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2 어린아이와 천국 / 막 10:13-16

20210502 어린아이와 천국 / 막 10:13-16

막 10:13-16/어린아이와 천국

210502 어린이주일
산업혁명기 아이들
오늘은 우리 교단이 지키는 어린이주일입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여러분들은 세상 모든 아이들이 우리 집처럼 사랑과 돌봄을 받으며 자라지 않는가 생각하시기 쉽습니다만 큰 착각입니다. 극히 최근 서구선진국을 제외하곤 사실 인류역사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부분의 지역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돌봄은 꿈도꾸지 못 한 채 자랐습니다.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18, 19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였던 산업혁명기 영국을 보십시오.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당시 급성장하는 산업 자본가들이 찾던 싸고 불평없고 다루기 쉬운 노동력이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6시간 씩 주 6일을 일하고 어른임금의 10-20%만을 받았습니다. 보통 공장의 노동자 3분의 1은 네 살부터 십대 초반의 어린아이들이었고 일부 공장에서는 8-90%에 달했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광산에서는 좁아서 어른들이 들어가기 힘든 좁은 갱도에 들어가는 위험한 일이 어린이 노동자들의 몫이었으며 좁은 굴뚝 청소 등에도 동원되었습니다. 남자 아이보다 힘이 약했던 수많은 여자 아이들은 매춘에 동원되었습니다. 왜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았냐고요? 그들이 갈 학교가 없었습니다. 근대국민교육제도는 영국에서 1870년 대에야 시작되었고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이 그 혜택을 보는 데는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당시 소수의 귀족, 중산층 아이들의 평균수명이 38세였으나 노동자 가정 아이들은 17세였다고 합니다. 열악한 어린이 노동착취를 막으려고 의회가 제정한 법을 보면 얼마나 어린이들이 고통을 당했는지 어렵잖게 알 수 있습니다. 1819년 의회는 ‘목화공장규제법’을 통과시켰는데 9살 이전 어린아이의 고용과 하루 12시간 이상 노동을 금지시킨 법이었습니다. 그 말은 그 때까지 9살 이전 아이들이 12시간 이상 목화공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는 말이 아닙니까.
오늘날 아이들
‘하지만 목사님, 이건 200여 년 전 아닙니까? 지금은 다르지 않나요?’ 물론 전체로 보면 그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이들의 처지가 개선되었습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과 북미를 중심으로 한 서구선진국 아이들의 처지는 극적으로 극적으로 개선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에서 아직도 약 1억 6,800만 명의 어린이가 아동노동을 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노동착취를 당하는 인구 중 18%가 아동입니다. 이들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농장, 공장, 광산, 가사노동에 시달리고 매춘까지도 강요당합니다. 방글라데시에서는 10-14세 아이 570만 명이 의류공장과 매춘산업에, 인도에서는 1,700만이 화약과 카펫제조에 동원됩니다. 21세기 지구상에서 아이들이 학교 대신 노동현장에 나가 하루 12시간 씩 일하고 다치고 임금을 받지 못 하는 일이 일상입니다. 물론 서구선진국에선 이런 일이 없지요. 하지만 우리가 언론을 통해 끊임없이 듣는 아동학대와 영아살해, 아동매춘, 인신매매는 한국과 미국도 예외가 아니란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목사님,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 가정에선 일어나지 않는데요?’ 네,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이에게 안전한 환경과 충분한 영양과 교육을 제공하는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아이들이 고통을 겪고 부모도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실제로 많이 일어납니다. 제 3세계를 기준으로 본다면 한국과 미국의 아이들은 서민가정이라 할지라도 얼마나 유복한 환경인지, 꿈에도 그리던 그런 환경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남미, 중미의 부모들이 목숨을 걸고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국경을 넘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는 못 들어와도 아이들만이라도 보내려 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렇게 유복한 환경의 아이들도 고통을 겪고 문제에 휘말리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은 왜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부모와 기성세대가 자녀와 아이들의 존재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아이들을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처럼 여기거나 혹은 돈과 시간을 잡아먹는 짐으로 여기고 혹은 미성숙하니 독립적인 인격체로 볼 수 없다 여깁니다. 그 결과 불행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기성세대의 어리석음은 2천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멸시받았던 어린아이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 하의 어린아이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여기 있습니다. 기원후 1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살았던 힐라리온이란 이가 아내 앨리스에게 쓴 파피루스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태어날 아이가 남자면 살리고 여자면 내다 버리시오.” 원치 않는 아기를 버리는 것은 당시로서는 합법적이었습니다.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겼기 때문이고 여자 아이는 노동력이 될 수 없다 여겼기 때문입니다. 기원후 375년에서야 로마제국은 법으로 이런 유아살해를 금지시켰지만 사실상 막지 못 했습니다. 헤롯왕이 저지른 유아살해사건은 당시로서는 그리 충격적인 것이라 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이들은 무지와 야만의 시대에 가장 고통당하는 약자 중 약자였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수를 셀 때 포함되지도 않았습니다. 완전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삶의 처지는 앞서 예로 18, 19세기 영국의 아이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지위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보여준 태도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13절입니다.
(막 10:13)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그들 생각에 어린아이은 어른의 소유물이며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누리는 어른들의 세계에 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어른들도 만나려고 줄 서 있는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감히 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오려는 아이들과 그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꾸짖습니다. 화를 내시기까지 합니다. 14절입니다.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누리기에 누구보다 적합한 이들입니다.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그 누구도 가로막아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기에 더 적합해서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 하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15절입니다.
(막 10: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는 그것이 얼마짜리인지, 친구는 그것보다 좋은 것을 가졌는지 아닌지를 신경쓰지 않고 놀고 즐기고 누립니다. 어른처럼 내 집이 이웃집보다 큰지 작은지, 내 차가 친구차보다 더 비싼지 아닌지를 따지느라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진 수용성, 겸손함, 자족함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누리는데 꼭 필요한 자질입니다. 그런 아이같은 마음을 품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예수님은 그 아이들을 축복하십니다. 16절입니다.
(막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인류 최초의 복 자녀
축복 즉 복을 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요,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아니 복 그 자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섭리입니다. 성경에서 복이란 단어가 처음 나오는 장면이 어디일까요? 바로 창조 직후 인류에게 복을 주시는 대목입니다. 창 1:28입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인류가 받은 첫째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생육하라는 명령은 문자 그대로 자녀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현대영어성경으로 보면 더욱 분명합니다.
Have a lot of children! Fill the earth with people… (Gen 1:28)
그러므로 자녀는 복입니다. 교회를 뛰어다니는 저 아이들은 인류의 첫 번째 복입니다. 그 아이들 자체가 현재의 복이며 부모와 기성세대와 인류에게 미래의 복이기도 합니다.
복과 은혜와 계시인 아이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아이들의 존재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 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어떤 이들은 자녀를 부모의 소유물로 여겨서 학대하고 매매하고 심지어 살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복이며 선물이며 은혜입니다. 자녀를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를 떠올리게 하는 계시입니다. 사랑스러운 자녀로 인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어렴풋이 깨닫고 속썩이는 자녀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불순종하였는지를 조금이나마 깨닫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녀를 짐으로 여깁니다. 자녀를 양육하는데 많은 돈과 시간과 정성이 들어갑니다. 그 자녀 때문에 희생하는 것이 억울합니다. 그러나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도 부모님의 희생으로 오늘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다음 세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만약 다음 세대를 위해 더 이상 희생하지 않겠다는 세대가 출현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인 이웃사랑 중 첫째가 바로 자녀사랑입니다. 내 자녀를 사랑하고 희생하지 못 하면서 어떤 이웃을 위해 사랑과 희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런 사랑과 희생을 하기 싫다면 과연 그를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떤 이들은 자녀를 미성숙하다 무시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대할 때마다 주님을 떠올리라고 하십니다.
(마 18:5)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미성숙하고 불완전한 아이를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길이며 주님의 마음을 품는 길입니다. 아이를 무시하는 것은 주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아이를 학대하는 것은 주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방치하는 것은 주님을 내팽개치는 것입니다.
인류와 천국을 위한 섬김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인류와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공헌할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무엇일까요? 아인슈타인 같은 학자가 되거나 스티브 잡스 같은 기업인이 되거나 세종대왕과 이순신 같은 지도자와 영웅이 되는 것도 방법이겠습니다만 그 못지않게 중요하고 모든 이들이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자녀와 다음 세대를 사랑과 인내와 믿음으로 길러내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되기는 어렵지만 자애로운 부모는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처럼 성공하기는 어렵지만 믿음으로 자녀를 양육할 수 있습니다.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되기는 어렵지만 다음 세대를 위해 인내와 섬김으로 봉사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작은 자의 그런 섬김을 이런 영웅의 업적보다 결코 작다고 여기지 않으십니다. 자녀 하나를 건강하게 잘 양육하는 것은 우주 하나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영혼에는 우주보다 크신 주님을 모시는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눈높이를 맞추는 사랑
지난 14일 영국의 에식스주에 사는 엄마 나탈리 페르난도는 자폐증을 앓는 5살 아들 루디와 함께 바닷가에서 산책을 마치고 차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자 떠나기 싫었던 아이 루디는 갑자기 땅바닥에 엎드려 꼼짝도 않으며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일으켜 세우려 엄마가 달래고 얼르고 화를 내고 1시간 동안 무슨 수를 써봐도 루디는 떼만 쓸 뿐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안이란 남성이 자신이 루디와 이야기를 좀 해봐도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안은 자신도 루디 옆에 엎드리더니 말을 걸었습니다. 이안은 한 번도 화내지 않고 루디와 대화를 이어가더니 마침내 루디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차로 향했습니다. 엄마 나탈리 페르난도는 이안을 영웅이라 부르며 자신의 SNS에 소개했습니다. 이 이안이란 영국남성은 아마 저를 포함해 이 세상의 수많은 조급한 부모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주님은 어리석고 미련한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어 주시려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도 미숙한 자녀와 아이들과 눈 높이를 맞추고,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것처럼 축복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