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5:22-30/결혼식 기다리기
210411 베데스다연못4
불완전해 보이는 영생
신대원 시절 캄보디아에서 견습선교사로 반 년 정도 섬긴 적이 있습니다. 수도인 프놈펜기술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치고 한인선교사회의 여러 선교사님들을 따라다니며 사역을 배웠습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 분들도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인선교사들 사이의 사역방식의 차이로 인한 갈등, 부족한 선교비로 인한 걱정, 선교지의 열악한 자녀교육환경에 대한 우려 그리고 은퇴 후 대책에의 염려 등… 사실 평신도들의 걱정근심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선교사라면 우리 생각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쁨으로 헌신의 삶을 사는 이들이니 걱정근심으로부터 해방된 분들일 것 같은데도 그렇습니다. 선교사가 이럴진대 어떤 신도가 걱정근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말할 수 있을까요?
성경은 구원받은 백성은 영생의 삶을 시작했다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영생의 삶에서도 여전히 죄와 고난이 기세등등하고 걱정과 근심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지 못 한 것은 왜일까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은 어떤 것일까요? 영생을 시작한 성도의 삶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이런 질문의 답을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가르쳐 주십니다. 본문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친 사건으로 시작된 예수님과 유대종교지도자들의 대화의 한 대목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에게 도대체 무슨 권세로 안식일을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부르냐고 비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또 당신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 밝히심으로 우리의 질문에도 답을 주십니다.
너그러운 심판의 주
예수님의 선언에 의하면 첫째 예수님은 모든 인류의 심판을 담당하실 분이십니다. 22절과 27절을 보십시오.
(요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 (요 5: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을 담당할 재판장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입니다. 이것은 정말 얼마나 큰 복음인지 모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의 너그러우심 때문입니다. 주님은 멸시받는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고,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위해서도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합니다’라고 기도해 주셨고, 우편강도에게조차 낙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가혹하고 엄격한 재판장이 아니라 이토록 너그러운 분이 재판을 맡으셨으니 죄인인 우리에게는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더구나 그 재판장이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십자가를 기꺼이 지시는 속죄를 이루셨으니 그 얼마나 은혜로운 소식입니까? 이 은혜와 자비로우심으로 오늘 영원히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우리가 구원을 약속받았습니다. 이 복된 소식으로 인해 우리는 절망과 두려움 대신 평안과 기쁨으로 영생의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죄책감과 두려움과 절망의 돌덩이가 여러분을 짓누를 때마다 이 자비로우신 재판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고 그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생을 주시는 주
둘째,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21절입니다.
(요 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죽은 자를 살리신다! 유대인들은 이 일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마지막 심판 때에 하실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도 하나님처럼 그렇게 하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 그 일을 하실까요? 24절입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본문의 시제에 주목해야 합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는 말은 미래형입니다. 심판은 분명 미래의 일입니다. 그런데 영생은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것은 모두 현재완료형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을 믿는 이가 살아나는 때는 마지막 심판 때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지금 여기서 영적 생명을 얻어 살기 시작했고 그 사람의 소속은 이미 사망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옮겨갔다는 뜻입니다. 25절은 더욱 분명하게 밝힙니다.
(요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it is already here),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은 육신이 죽은 자가 아니라 육신으로는 멀쩡하게 살아있지만 영이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믿으면 바로 지금 이 때 여기서 그들의 죽어있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즉 영적 생명을 얻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영생의 삶을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진실로 진실로 강조하신 것처럼 저도 다시 한번 강조드리자면, 영생의 삶은 몸이 죽은 후에 영의 상태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살아있는 지금 여기서 영이 살아남으로써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 영생의 삶을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이라 하면서도 이 영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 한 채 사는 이들이 있다면 그처럼 안타까운 일이 없습니다. 마치 놀이공원에 들어와서 라이드를 하나도 안 타고 힘들게 걷기만 하다가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식당에 들어와서 밥은 못 먹고 그냥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연합해서 살아가는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이 영생이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경험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부활을 주시는 주
셋째, 예수님은 부활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영생의 삶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의 삶에 기쁨과 감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유혹과 시련의 고통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연약한 육체를 입고 병든 세상에서 여전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내전과 학살로 신음하는 미얀마 감옥에 갇힌 민주화 투사가 겪는 일과 같습니다. 미대사관에서 그 중요한 인사를 구출하여 미국에 데려오기 위해 미리 시민권을 발급합니다. 이제 그의 신분은 미국인이 되었지만 몸은 여전히 미얀마에 있으며 고통과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가 안전한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이런 상태는 지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병들고 부서지는 육신으로 인해 고통을 겪습니다. 아무리 건강을 잘 관리해도 노화와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욕구를 통제하기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어서 많은 유혹에 시달리고 넘어집니다. 미세먼지가 가득한 도시에서 아무리 좋은 공기청정기를 쓴다해도 홀로 먼지를 마시지 않는 길이 없듯이 병들고 오염된 세상에서 살기에 어쩔 수 없이 마셔야 하는 죄와 악의 공기가 있습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는 것이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매달립니다. 즉 우리가 지금 누리는 영생의 삶은 완성된 형태가 아닙니다. 영생을 시작했지만 불완전합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남해 땅끝마을 할머니가 서울구경을 처음 와서 경험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TV에서 63빌딩과 경복궁과 인사동 등 많은 볼거리를 기대하며 관광버스를 탔습니다. 버스가 가는 내내 할머니는 질문합니다. “서울 다 왔어유?” “곧 도착합니다.” “언제 도착해유?” “한 시간이면 됩니다.” 마침내 버스가 구리를 지나 망우동으로 접어듭니다. “할머니, 드디어 서울에 들어오셨어요?” “응? 여기가 서울이여? 아닌디, TV에서 보던 그런 서울이 아닌디… 집도 나즈막허고 63빌딩도 없는디? 경복궁도 안 보이는디?” “아, 서울이 커서 그래요. 경복궁을 보시려면 한 시간 정도 더 가셔야 하고요, 63빌딩을 보시려면 또 강남으로 한 시간 정도 더 가야 해요. 그런데 여기부터 서울 맞아요.” 서울의 크기 때문에 서울의 경계안에 들어와도 중심부까지 가는데 한참이 걸립니다. 한 눈에 거리 이쪽 끝과 저쪽 끝이 다 보이는 시골마을에서 살던 할머니에겐 그렇게 큰 서울을 보고 경험하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영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영생의 세계의 경계선을 넘어서 들어왔습니다. 이미 영생의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죄와 싸우고 고난에 시달립니다. 이제 막 영생의 삶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완성된 영생의 삶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영생은 연약한 육체를 입고 채 100년도 살지 못 하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무척 큰 것입니다. 그럼 완성된 영생의 삶은 어떤 것입니까? 바로 부활의 몸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27-28절입니다.
(요 5: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이 때는 장차 다가올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킵니다. 그 때는 영생의 삶을 시작하였지만 몸은 죽어 무덤 속에 있는 자 즉 세상을 떠나 주님 곁에서 안식하고 있는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마침내 부활의 새 몸을 입습니다. 새하늘과 새땅에서 살아갑니다. 영생의 완성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단절된 삶 속에 갇히기를 선택한 이들은 부활하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이것이 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요 5:3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완성된 영생의 비전
최근 한 교우의 장례예식 후 고인의 자녀가 찾아와 말하기를, 자신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못 했지만 장례식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장례예식이 끝난 후 자녀들로부터 가장 크게 위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대개 하관예식입니다. 이 때는 항상 부활의 소망을 힘주어 전합니다. 매번 하는 설교가 식상할까봐 다른 장례식에 관한 설교나 메시지 자료도 좀 찾아보았습니다. 유려한 수식어와 위로로 도배를 한 설교문들이 있었습니다만 곰곰히 생각해 보고는 결국 다시 부활의 소망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소망을 빼고는 아무리 달콤한 위로의 말을 넣는다해도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세상 그 어디에도 절망적인 죽음과 소멸의 현실을 극복할 메시지가 없습니다.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가장 중요하고도 위대한 소망입니다. 만약 성경이 이 부활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지 않았다면 그리고 예수님이 당신의 부활로 그 약속을 보증해 주시지 않았다면 바울의 말처럼 우리 기독교인만큼 불쌍한 사람들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죄와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심으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해결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의 삶을 시작케 하시고 그들의 썩을 육체 대신 썩지 않는 부활의 새 몸을 주심으로 영생을 완성시켜 주셨습니다. 그 영생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여전히 영생의 삶을 누리며 완성될 영생의 비전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젊은이들이 약혼식을 올리고 결혼식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약혼기간은 결혼의 약속을 품고 기다림이며 동시에 결혼의 기쁨을 미리 맛보는 시간입니다. 결혼식날 그들은 기다림의 보람을 찾을 것이며 약혼으로 살짝 맛본 결혼의 참된 기쁨을 온전히 누릴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약혼한 거룩한 신부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주님의 선택을 가로막을 것은 없으며 비록 우리는 신실하지 못 하지만 주님이 맺으신 약속을 깨뜨릴 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결혼식장까지 데리고 들어가실 겁니다. 부활의 새 몸을 입고 주님과 완전한 결혼의 기쁨을 누리는 그 날까지 겸손하고 신실하게 영생의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