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4:27-38/거저 거두는 추수꾼
200207 주일설교/요한13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에피소드 하나가 기억납니다. 미국 어느 시골 마트에 한 노인이 쇼핑을 하러 나왔습니다. 계산대에 장바구니를 올려놓고 지역신문에서 오려온 쿠폰을 한 주먹 내밀더니 할인을 요구했습니다. 50센트, 1불 정도의 할인쿠폰을 점원이 하나씩 계산하다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할머니, 이 쿠폰이 대부분 유효기간이 지났어요. 여기 8장 5불어치는 할인이 안 돼요.” 그러자 노인이 무척 불쾌하다는 듯 대꾸했습니다. “그럴리가 없어. 내가 유효기간도 모를까봐. 다 할인해 줘.” “여기 날짜 보세요. 지났잖아요.” “이 쿠폰들은 다 지난 주 신문에 있던 거야. 유효기간이 그렇게 짧은 거면 마트 잘못이지.” “그럴리가 없어요. 보통 한 달 이상 유효기간을 줘요. 지난 달 신문 아니예요?” 그렇게 점원과 노인간의 언쟁이 커지다가 급기야 사장이 뛰어나왔습니다. 매장이 시끄러워지니까 점원에게 그냥 할인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더 화가 났습니다. “내가 거지야? 그냥 줘버리게? 나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거니까 정당하게 할인해 줘. 그리고 날 거지취급한 점원과 사장 모두 사과를 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그만 이 분이 혈압이 올라서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5불짜리 쿠폰 때문에 이 노인이 큰 일 날뻔 했다는 것입니다.
그 글은 이 노인이 왜 이렇게 사소한 것에 집착하느냐고 묻습니다. 5불의 돈과 무시당했다는 자존심, 생각하기에 따라 중요하다면 중요하지만 사소하다면 정말 대수롭지 않은 문제인데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노인에게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문 마지막 면 구석의 부고란까지 꼼꼼히 다 읽어도 남는 게 시간이고 할 일도 없던 그 노인에게는 쿠폰을 모으고 할인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게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500만 불, 5,000만 불어치를 거래하는 비지니스맨이라면 5불 때문에 하루 종일 마트에서 싸움할 이유가 없겠지요. 시간이 돈일테니 말입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일터에서 수도없이 겪는 자존심의 상처를 일일이 마음에 담아둘 수 없겠지요. 5불은 하잖은 돈이고 자존심의 상처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 노인은 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는 뜻도 물론 아닙니다. 글의 요점은 더 중요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 한 이는 누구라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제자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마치신 직후의 우물가에서 벌어진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이 장면에서 제자들은 사소한 것에 집착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합니다. 먹을 것을 사러 갔던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님이 그녀와 대화하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대화라는 차원에서 당시의 관습을 무시한 것이었고, 경건한 남성과 낯선 여인 사이에 대화라는 점에서 랍비들의 금기를 외면한 것이었고, 여자와 나누는 신앙에 관한 대화라는 점에서 율법교육은 오직 남자만을 위한 것이라는 전통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관습과 율법, 전통의 굴레에 갖혀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 하고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예수님,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면 어쩌시렵니까? 우리 눈에도 이상하게 보입니다.’
그녀가 떠나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먹을 것을 드립니다. 오래 걷다 지치고 배고프신 예수님에게 기력을 회복할 먹을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32절입니다.
(요 4:32)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 (요 4: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내게는 너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관습, 전통, 평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너희가 염려해주는 내 배고픔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그럼 그 하나님의 뜻,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35절이 알려줍니다.
(요 4: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주님이 집착하시는 것
그것은 바로 생명을 추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보통 씨를 뿌리고 추수할 때까지 4달이 걸립니다. 그래서 파종한 농부는 들판을 바라보며 4달을 기다려야겠네,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추수를 위해서라면 더 기다릴 필요가 이제는 없다, 생명을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영의 눈을 뜨고 세상이라는 밭을 바라보면 추수할 곡식, 영혼들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영의 눈을 뜨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관습과 전통의 굴레를 벗어버리지 못 합니까? 제자들은 왜 육체의 배고픔 이상의 것을 알지 못 할까요? 그것은 영의 눈을 뜨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관습, 전통, 평판, 시선을 극복할 만한 비전, 배고픔과 추위와 불편함도 잊고 몰두할 만한 사명을 발견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의 눈을 뜨셨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받았기에 제자들의 손발을 묶고 있던 굴레를 거뜬히 벗어버리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일희일비하고 불안하고 염려하고 괴롭고 고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님이 보고 계시는 비전과 사명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닫혀 있기에 우리가 집착하는 것은 오직 세상에서 얼마 버냐, 얼마나 잘 사냐, 얼마나 대접받고 사냐, 얼마나 인정받고 사냐, 얼마나 배 안고프고 사냐 뿐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주님의 사역이 헛짓처럼 보입니다. 몇 불짜리 쿠폰에 목숨을 걸듯 잘 먹고 잘 사는 문제에 우리의 모든 삶을 다 겁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의 제자라면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기를 명하십니다. 우리 곁에, 가족 중에, 일터에, 지역사회에 추수를 기다리는 생명이 가득한 것을 보라고 명하십니다. 주님의 은혜로 영의 눈을 뜨고 추수할 세상을 바라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추수꾼 예수님
그럼 그 추수는 누가 하는 것일까요? 36-37절입니다.
(요 4: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4: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여기서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는 각각 누구를 가리킬까요? 먼저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심고 뿌리셨습니다. 구원의 씨 즉 생명의 말씀을 뿌리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의 후손을 통하여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이 퍼져갈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입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창 12:3) … 땅의 모든 민족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 이스라엘의 역사 내내 선지자들을 보내어 생명의 말씀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영혼의 추수에 필요한 네 달이 지났습니다. 추수할 때가 되어 추수의 사명을 받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거두시는 분, 추수꾼입니다. 예수님은 추수할 모든 준비를 마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어 이 영혼들을 추수하십니다. 이 추수로 인해 하나님과 예수님은 큰 기쁨을 함께 나누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냄받은 뿌리는 자들 구약의 선지자들과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신약의 제자들도 역시 함께 큰 즐거움을 나눕니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리는 기쁨은 특별한 은총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 4: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제자들은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을 거두는 은총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네 달이 지나기까지 생명의 씨를 뿌리고 가꾸어온 것은 그 제자들이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은 씨를 뿌리느라 땀흘리고 거절당하고 핍박당하고 심지어 순교당했습니다. 그 결과 신약의 제자들은 다 익은 영혼을 추수하게 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수고의 열매를 따는 것은 신약의 제자들입니다. 노력은 선지자들이 하고 제자들은 그 열매 따는 일에 참여할 뿐입니다. 시편의 말씀입니다.
(시 126: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을 흘린 것은 선지자들인데 기쁨을 거두는 것은 제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추수꾼으로 부름받은 것이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남이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는 겁니다. 다 이긴 게임에 마지막으로 교체되어 들어갔더니 챔피언 반지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추수의 일꾼으로 부름받았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요, 놀라운 은혜입니다. 오늘날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놀라운 은총을 입은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총과 기쁨의 추수꾼들
21세기 미국에서 사는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목회자로서 저는 누구보다 이런 은총을 거저 누린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받은 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2천 년 전 선배들은 짐승의 밥이 되고 화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굴에 갇혀 살며 권리와 복지를 박탈당하고 늘 핍박 속에 살았습니다. 불과 지난 세기만 해도 일제의 탄압 아래 의롭게 살려던 신자들은 박해와 순교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믿음 때문에 재산을 빼앗깁니까, 감옥에 갇히기를 합니까,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습니까? 우리가 전도한다고 누가 방해를 합니까, 때리기를 합니까, 욕이라도 합니까? 우리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은 채 마음껏 전도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전도가 어렵다고요? 아무런 방해도, 박해도 없는데 전도가 어떻게 어렵습니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안 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처럼 우리가 전도하느라 사십에 한 대 감한 매를 맞아봤습니까? 여러 번 옥에 갇혀 봤습니까? 풍랑에 죽을 뻔 하길 했습니까? 강도와 광야의 추위와 강과 바다의 위협에 시달려보기를 했습니까? 세상에는 익어서 추수를 기다리는 영혼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고객을 만나고 잠을 줄여가면서도 가게문을 열고 아픈 몸을 끌고서도 비지니스를 합니다. 그 정성과 노력의 십분의 일만 써도 우리는 전도가 얼마나 쉬운 일인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하고 변화시키고 감동시켜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뿌려놓으셨습니다. 선지자들이 다 일구어 놓았습니다. 사도들이 다 가꾸어 놓았습니다. 2천 년 교회역사가 그들의 마음에 추수될 준비를 시켜놓았습니다. 우리는 그 준비가 끝난 영혼들을 찾기만 하면 됩니다. 추수하려고 복음의 낫을 대었는데 거부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준비된 영혼을 기꺼이 추수될 겁니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영혼은 언젠가 추수될 것을 기대하면 됩니다. 우리는 추수꾼이니 추수하라고 보내신 주인의 명에 순종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주님이 뿌리시고 선지자들이 노력하고 제자들이 가꾼 열매를 우리가 거두는데도 거기에 상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살전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우리가 전도하고 양육하고 돌보고 기도한 결과는 주님이 다 준비하신 것을 거두는 것일 뿐인데도 이런 상을 누린다니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이런 은총을 마다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놀라운 구원역사를 보지 못 한 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다면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5달러 짜리 쿠폰에 목숨 걸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주님의 은총으로 눈을 들어 추수할 들판을 바라보고 하나님 나라의 추수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