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3 하나님을 만나는 곳 / 요 2:13~22

20201213 하나님을 만나는 곳 / 요 2:13~22

요 2:13-22/하나님을 만나는 곳

201213 요한복음6/대강절3주
건물중심신앙
코로나판데믹 상황에서 교회가 맞이한 가장 큰 변화는 대면예배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민교회는 초기 두어 달은 전 교인이 온라인예배만 드리다가 이제는 일부 교인은 현장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교회도 주정부의 행정명령을 따라 수용인원의 25% 정도인 팔팍 50명, 오클랜드 100명 이하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민교회가 이런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과 달리 한국교회는 적잖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초기부터 정부방역정책에 대한 반발이 상당히 커서 대면예배를 포기할 수 없다는 교회가 속출했습니다. 교회에서 집단감염이 발생할 때마다 여론의 비난을 직면했지만 아직도 대략 15% 정도의 교회는 대면예배를 고집하고 있다고 보도됩니다. 일부교회가 대면예배를 포기하지 못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대면예배 고집을 비판하는 이들은 헌금이 줄어드는 것 때문이 아니냐고 합니다만 대면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은 아무도 헌금이야기는 않습니다. 이들의 가장 두드러진 명분은 온라인예배는 참된 예배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한 자리에 모여서 대면하여 드려야만 성찬, 헌금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같은 예배의 요소들이 충족될 수 있기에 대면예배만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대면예배가 참된 예배라면 온라인예배는 참된 예배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대부분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못 하는 것일까요? 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일까요? 코로나판데믹의 시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앙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 본문 예수님의 성전정화사건을 통해 그 답을 들어봅니다.
성전정화사건
모여서 드리는 대면예배만이 참된 예배일 수 있다는 주장은 교회건물로만 참된 예배의 장소를 제한단다는 의미에서 건물중심신앙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이 건물중심신앙은 뿌리가 깊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성전이란 건물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중심신앙은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성전정화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본문은 요한복음 2장 후반부입니다. 1장에서 예수님이 요한의 제자 안드레를 포함한 여러 초기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지난 몇 주에 걸쳐 살펴보았습니다. 2장으로 넘어가면 1장에서 부름받은 제자 중 하나인 나다나엘의 고향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사건이 소개됩니다. 이 본문은 제가 설교기록을 보니 두 번 다루었기에 넘어가고 오늘은 본문 2장 후반부의 성전정화사건을 살펴보려 합니다.
유월절을 지키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이면 모든 유대인 남성들은 절기를 지키러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야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2장, 6장 그리고 11장에 유월절을 지킨 장면이 세 번 등장하기에 학자들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3년으로 계산합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성전의 서쪽 회랑에 선 안나스의 장터라 불리는 시장에 서셨습니다. 거기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14-16절을 보십시오.
(요 2: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요 2: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성전 안에 이런 시장을 만들게 된 이유 때문에 화가 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요 2: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누가복음을 보면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눅 19:46)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 하시니라.
즉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 하나님을 만나는 곳 성전을 장사하는 집, 탐욕이 지배하는 강도의 굴혈 즉 시장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어떻게 시장바닥으로 바뀌어 버렸을까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성전을 둘러싼 욕망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1,000년의 역사를 지닌 이스라엘의 종교적, 정신적, 정치사회적 삶의 중심으로 그 무엇으로도 대체불가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만든 제 1성전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무너졌지만 포로상태에서 귀환한 스룹바벨이 만든 제 2성전을 헤롯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로 짓다시피 하면서 예수님 당시에는 고대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의 웅장함을 자랑하였습니다. 정통 유대인도 아니면서 로마를 등에 업고 권력을 쥔 헤롯을 유대인들은 모두 미워하였지만 그가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개축한 성전만큼은 모두가 자랑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우람한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절기 때마다 전국에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바치는 절기예물을 포함해 평소 내는 성전세에 이르기까지 성전에 모이는 돈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 성전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관리하는 것이 당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대개 로마황제에게 큰 뇌물을 바치고 자리를 산 유대총독은 역시 자신에게 많은 뇌물을 바치는 이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제사장의 자리를 차례로 차지한 안나스와 그의 사위 가야바는 성전의 서쪽 회랑에 시장을 열고 역시 자신들에게 큰 돈을 내는 상인들만 들어와 장사를 하도록 허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시장을 사람들은 안나스의 시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장상인들은 대제사장에게 바친 뇌물을 회수하기 위해 성전제사의 제물인 양, 소, 비둘기 등을 다른 곳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았습니다. 또 타지역에 온 유대인들의 다른 화폐로는 제물을 살 수 없었기에 당시 유대화폐 세겔로 환전해주는 환전상들도 많은 수수료를 붙였습니다. 그럼 제물을 밖에서 사서 끌고 오면 되지 않는 것입니까? 멀리서 제물을 끌고 오기는 불편하였을 뿐 아니라 안나스의 시장에서 사지 않은 것은 제사장들이 살펴보고 흠이 있다고 퇴자를 놓았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이 곳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중들은 헤롯, 총독, 대제사장들, 상인과 환전상들을 욕망을 위해 그렇지않아도 가벼운 그들의 주머니를 털리며 비참하게 살았지만 웅장한 성전에 와서 요란하고 화려한 제사를 드리며 그들의 힘겨운 삶에 조금이나마 위로와 보상을 받았습니다.
성전중심신앙
예수님은 시끌벅쩍한 안나스의 시장 뒤에 가려진 이 모든 욕망의 수레바퀴가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아시고는 그들이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분노하셨습니다. 이들의 욕망이 합법적으로 충족될 수 있도록 한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요? 바로 성전중심신앙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치고 대중들이 기꺼이 수용한 믿음은 이 곳 예루살렘 성전에 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오늘날 교회라고 불리는 건물이 아니면 참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믿는 이들의 예배당중심신앙과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의 성전중심신앙이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예수님을 진노케 했던 것처럼 오늘날 예배당중심신앙도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신앙의 자리를 예배당 안에 가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예배당을 성전이라 부르며 사실상 2천 년 전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다름없는 성전중심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당중심신앙은 예배당 밖의 삶의 자리, 가정과 일터와 사회에서의 삶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예배당 안에서 예배하고 봉사하고 기도하는 것이 곧 신앙의 전부라는 그릇된 믿음을 낳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신실한 신앙인인데 사회에서는 부도덕한 일로 비난받는 기독교인이 속출하는 것입니다. 또한 코로나가 퍼져 이웃에게 고통을 주든말든 예배당에 나가서 나의 종교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편협한 신앙인도 양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분노는 당시의 성전중심신앙이나 오늘날의 예배당중심신앙이 모두 참된 성도의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웅변해 주십니다. 그러면 성전도 아니고 예배당도 아니고 무엇을 바라보고 우리는 신앙생활해야 합니까? 이어지는 장면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참된 성전
예수님의 행동에 화가 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표적을 요구합니다. 그 의미는 표적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인 것을 증명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렇지 못 하다면 감히 성전과 종교지도자의 권위에 도전한 예수님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경고인 셈입니다. 그 요구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요 2: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이 말씀에 황당하게 여긴 유대인들은 헤롯이 무려 46년 동안 지어왔고 아직도 공사 중인 이 거대한 성전을 네가 어떻게 3일 만에 일으킨다는 거냐고 추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유대인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고 당신의 육체야말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참된 성전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요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여기서 당시나 지금이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다가가고 바라보아야 할 참된 성전이 어디인지 드러납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이나 스룹바벨, 헤롯이 지은 성전도 아니고 오늘날 아름답게 장식되고 파이프오르간이 은은히 울려퍼지는 예배당도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당신 안에 거하신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지속적으로 선포하시는데, 앞서 살펴보았던 나다나엘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51) (예수께서 나다나엘에게)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그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은 들판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던 야곱이 꿈에 본 환상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들판인 줄 알았던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한 것을 깨닫고 그는 제단을 쌓고 그 곳의 이름을 벧엘 곧 하나님의 전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벧엘은 곧 성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야곱이 본 환상이 당신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 당신이야말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허물면 3일 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더 이상 건물인 성전중심신앙에 갇혀 살지 말고 살아있는 성전이 그리스도중심신앙으로 거듭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오늘날도 여전히 예배당중심신앙에 갇혀 있는 우리들에게 이제 그리스도중심신앙으로 거듭나라는 촉구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중심신앙
대면예배를 마음껏 드릴 수 없는 상황은 분명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많은 이들이 연약한 이들의 신앙이 흔들릴 것과 교세의 위축을 염려합니다. 이 염려는 분명 현실이 될 것입니다. 아무 피해 없이 예전으로 돌아가리라는 순진한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도전은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성도들과 교회에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예배당중심신앙에서 그리스도중심신앙으로 거듭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오순절 성령세례로 탄생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없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박해가 본격화되기 전까지는 안식일에 성전에서 모이고 안식 후 첫날에는 삼삼오오 흩어져 가정집에서 모였습니다. 박해가 시작되고 유대교가 그들을 출교하기 시작하자 더 이상 성전을 방문하지 못 하고 이 곳 저 곳 가정집에서 흩어져 모였고 이런 상황은 4세기에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기 전까지 수백 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심지어 박해기간에 그들은 땅 밑에 동굴에 숨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화려한 성전도, 잘 꾸며진 예배당도 없었지만 교회 역사상 가장 순수하고 뜨거운 믿음을 유산으로 남겼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온라인으로 예배하느라 주일에도 각자 가정에 머무를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예배가 참되지 않거나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믿음의 울타리라고 착각했던 잘 장식된 교회건물, 우리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게 했던 교인들과의 교제 그리고 아름다운 찬양대와 목회자와의 접촉이 줄어든 만큼 우리 신앙의 중심이어야 할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채우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시간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어 우리의 가정과 일터를 진정한 예배의 자리로 만들 수 있습니다. 내 예배, 내 신앙, 내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여 코로나를 퍼뜨리든 말든 상관없다는 이기적인 종교심을 버리고 오히려 코로나로 신음하는 이웃을 위해 자신의 만족을 구하지 않고 이웃을 돌아보며 섬기는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이 판데믹의 고난은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위기입니까, 그리스도에게 더 가까이 가게하는 기회입니까? 예배당중심신앙을 내려놓고 그리스도중심신앙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