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6 옷자락만으로도 / 막 5:21-34

20210606 옷자락만으로도 / 막 5:21-34

막 5:21-34/옷자락만으로도

210606 주일설교
좌불안석
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길을 가다가 구걸하는 이를 만났습니다. 마침 주머니를 뒤져도 동전 한 푼 나오지 않자 그의 손을 잡고 말했습니다. “형제님, 내일도 이 자리에 계신다면 제가 지나는 길에 꼭 무엇이라도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걸인이 감격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제게 최고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이 거리를 지나는 이들 중 누구도 나를 형제라고 불러준 이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큰 선물은 저에게 없습니다.”
톨스토이가 걸인조차도 형제라고 부른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자신의 삶과 19세기 제정러시아의 사회질서에 깊은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태어나면서부터 귀족의 신분으로 손가락 하나 까딱 하지 않으며 온갖 풍요를 누리는 반면 자신의 집에 속한 농노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뼈빠지게 고생을 하면서도 자신의 땅 한 평 없이 늘 배를 곪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모든 이들을 성경의 가르침 대로 형제로 여기며 실제 자신의 땅을 농노들에게 나누어 주어 그들의 삶을 개선시키려 애쓰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진정한 신분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여기 예수님을 만나러 온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여러 모로 예외적입니다. 이 불쌍한 여인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느라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며 가진 돈도 다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그녀는 이 분이야말로 자신을 고쳐줄 수 있는 분이란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녀가 가버나움 거리에 달려나왔을 때 예수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가리고 옆 사람에게 물어보니 회당장 야이로의 죽어가는 딸을 고치러 가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높으신 회당장의 딸을 고치러 가시는 길이라면… 나같은 천하고 부정한 여자를 위해 발걸음을 멈추게 할 수는 없겠지. 염치도 없이…’
예외적인 사건
혈루증, 여자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는 병. 부정하여 경건한 이들은 접촉해서는 안 되는 병입니다. 그런 병을 12년이나 앓고 있었으니 그녀에게 대인기피증이 생긴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병을 앓는 것만으로도 죄인으로 여기던 시절 혈루증 환자는 더더욱 멸시의 시선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멈춰세울 용기도 없었지만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는 더더욱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절박했습니다. 그녀는 굳이 예수님을 멈춰세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처럼 능력이 충만한 분이라면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으리란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군중들 틈에 끼어 예수님의 뒤에서 몰래 옷자락을 만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억센 남자들을 뚫고 마침내 예수님의 바로 뒤까지 간 그녀의 손이 그 옷자락을 만졌을 때 뜨거운 무언가가 몸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불은 그녀의 몸에서 부정한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듯 했고 병이 떠나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흥분한 그녀는 얼른 군중들 틈으로 물러났습니다.
그녀의 치유사건은 아주 예외적입니다. 아마 복음서에서 예수님 당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치유하신 사건은 여기가 유일할 겁니다. 그녀는 회당장 야이로처럼 그 앞에 엎드려 호소하지 못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녀를 바라보며 축복하시거나 손을 얹어 안수해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옷자락만 만졌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녀의 병은 나았습니까?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옷자락만으로도…
첫째는 예수님의 흘러넘치는 능력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역사했습니다. 그 능력이 너무나 강력하게 역사하여서 마치 고압전기가 전선끝까지 흐르듯 옷자락 끝을 잡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난 것입니다. 구약에서 옷자락은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했습니다. 이사야서 6장입니다.
(사 6:1)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여서 그 옷자락에까지 그 능력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녀를 구원하는데는 그 옷자락 끝의 능력만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옷자락은 또한 은혜를 상징합니다. 룻은 보아스에게 은혜를 구하며 이렇게 간청합니다.
(룻 3:9) … (룻이)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옷자락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너무나 충만하여 흘러넘쳤기에  옷자락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실제로 복음서에서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입니다.
(마 14:36)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
예수님에게 손을 내미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시기를 축복합니다.
딸아…
그녀가 치유받은 두 번째 이유는 예수님의 넘치는 자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서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여자를 찾으셨습니다. 그녀가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려 두려워 떨며 자신이 한 일을 말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녀를 무엇이라 부르십니까?
(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하필 딸입니까? 보통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여자를 만나면 항상 ‘여자여…’하는 호칭을 주로 쓰십니다.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여자를 향해 딸아 하고 부른 곳도 여기가 유일합니다. 이 사건의 또 하나의 예외입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이 일이 벌어진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가시는 길입니까? 회당장 야이로의 간청을 들으시고 죽어가는 그의 딸을 살리시러 가는 길입니다. 그 소녀에게는 회당장이라는 힘있고 부유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회당장은 그 마을에서 유력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부유합니다. 그의 딸은 귀한 대접을 받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셔올 만큼 그녀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 딸을 살리러 가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다 떼거지로 몰려갈 만큼 모두가 주목하는 소녀입니다. 특별한 소녀입니다.
그러나, 이 혈루증 앓는 여인에게는 그런 아버지가 없습니다. 그녀를 위해 예수님 앞에 무릎꿇고 호소해서 집으로 모셔갈 만큼 유력한 아버지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녀의 병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도 감히 예수님을 불러 세워 그 앞에서 호소할 만한 자신도, 용기도, 염치도 없습니다. 회당장의 딸이 somebody라면 혈루증 걸린 여인은 nobody 아무 것도 아닌 여자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무가치하다 여기고, 자신이 치유받은 것조차도 죄인양 두려워 떠는 그녀에게 예수님은 비밀을 알려 주셨습니다.
딸아… 너도 딸이다. 누구의 딸입니까? 하나님의 딸입니다. 딸아, 너는 회당장의 딸이 아니라 하나님의 딸이다. 너를 위해 달려가 주님을 모셔올 회당장같은 아버지가 없어도 슬퍼하지 말아라. 두려워하고 떨 필요가 없다. 너에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 너는 하나님의 딸이다. 회당장 아니라 대제사장이 와도 총독이 와도 부러워할 필요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당당하여라, 담대하여라, 기뻐하여라. 하나님의 딸아! 하나님이 사랑하는 딸아!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nobody라고 여기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은 결코 nobody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딸이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어이 고쳐내고 살려내고 구원해내시고야 마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떨지말고 슬퍼말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뻐하시기를 축복합니다.
믿음이 구원하였다…
그녀가 치유받은 세 번째 이유는 그녀의 믿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고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황당해하며 되묻기를,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잖습니까? 모두가 예수님의 옷뿐 아니라 몸 이 곳 저 곳을 만지고 밀고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반응은 본문 마가복음보다 누가복음이 더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눅 8:45) …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무리가 밀려들어 미나이다.” (눅 8: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 하신대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아무 의미없이 내 몸을 밀어대는 무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호기심에, 헛된 욕심에, 불신앙으로, 무심히 나를 그저 만져보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하고 진실한 믿음으로 간절하게 나를 만진 이가 있다. 그런 이를 나는 찾는다.” 마침내 그 여자를 발견하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막 5: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믿음으로 평안을 얻었다! 그 믿음으로 치유받았다! 그 믿음이야말로 내가 찾는 것이다!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자만이 참된 구원을 얻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예배하는 이만이 주님의 얼굴을 봅니다. 믿음으로 주님을 따르는 이만이 천국을 경험합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 전 세계에서 25억이 넘는 이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며 예수님의 몸을 만지려 합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주님께 손을 내미는 자만이 주님에게서 쏟아져나오는 능력과 자비를 경험합니다. 믿음으로 여러분의 손을 내밀어 주님의 옷자락을 만지시길 축복합니다.
옷자락을 만지라
마침내 그녀는 병에서 놓였습니다. 이제 그녀를 부정하게 만드는 병은 사라졌습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를 부정하게 만들었지만 예수님의 찢긴 상처에서 흘러나온 보혈은 그녀를 정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회당장 같은 세상 아버지가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사람들 틈에 숨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는 두려워 떨지 않아도 됩니다. 그녀는 평안을 얻었습니다. 그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모든 이들은 구원을 얻습니다. 그 분의 옷자락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분의 능력과 자비는 무한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사람들 틈에서 당당히 예배할 자격이 없다고 여기신다면, 부정하고 무력하고 보잘것없고 연약하다고 느끼신다면, 주님을 부를 염치도 자격도 없다고 느끼신다면, 힘겨운 세상에 홀로 던져져 견디기 힘든 시련에 부서지고 깨어졌다면 이제 예수님 곁으로 가만히 다가가 그 분의 옷자락만이라도 살며시 만져보십시오. 미소 가득한 표정으로 여러분을 돌아보시는 예수님과 눈이 마주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