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7 위대한 2인자 / 요 3:22~30

20210117 위대한 2인자 / 요 3:22~30

요 3:22-30/위대한 2인자

210117 주일설교 요한10
2인자 리더십
애플, 아마존과 더불어 전 세계 시가총액 1위를 다투는 기업 마이크로소프트와 그 기업을 일군 세계최고의 부자 1위 자리를 오르내리는 빌 게이츠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겁니다. 컴퓨터 쓰는 사람치고 그가 만든 윈도우OS를 써보지 않은 이들도 없을 겁니다. 최근 한국 선교단체 인터콥 대표가, 빌 게이츠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퍼뜨렸고 자신이 만든 백신을 통해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려고 한다는 음모론을 퍼뜨리고 있다는데 설마 우리 교회에 이런 데 속아넘어가는 분들은 안 계시지요? 아무튼 그는 기업의 성공에 더해 아내와 함께 만든 빌&멀린다게이츠재단을 통해 제3세계 보건의료확대와 빈곤퇴치 등 귀한 일을 많이 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 그의 성격은 원만치 못 한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과 경쟁심이 어찌나 강했던지 부모에게조차 절대 지는 법이 없고 이 때문에 정신과치료를 받았고 의사는 부모에게 이 아이의 승부욕을 꺾을 수 없으니 부모가 져주는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런 성격은 마이크로소프트를 창업한 후에도 여전했는데 직원들의 잘못을 욕설까지 하며 맹렬히 추궁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그가 일으킨 이러저런 갈등을 지혜롭게 봉합하여 오늘날의 마이크로소프트가 있게 한 일등공신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2인자로 불린 스티브 발머를 꼽습니다.
빌 게이츠가 단 한 번도 사과하거나 잘못을 인정한 적이 없었던 반면 스티브 발머는 늘 직원들을 격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빌 게이츠에게 염증을 느끼고 회사를 떠나려는 훌륭한 인재들을 다독이고 격려하여 회사를 위해 공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없는 빌 게이츠의 천재성을 자신에게 있는 인내심으로 보완하였습니다. 그는 주목받는 편이 아니어서 그가 CEO에 오른 후에도 늘 마이크로소프트하면 빌 게이츠를 떠올렸고 실제로 공공연히 사람들은 물러난 빌 게이츠가 실질적인 CEO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도 빌 게이츠는 많이 들어보셨어도 스티브 발머는 처음 듣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빌 게이츠를 밀어내거나 독립하여 자신이 1인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묵묵히 회사를 위해 일했습니다. 그래서 세간에서는 스티브 발머가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이룬 최고의 공적은 ’20년 이상 빌 게이츠를 참아냈다는 것’이라고 평합니다. 빌 게이츠조차도 자신이 한 가장 잘 한 결정은 ‘스티브 발머를 CEO로 영입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스티브 발머는 21세기에 주목받는 소위 ‘2인자 리더십’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2인자 리더십은 1인자의 성장과 그로인한 공동체의 성공을 위해서 기꺼이 드러나지 않는 2인자가 되어 섬기는 태도를 말합니다. 이런 2인자 리더십을 반드시 배워야 하는 곳이 있다면 어디일까요? 기업, 관공서, 정부, 군대 등 필요치 않은 곳이 없습니다만 그 어느 곳보다 교회가 이를 반드시 배워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왜 2인자 리더십이 필요할까요? 우리가 높여야할 1인자는 그럼 누구일까요? 요한복음에 다시 등장한 세례 요한을 통해 답을 들어봅니다.
질투는 나의 힘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가 밤에 니고데모와 대화를 나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대땅에 속한 요단강 하류로 이동하셔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한편 이 지역에서 세례운동을 하던 세례 요한은 사마리아 지방에 속한 애논으로 이동하여 사마리아인에게까지 세례를 베풀고 가르쳤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이 유대인들 뿐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며 크게 확장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새롭게 주목받는 예수님의 세례운동에 대해 경계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긴장감은 26절에서 드러납니다.
(요 3:26) 저희가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이(예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우리는 선발주자이고 예수라는 랍비는 후발주자인데 그의 세례운동의 규모가 우리를 추월했습니다. 우리가 이대로 있으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제자들의 마음에는 경쟁심 이나 시기심 혹은 주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이런 심리를 우리는 자주 겪지 않습니까? 이민 올 때 내가 도와주고 소개해 주고 자리잡는데 도와줬는데 어느 새 나보다 더 성공해서 이젠 내가 아쉬운 소리를 해야할 정도로 잘 나갑니다. 내가 전도하고 양육하고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가르치곤 했는데 어느 새 나보다 더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직분자가 되어서 나보다 더 교회 주인노릇을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나가 개척하고 어려울 때 우리가 도와주기도 했는데 어느 새 우리 교회보다 규모도 커지고 사역도 더 열심히 하고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습니다. 이럴 때 우리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인간인 이상 이런 마음이 전혀 안 든다고 하면 거짓말일 겁니다.
우리나라 옛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반면 독일속담에는 ‘타인의 불행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라고 합니다. 독일어 ‘샤덴프로이데’가 바로 그런 심리를 표현하는 말인데 고통이란 의미의 ‘샤덴’과 기쁨이란 의미의 ‘프로이데’의 합성어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욕심과 시기와 교만입니다. 1인자였던 이가 2인자의 자리로 떨어지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기를 쓰고 어디서나 1인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시기로부터의 자유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집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마음에 가득한 시기심을 버리고 평안을 누릴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의 말이 그 답을 줍니다.
(요 3:27)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즉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몰려가는 것은 하늘에서 주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운동이 예수님보다 뒤쳐지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믿음입니다. 세상에는 부조리한 일들도 적지않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일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집니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더 좋은 성적을 받습니다. 열심히 일한 비지니스맨이 더 성공합니다. 열심히 연습한 가수가 노래를 더 잘 부릅니다. 물론 타고난 재능으로 인한 예외도 있고 부정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반칙하는 선수 있다고 게임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축구경기에는 반칙도 일어나고 오심도 발생하지만 아무튼 시합은 계속 합니다. 한두 게임은 오심 때문에 이길 게임을 지고 운이 좋아 질 게임을 이기지만 긴 시즌을 달려가다보면 결국 성적은 팀실력대로 수렴합니다. 우리 인생은 종국에 가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현실에 대해 시기와 불만 대신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일인자 그리스도
그리고 요한은 우리가 기꺼이 2인자가 되어 높여야 할 1인자를 소개해 줍니다. 28절입니다.
(요 3:28)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위해 보냄을 받은 2인자라는 사실을 조금의 시기도, 질투도, 불만도 없이 고백합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드러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1인자로 모시기 위해 부름받은 2인자들입니다. 만약 내가 인생의 1인자가 되어 모든 일이 그 분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2인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2인자는 1인자의 뜻을 구합니다.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2인자는 자신이 존중받는 데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자 애를 씁니다. 2인자인 우리는 그 분의 그림자요, 그 분을 위한 땔감이요, 그 분이 사용하시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기와 질투를 이기는 비밀도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2인자로 살면 이웃에게 느끼는 시기와 질투로부터도 해방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2인자는 이웃을 위해서도 기꺼이 2인자가 됩니다. 그러면 이웃의 성공에 시기와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하고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그 마음을 성령님이 다스려주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마음이 됩니다. 연인의 마음이 됩니다. 스승의 마음이 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식을 시기하고 연인의 질투하고 제자가 안 되기를 바랍니까?
들러리의 기쁨
세례 요한은 그 마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29절입니다.
(요 3:29)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호세아나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신랑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신부로 비유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 비유를 가져와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세례를 받으러오는 백성들을 신부로 묘사합니다. 이는 곧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임하여계심과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새언약의 백성과의 영적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역사, 거듭남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는 곧 구원이 일어나는 천국잔치를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은 그 구원잔치에 참여한 하객이자 신랑이신 그리스도 곁에서 그를 돋보이게 만들고자 하는 들러리입니다. 이 들러리는 이 잔치가 기쁘고 신랑이 순결한 신부를 맞는 것이 기쁘고 이 잔치에서 먹는 구원의 양식이 기쁘고 모든 것이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그런데 시기나 질투가 끼어들 틈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시작된 천국잔치를 매일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랑의 부름을 받은 순결한 신부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을 기뻐하는 들러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랑의 곁에서 오직 그 분만 돋보이게 하려는 2인자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자신이 더 돋보이고자 합니다. 마치 결혼식장에서 신부보다 더 이쁘게 보이려고 한껏 멋을 내고 진한 화장을 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정신나간 여자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리라
참 그리스도인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높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춥니다. 30절입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그리스도가 흥하기 위해 기꺼이 나는 쇠하겠다는 정신, 이것이 바로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빌 1:15) 어떤 사람들은 사실 시기와 경쟁심으로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빌 1:17) 이기적인 동기에서 전하는 자들은 …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나를 괴롭힐 생각으로 하는 것입니다. (빌 1:18)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가식으로 하든지 진실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니 나에게는 기쁜 일입니다. 또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전파될 수 있다면 내가 괴롭힘을 당하든 말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괴로워도 그리스도가 전파된다면 기쁘다는 말입니다. 왜입니까? 그는 그리스도를 일인자로 높이기 위해 기꺼이 자신이 이인자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는 참 그리스도를 일인자로 높이고 있습니까? 그래서 형제와 자매, 이웃마저도 일인자로 높이기 위해 기꺼이 이인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거듭난 성도입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천국잔치에 들어와 있습니다. 천국잔치의 기쁨과 감사와 감격이 여러분의 마음에 오늘도 흘러 넘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