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20 알리지 말라 / 막 5:41-43

20210620 알리지 말라 / 막 5:41-43

막 5:41-43/알리지 말라

210620 주일설교
알리지 말라
여러분 중 모든 기도응답을 다 받았다 생각하시는 분 계십니까? 아마 안 계실 겁니다. 기도응답을 받지 못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큰 도전입니다. 이유없는 고난이 끝나기를 간절히 기도할 때, 사랑하는 이의 건강과 인생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건강한 교회와 사역을 위해 부르짖어 간구할 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확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 신앙인은 큰 도전을 받습니다. 기도의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데 왜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있을까요? 기도의 신비를 한두 가지 원리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설명을 분명히 들을 수는 있습니다.
같은 본문을 3주째 읽었습니다. 이제 혈루증 여인도 고쳤고 야이로의 딸도 살렸습니다. 모두가 해피엔딩, 이대로 사건이 끝나도 될 것 같은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마지막에 덧붙힙니다. 43절입니다.
(막 5:43)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 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죽었던 소녀가 살았습니다. 얼마나 경이로운 사건입니까? 그런데 왜 소녀의 부활을 아무도 몰라야만 합니까? 야이로는 얼마나 딸의 부활을 동네방네 알리고 싶었을까요? 잔치를 벌여 온 동네사람을 다 불러모아 자랑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방에 있던 야이로부부와 세 제자 모두에게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많이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대로였다면 이 일은 그 당시 사람은 물론 저와 여러분도 모르고 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어떻게 성경에 기록되어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일을 읽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를 숨기기는 하되 영원히 숨기라고 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변화산에 오르신 사건 이후에 하신 말씀을 보십시오.
(막 9:9) 저희가 (변화)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여기서도 똑같이 변화산의 신비한 체험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다만 숨길 시한을 정해주셨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죽으시고 부활하실 그 때까지만 숨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알려도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실제로 그 이후에는 오히려 온 세상에 예수님의 행적을 전파하라고 사명으로 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당신의 기적을 영원히 숨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부활 전까지만 숨기는 것이었으며 부활 이후에는 오히려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당신의 부활 전에는 기적을 숨겨야 하며 후에는 드러내야 하는 것일까요? 만약 야이로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온 동네사람들을 다 불러모아 잔치를 열어 딸의 부활을 알리고 회당장연합회에 편지를 쓰고 했다면 예수님의 능력은 더 빨리 더 널리 퍼졌을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사랑하는 이가 죽은 집이 어디 야이로 뿐이었겠습니까? 빈곤과 질병이 일상이고 평균수명이 30대였던 시절 얼마나 많은 이들이 수명을 채우지 못 한 채 안타까지 죽어갔을까요? 셀수없는 수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딸과 아들과 부모님과 배우자를 살려달라고 주님께 나와 호소하고 간청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유
그러면 예수님이 그들을 다 살려주시면 되잖습니까? 만약 제게 예수님같은 능력이 있다면 우리 교우들은 물론 뉴저지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만나는 사람마다 다 고치고 살려서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텐데요. 그럼 그들도 행복하고 저도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예수님도 사람들을 고치고 살리고 복되게 하기를 원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기적을 숨겨서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더 몰려올 기회를 갖지 못 하도록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린 것,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신 것,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고픈 이들을 먹이신 것은 분명 잘된 일이요, 주님이 기쁘게 하신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 10장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요 10:10)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헬라어 조에(ζωή)로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적 생명 혹은 신적 생명을 뜻합니다. 흔히 성경에서 영생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조에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사는 생명 혹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영생을 주러 오셨습니다. 그럼 이 영생은 어떻게 주십니까?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죄와 죽음의 장벽을 허물어서 장벽 뒤에 계시는 하나님께로 가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의 장벽을 허물고 무덤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장벽을 허무셨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으려는 자는 반드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믿음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소식을 듣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영생의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시작된 삶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영생과 하나님나라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한 이해와 고백 없이는 불가능한 경험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소녀의 부활이든 변화산의 신비체험이든 오병이어의 기적이든 모두 당신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빛 아래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마가복음 9장을 보십시오.
(막 9:9) 저희가 (변화)산에서 내려 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후에는 이 모든 것은 알려도 될 뿐 아니라 온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고정된 시선
예수님이 염려하신 대로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복음을 듣지 못 한 상태에서는 소녀의 부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저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다시 살릴 수 있다는 소망만 가지고 여기저기서 예수님께 몰려나올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을 살렸다 치십시다.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소녀가 산 것은 기쁘지만 그 기쁨은 잠시일 뿐 그녀도 그 가족도 여전히 죄와 죽음의 권세 아래 신음하며 살다가 몇 십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죽습니다. 병을 고친 것은 기쁘지만 여전히 빈곤과 질병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며 살다가 곧 다시 죽습니다. 배가 부른 것은 고맙지만 곧 다른 불만 불평이 기쁨을 앗아가고 그렇게 잠시 살다가 죽습니다. 문제가 전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배불리고 고치고 살리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은 본질적인 문제 죄와 죽음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는 그저 임시방편일 뿐 진정으로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을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복이요,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당신을 이 땅에서의 문제만 해결하는 요술방망이로 오해하지 않도록, 사람들이 오직 이 땅에서 문제해결에 모든 마음을 빼앗겨 살지 않도록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도 사람들이 당신을 왕으로 삼아 더 배불리 살도록 해 주기를 바라는 기대를 냉정히 거절하셨습니다.
(요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오병이어 기적 후)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사람들의 기대는 왕이 되어 계속 그들을 배부르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 지도자의 가장 큰 임무가 백성을 배부르고 안전하게 살게 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런 이들이 과거에는 왕이 되었고 오늘날엔 대통령으로 뽑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의 필요를 부족함 없이 채워주시는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구원하시는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시선이 이 땅에 고정되지 않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의 비전을 보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이 예수님의 기대대로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표적과 긍휼
그러면 예수님은 도대체 왜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까? 왜 오병이어로 사람들을 배불리셨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나요? 어차피 다시 배고프고 다시 아프고 결국은 다시 죽을 유한한 생명인데 말이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표적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이런 기적을 표적이라 부릅니다. 상징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은 배고픔과 질병과 죽음을 해결한 삶이라는 사실을 이런 기적이 미리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아프지 않을 것이고 죽지 않을 것임을 이 기적체험을 통해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계 21:4) (하나님 나라는)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처음 것들 이 세상의 배고픔과 아픔과 사망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다시 있지 않습니다.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둘째 이유는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육체를 입고 계셨기에 육체의 한계를 경험하셨습니다. 즉 영이신 성부 하나님처럼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 동시에 계시지 못 하시고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갇혀 계셨습니다. 그 시간 중에 만나는 이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시며 깊은 긍휼을 느끼셨습니다.
(눅 7:13) 주께서 (나인성)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요 11:35)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마 14:14) 예수께서 …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막 6:34) 예수께서 …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물론 주님은 이들만 불쌍히 여기시고 다른 이들은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 것은 아닙니다. 세례 요한은 불쌍히 여기지 않으셔서 헤롯에게 죽게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셔서 박해 받고 순교하도록 내어두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 모두를 불쌍히 여기셨기에 그들 모두를 위한 더 크고 완전한 사랑과 긍휼의 구원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셨습니다.
영생의 기쁨
이 진리는 오늘 기도응답의 신비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왜 우리의 어떤 기도는 응답받고 어떤 기도는 응답받지 않습니까? 기도자의 믿음이 변수일 수도 있습니다만, 전심으로 간절히 기도하는 이들의 기도도 응답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도응답은 우리에게 표적이 되어 참된 믿음으로 인도하기도 하고 우리의 간절함이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 일으킨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이 땅에 고정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 바람대로 응답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안 들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실상 우리의 모든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본다면,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미리 조금이라도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최고의 기도응답이며 최고의 선물입니다. 갈릴리 각지역으로 파송받은 제자들이 자신이 기도하는 대로 응답되며 사역이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기뻐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눅 10:17)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 (눅 10:20) “…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진정 제자들이 기뻐해야 할 것은 세상에서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병이 낫고 사업이 잘 되고 돈을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감사할 일입니다.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생을 얻은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소한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큰 행복, 가장 큰 기도응답,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의 삶의 문제를 해결받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영생에 비하면 무척 작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이 이 땅의 문제해결에 고정되어 있으면 안 됩니다.
최근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 분이 암에 걸린 새교우의 집에 심방을 가며 걱정이 앞섰습니다.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잘 되었다는 소식은커녕 암에 걸렸으니 이 분이 하나님을 원망하면 어떡하나, 괜히 미안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 교우가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드리려고 들어갔는데 정작 그 새교우는 너무나 밝은 얼굴로 목사님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어쩔 뻔 했습니까?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암에 걸려 죽었으면 세상에 그런 불행이 어디 있습니까? 늦지않게 예수님 믿게 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저를 위해 감사기도를 드려주세요.’ 목사님이 그 신앙고백을 듣고 오히려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은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이 최고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 나라가 최고의 기도응답입니다. 이 땅에 고정된 우리의 시선을 들어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