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1-4/사마리아로 가자
210131 주일설교
요한을 이겼다
지난 주에 우리는 사마리아땅 수가성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여인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 사마리아로 들어오시기 전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니고데모를 만나셨던 주님은 얼마 후 유대에 속한 요단강변으로 가셔서 세례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아마도 초기에 세례 요한이 세례운동을 했던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 근처가 아니었을까 짐작합니다. 그 시점에서 세례 요한은 세례운동의 범위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사마리아에 속한 애논에서 세례운동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세례운동은 그 규모가 점점 커져서 세례요한의 그것을 능가했습니다.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쉴새없이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3장에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이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껏 들떴습니다. 저녁이 되어 사람들이 물러가자 베드로가 소리쳤습니다.
“예수님, 들으셨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세례받는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가는 사람보다 더 많아졌답니다. 드디어 말입니다. 드디어!” 흥분한 그의 목소리가 한껏 고무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아한 표정으로 베드로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드디어라니, 뭐가 드디어라는 말이냐?” “뭐가 드디어라니요, 우리가 세례자 요한보다 한참 늦게 세례운동을 시작했잖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드디어 세례자 요한을 앞질렀다니까요.” “그래서?” “아, 그의 제자들이 우리를 얼마나 무시했는지 주님도 아시잖습니까? 주님이 자기들 스승에게 세례를 받았다며 우리가 자기들의 제자라도 된 양 얼마나 콧대가 높았습니까? 모르긴 해도 이제 코가 납짝해졌을 겁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흥분한 얼굴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셨습니다. “베드로야, 잘 들어라. 세례 요한과 나를 비교하는 것이나 그의 제자들과 너희들을 비교하는 것이나 모두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짓이다. 그렇게 비교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 하면 너는 언제까지고 불행할 거야. 곧 너희들끼리도 서로 비교하며 누가 더 크냐를 놓고 싸울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멍하니 듣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야, 몇 년 후 오순절에 성령님이 오시면 너는 수 천 명에게 세례를 베푸는 교회의 지도자가 될 거야. 그렇더라도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필요하신 때에, 필요한 자리에 네가 있었기 때문일 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네가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뛰어나서가 아니야. 또 언젠가 너는 나를 위하여 말로 다 못 할 고난을 겪게 될 거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를 통해 이루시려는 뜻이 있어서 그런 거야. 그러니 내가 무슨 잘못을 해서 이런 고난을 당하느냐고, 나는 이렇게 고난당하는데 다른 제자들은 어떤 고난을 당하겠느냐고 원망하지 않도록 해라. 물론 지금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 하겠지만 성령님이 오시면 내가 한 이 모든 말을 생각나게 하실 거다.”
실제로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만나셔서 그가 주님을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할지 예언하시자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21: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요 21: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공동번역)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의 베드로 뿐 아니라 오늘 우리도 귀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끊임없이 세상에서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 비교하는 것입니다. 비교하는 마음은 우리를 죄와 고통에 빠뜨립니다. 조금 높아지면 우쭐하고 조금 낮아지면 괴롭습니다. 조금 성공하면 이웃을 멸시하고 조금 실패하면 스스로를 멸시합니다. 비교하는 마음으로부터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이 크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깨닫게 되면 비로소 곁에 있는 형제, 자매와 비교하는 부질없는 짓을 멈출 수 있습니다. 토토리끼리 끼재기를 해봐야 높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심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십시오. 부질없는 비교로부터 해방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갈릴리로 가자
잠시 후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주님이 안 계실 때 바리새인들이 왔다갔습니다. 그들이 묻기를 여기 몰려오는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가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것이 사실이냐고 하던데요.” 예수님은 잠시 묵상을 하시더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아무래도 유대사역은 잠시 접고 갈릴리로 돌아가야겠다.” 이번에도 베드로가 펄쩍 뛰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주님, 물 들어올 때 노저으랬다고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오는데 유대사역을 접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조금만 더 하면 유대지역 사람들이 모두 주님께 몰려와 세례를 받을 테고 이 추세라면 유대의 왕이 되시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살짝 미간을 찌푸리셨습니다. “베드로야, 잘 들어라. 나는 왕이 되기 위해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이지. 그리고 그 바리새인들은 이미 세례 요한에게 가서 그의 정체를 조사했다. 그가 자신들의 편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 조만간 종교지도자들의 암묵적 동의 하에 헤롯 안티파스가 그를 체포할 거다. 그 후엔 그가 요한을 …” 잠시 말을 멈춘 예수님의 얼굴엔 깊은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하나님은 의인들의 고난을 슬퍼하시고 깊은 고통을 겪으신다. 하나님은 요한을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은 다시 마음의 고통을 다스리시려는 듯 말씀을 멈추고 입술을 굳게 다무셨습니다. 마침내 이렇게 입을 여셨습니다. “나 역시 그와같이 고난의 길을 가야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제자들을 하나하나 눈맞추셨습니다. “너희들의 마음에 진리의 씨앗을 충분히 뿌리고 내가 누구인지 깨닫도록 가르칠 시간이 필요해. 그래야만 내가 떠난 후에도 너희가 성령님의 지도를 따라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잠시 갈릴리로 물러가자꾸나.”
다음 날 아침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는 나다나엘의 마음에 자주 묵상하던 잠언이 떠올랐습니다.
(전 3:1)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 (전 3:4)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 (전 3: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아무리 좋은 일, 선한 일도 적절한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적절한 때를 기다립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첫 설교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라고 하셔서 당신이 때를 기다려오셨음을 보여주셨습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 마리아가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해결해 주기를 요청하자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는 말씀으로 역시 때를 기다리고 계셨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때를 기다리면 길이 열립니다. 때를 기다리면 보이지 않던 길이 드러납니다. 때를 기다리면 더 좋은 길이 열립니다. 때를 기다리면 더 많은 길이 보입니다. 때를 기다리면 역전의 기회가 생깁니다. 인생의 진정한 승자는 기다리는 이입니다. 서두르지 말아야 합니다. 조급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인내해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견뎌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때가 되면 바닥을 찍고 다시 도약하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드립니다.
사마리아로 가자
다음 날 아침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나서셨습니다. 예수님이 발걸음은 북쪽요단계곡이 아닌 서쪽산지를 향해 옮기시자 제자들의 의아한 듯 물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갈릴리로 가신다면서요?” “그럼, 갈릴리로 가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말이다.” “네? 사마리아를 통과하신다고요?”
제자들은 당연히 당시 유대인이라면 으례 그렇게 하듯 요단강 계곡을 따라 올라가 갈릴리로 갈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오가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지름길인 사마리아 산지를 가로지르는 길을 피하고 요단계곡을 통과하는 우회로를 택했습니다. 그것은 정결과 안전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방인보다 사마리아인들을 더욱 경멸하였습니다. 남북왕국시대 북왕국의 후손이었던 그들은 앗수르에 멸망하면서 이방인과 피가 섞인데다가,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왔을 때 사마리아인들은 유다인들의 귀환을 반대하고 예루살렘성과 성전을 짓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때 쌓인 앙금으로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철천지 원수지간으로 지냈습니다. 종종 순례객들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강도를 만나자 사마리아 통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주님, 최근에 순례객들이 강도를 만났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건, 너희들이 있잖아.” “주님, 그건 맞는 말씀입니다. 저만 믿으십시오.” 그물질로 굵은 팔뚝을 내보이며 야고보가 허세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안드레가 눈치를 주며 나섰습니다. “사마리아인들과 만났다고 소문이라도 나면 유대인들이 주님을 좋지 않게 볼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특히…” 예수님은 씨익 웃으시며 돌아서 걷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떠나는 것 아니냐? 바리새인들에게 욕먹을까봐. 빨리 가자꾸나.”
예수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으려니 도마가 제자들을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아, 예수님이 가시겠다는데 까짓것, 가자고. 갈릴리에서 거라사로 건너 가자고 했을 때도 다들 갸우뚱했었잖아. 이방인들의 지역에 뭣하러 가시냐고. 다들 기억나지? 거기서 귀신에 들린 사람을 고치고 돌아오셨잖아. 아, 사마리아에서도 누군가 만날 이가 있으니 가시려는 것 아니겠어?” 예수님은 깜짝 놀라 도마를 빤히 바라보셨습니다. “와우~ 도마 말이 맞다. 사마리아에서 만날 여인이 있다. 그녀는 지금 절망적이야. 그녀는 도움이 필요해. 아버지께서 그런 그녀를 위한 놀라운 계획이 있단다. 그녀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첫 전도자가 될거야.”
예수님은 사실상 사마리아를 우연히 지나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통과하신 겁니다. 바로 지난 주에 우리가 만났던 수가성의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예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의심하고 비아냥댈 때조차도 예수님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셨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녀를 사마리아를 위한 첫 전도자로 삼으시기 위해 그녀를 만나시고 가르치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향한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레미야 29장입니다.
(렘 29:11)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새번역)
주님은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은혜의 계획을 가지고 모세에게 기적을 보이시고 선하신 계획을 가지고 들판의 어린 목동 다윗에게 영감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여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그 선하고 위대하신 계획 때문입니다. 당연히 우리 인생을 헛되고 허무하고 절망하는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 아닙니다. 별처럼 빛나고 보석처럼 가치있고 태양처럼 밝은 것으로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그 주님의 계획을 믿고 순종할 때 우리 삶은 역전됩니다. 죄와 절망에 빠져 우물가를 찾아온 여인의 인생이 위대한 전도자의 그것으로 바뀐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주님의 손에 의해 선하고 위대한 것으로 바뀔 것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