같은 등신대를 만들어 놓고 교인들이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물론 존경의 뜻으로 그렇게 했으려니 생각할 숟 있겠지만 최근 불거진 세습논란을 생각하니 지나친 우상화로 보이고 이런 분위기라면 교회세습도 자연스럽겠다는 생각도 들었답니다.
우리 개신교회는 인간을 우상화하는 것을 포함한 온갖 불의에 저항하는 종교개혁으로 시작되었기에 저항하는 교회라는 뜻의 Protetant Church라고 불립니다. 오늘날 그런 한국교회 일각에서는 과거 종교개혁자들이 거부했던 인간지도자에 대한 우상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예가 일부 목회자들의 교회사유화, 세습, 권력다툼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결과 신도들 역시 교회를 욕망실현과 힘겨루기의 장으로 여기는 불행한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십자가를 지시며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것이요, 목숨을 걸고 참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종교개혁자들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 지경에 처한 교회가 들어야 할 엄중한 교훈이 있습니다. 그 교훈은 오늘 본문의 주인공,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전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지지를 얻었던 카리스마적 지도자 세례 요한이 들려줍니다.
떠오르는 지도자 세례 요한
1세기 유대광야에서 예언활동을 시작한 세례 요한은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가 세례를 받고 그 가르침을 듣자 예루살렘에 있던 종교지도자들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세례 요한의 정체를 알아내려 하였습니다. 19절입니다.
(요 1:19)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대답)가 이러하니라. (요 1:20) 요한이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니 드러내어 하는 말이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한대
로마제국 치하에서 고통당하던 당시 유대인 민중 사이에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마지막 때에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대망론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민중들 사이에 세례 요한이 바로 그 메시야가 아니냐는 소문이 퍼져가자 종교지도자들은 그에게 직접 이를 확인해 보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오실 그리스도 즉 구원자, 메시야가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러자 조사단을 이렇게 묻습니다.
(요 1:21) 또 묻되 ‘그러면 무엇, 네가 엘리야냐?’ 가로되 ‘나는 아니라’ 또 묻되 ‘네가 그 선지자냐’ 대답하되 ‘아니라’
두 번째로 엘리야냐고 물은 이유는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 때문입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세 번째로 물은 ‘그 선지자’ 역시 신명기에 기록된 예언 때문입니다.
(신 18:18)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세례 요한
세례 요한이 끼치고 있는 영향력과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고려하면 그가 자신을 그리스도는 아니라도 엘리야나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 여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와, 나의 이 영향력을 봐, 나를 따르는 저 군중들을 봐, 이 정도면 나야말로 엘리야나 모세와 선지자가 아니고 누구란 말인가!’ 만약 그가 조사단의 질문에 그저 Yes라고 한마디만 했다면 그는 더욱 열광적인 대중의 지지와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 하는 권위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자신이 그들 중 누구도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신과 달리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다른 평가를 내리셨습니다. 마 17:12입니다.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마 17:13) 그제서야 제자들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세례 요한이 바로 그 예언된 엘리야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의 존재를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왜 자신이 엘리야임을 부인했습니까? 거짓말을 한 것인가요? 문맥을 보면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이 그 위대한 엘리야의 자격으로 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왜 그는 자신의 정체를 몰랐을까요? 다시말하면 왜 그는 자신이 엘리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지 못 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두 가지에 집중하느라 자신의 정체를 생각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22절 이하에 나옵니다.
사명에 집중하느라
(요 1:22) 또 말하되 “누구냐?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대답하게 하라.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요 1:23)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네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내가 할 일이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다, 나는 그저 그 소리일 뿐 다른 무엇도 아니’라고 답을 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냐에 관심이 없는 겁니다. 자신이 맡은 사명에만 집중할 뿐입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해서 얻을 명성이나 지위나 이익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불 속에 뛰어들어 죽어가는 사람을 구출해낸 소방관에게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영웅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셨습니까?’ ‘네? 무슨 용기요? 그게 원래 소방관 업무인데요?’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면 헛된 영광에 마음을 뺏기지 않습니다. 사명을 바라보는 초점이 흐려지면 보이지 않던 영광과 인기와 권력과 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거기가 부패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집중하느라
그가 또 한 가지 집중한 것은 무엇일까요? 24절 이하입니다.
(요 1:24) 저희는 바리새인들에게서 보낸 자라. (요 1:25)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찐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요 1:26)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요 1:27)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하자 그럼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푸냐고 도전합니다. 그러자 요한은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라도 세례를 베풀어 그 길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분을 소개합니다. 자신은 그 분의 종노릇을 할 자격조차도 없을 만큼 크신 분이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모든 신경은 온통 그 분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 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라면 종노릇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이라도 무엇인가를 해야 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하지 않지 않을 수 없노라는 답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집중해 있느라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는 생각할 겨를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태양이 떠올랐는데 누가 촛불을 챙깁니까? 어두운 밤에나 촛불은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태양이 세상을 비추면 촛불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으려니와 켜두어도 어디 있는지 찾기도 어렵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태양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을 잊는 길
세례 요한의 자세는 오늘 이 병든 세상 속에서 길을 잃은 성도들에게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대형교회, 유명목사에 열광하고 이민교회가 장로, 권사, 집사 직분에 목숨 걸고 다른 이들보다 목소리 크고 돈 많이 벌고 더 대접받는 것이 복받는 것인 줄 아는 세태가 얼마나 참된 겸손과 거리가 먼 것인지를 고발합니다.
C.S.루이스는 말하기를 ‘겸손이란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잊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남들보다 못 하다고 강조하는 것은 건강치 못 한 자기비하일 수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르치기를 겸손이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남을 자신보다 높이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빌 2:3입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자신을 잊는 것이 겸손이라는 말은 우리가 왜 이처럼 참된 겸손과 멀게 살아가는지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인간이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자기를 잊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또 말하기를, ‘부패한 인간이 온 힘을 기울여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자아를 내려놓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나의 뜻, 나의 고집, 나의 계획, 나의 욕망, 나의 체면을 내려놓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려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만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아의 늪에 머리 끝까지 빠져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잊을 수 있습니까? 자연인으로서 우리는 겸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겸손하지도 못 합니다. ‘저는 겸손한 편입니다.’라는 코미디 같은 소리는 무시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런 우리가 어떻게 겸손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유일한 길은 성령님 안에서 우리의 시선이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신 사명에 집중하는 것 뿐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비로소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영광에 눈먼 성도는 비로소 자신을 더 이상 바라보지 않습니다. 태양보다 찬란한 그 영광을 보면 촛불보다 못 한 자신의 영광을 잊어버립니다. 자신이 그 분의 신발끈을 묶을 종이 될 자격도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엘리야인지 모세인지 더한 무슨 지도자인지는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태양을 보지 못 한 채 촛불의 빛을 외면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캄캄한 밤에 촛불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아는데 왜 이 촛불을 무시해? 이 촛불 없이 한 벌 다녀볼거야? 이 촛불도 없는 주제에 덤비기는? 어떻게 눈 어둡고 미련한 우리가 그 촛불에 목숨걸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전히 어두운 밤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 미련함을 버릴 길이 정말 없습니다. 누구만이 그 미련함으로부터 해방됩니까? 찬란한 태양이 온 세상을 비추는 낮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바리새인 사울은 어두운 밤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빛에 취해 살아갔습니다. 자신이 이룬 학식과 열심과 성과에 도취되어 살았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더 큰 성공을 위해 더욱 열심을 내어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기세등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찬란한 빛을 보고 눈이 멀었습니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만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빛을 잊어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밝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에 눈이 멀어 자신의 빛을 잊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에게 눈 뜨고 자신에게 눈 감은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빛에 취해있는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은 누구의 빛을 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빛을 보는 영의 눈을 뜨고 참된 겸손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